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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4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7) - 신자의 사회생활 : 그리스도인과 정치 A

요한복음 1:6-8, 골로새서 3:12-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3-24

말씀내용
찢어진 주님의 몸
1세기의 고린도교회는 몇 가지 이유로 분쟁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0–11).”
고린도 사람들은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정도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들을 열렬히 추종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지도자들인 바울, 아볼로, 베드로를 따르는 자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파까지 있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의 미숙함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유사한 문제들을 적잖이 안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정치입니다. 교회가 태극기와 촛불,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신앙보다, 하나님 나라 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보다 더 중요해서,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원수로 만드는 일을 자행합니다. 이런 일은 세상의 광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10년 전 쯤에 일어난 한 사례를 나누겠습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10여명의 교우들이 함께 아침을 먹으러 인근 카페로 갔습니다. 왼편에 앉은 교인들은 얼마 전 별세한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오른편에 앉은 교인들은 특정 전임 대통령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빨갱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고,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신자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대놓고 비난을 하지는 않았지만, 좌우로 나뉘어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고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적 해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일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정치 문제는 예민한 문제이므로 적어도 교회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마음대로 떠들어도 괜찮습니까? 성경적인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두 주일에 걸쳐 이 주제를 성경적으로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두 나라 이론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구속 언약에 기초하여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창 12:1~3), 여전히 노아 언약에 기초하여 세워진 일반 나라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창 9:1~7). 이것은 우리가 교회라는 영역에서는 믿음으로 살고, 교회 밖 세상이라는 영역에 들어가서는 세상 지혜와 이치를 따라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시민이면서, 동시에 일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는 신자의 영적 관할권을 가진다면, 일반나라는 세속적 관할권을 가지고 우리의 외적 행동을 규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속의 나라와 일반 나라, 교회와 세상은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바울 사도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묘사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1–23).”
그리스도는 그냥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으나 그 완성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복종시키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26). 그리고 그날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한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계 11:15). 일반 나라는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영원할 것입니다.
아직 완성의 날은 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지만, 두 나라가 존재하는 시대에서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에 대한 생각은 초대교회를 지나 어거스틴을 통과하는 오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변천이 있어왔습니다. 이것을 조금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상고하는 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보여 간단히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역사의 처음 300년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핍박과 박해가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유대교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일반나라인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는 기독교 신앙이 로마 제국에 용인될 수 없다고 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대교회의 기독교 문헌들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대립과 적대 관계로 설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에 이어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이어지자, 이런 상황의 변화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로마 제국을 역사 속에서 실현된 기독교화된 하나의 실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이후 유세비우스 사후(340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어난 어거스틴(354~430년)은 처음에는 유세비우스의 관점을 공유했지만, 점차 이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어거스틴이 처했던 상황, 로마제국의 약화와 한편으로는 게르만족의 로마제국 침탈과 공격으로 인한 전쟁의 참화를 겪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2001년 911 테러가 미국과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과 같은 사건이 어거스틴이 살던 410년 8월 24일에 일어났습니다.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로마를 사흘 동안 약탈한 일입니다. 800여년 동안 외부 세력에 의해서 침공을 받은 적이 없던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사흘간 약탈을 당한 이 사건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대 로마 제국의 지성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어거스틴은 15년에 걸쳐 성경적 역사철학서 <신국론>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상 마지막 인간까지 전체 인류는 둘로 나뉜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서로 대립되는 두 도성인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으로 설명되는 소위 두 나라 이론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는 하나님의 도성에, 비신자들은 육체를 따르는 인간의 도성에 속하였으므로, 서로 중복되거나 이중 회원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도성 사이의 이중시민권은 불가능하지만, 두 도성이 정확하게 지상의 교회와 국가와 완전히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도성에 속한 사람으로서, 다른 도성에 속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어거스틴에게서는 이런 애매함이 완전하게 해소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두 나라 이론은 사실 이후 신학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후일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어거스틴의 두 나라 이론에 근거하여 말합니다. 루터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자들과 세상 나라에 속한 불신자들로 구분되며, 하나님께서는 두 나라를 위해 두 통치를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영적 통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세속 통치의 목적은 악인과 불신자들을 세속의 칼로 억제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두 나라는 서로 다른 두 백성인 신자와 불신자가 속한 곳이며, 둘 사이에 회원의 자격은 중복되지 않습니다. 즉, 한 나라의 시민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칼의 사용에서 완전히 분리되거나 무관하게 사는 것은 아닌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본 것과 같은 애매한 입장을 봅니다.
두 나라 이론은 종교개혁자 존 칼빈에게서 더 성숙한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9장 15절과 4권 20장에서 두 나라 이론을 말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신자는 이중적 통치를 받게 되는데, 각각 영적 관할권과 세속적 관할권을 특징으로 하는 영적인 통치와 국가적 통치입니다. 영적 통치는 영적 삶을 관할하고, 국가적 통치는 외형적 행실의 문제들, 음식, 의복, 질서있는 삶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들을 관할합니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입장을 극복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의 통치 모두에 속해 있으며, 영적 통치에 속했다고 해서 국가적 통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이 두 나라 시민권을 가졌음을 밝힘으로써 어거스틴이나 루터에게서 본 애매함의 요소를 제거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4세기 동안 대부분의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칼빈의 두 나라 이론을 인정하고 발전시켜 왔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하나님은 구속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나라인 교회를 다스리시고, 창조주와 보존자로서 국가와 다른 모든 사회제도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착각과 혼동 그리고 한국교회의 현실
조금 장황하다 싶지만, 제가 이 두 나라 이론을 설명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현존하는 두 나라, 두 통치를 혼동하고 착각하는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지요. 본문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약 40일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수시로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행 1:3). 그런데 제자들이 한 가지 오래도록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질문을 주님께 던집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따를 때, 계속해서 그들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럼 이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가진 생각은 당시 모든 유대인의 생각 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서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제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도 드러납니다. 에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뒤, 절망한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a).”
가이사랴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조금 전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했던(마 16:16)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나하리이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마 16:22).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킬 메시아로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 보십시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행 1:3).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 개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막 1:15).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사실은 정치적 개념이 가득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된 정치적 유대 나라로 착각했고 혼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드디어 그 때가 왔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7). 주님께서는 단순히 때와 시기에 관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와 시기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생각하는 유다국의 정치적 독립과 회복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이런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전세계, 즉 로마 제국을 넘어 땅끝까지 확장될 것인데, 그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정치적 국가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 나라는 너희에게 임하실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질 영적인 나라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자들과 같은 착각과 혼동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또는 통일한국)을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원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 지식이 없는 일반 신도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들과 교회를 다니며 강연을 하는 유명 강사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잘못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특정 정당이 정권을 잡도록 기도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주요 정당에는 기독인회라는 일종의 신우회 같은 조직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기도회로 모인다고 합니다. 그곳에 초청받아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정당의 복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정치인들은 정치논리와 진영논리에 휘둘려 잘못 행한 것이 없는지 자신들의 말, 태도, 행동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영예를 드러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정치인들은 정권을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정치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정치인이 참된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된 듯 싶습니다. 이것은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한기총이라는 자칭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 기독교 정치조직을 대표하는 목사들의 발언이나 기도 내용도 제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이 해석하고 원하는 정권 창출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화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는데, 허구인지 사실인지는 증명된 바 없지만,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 좋은 이야기이기에 나누려고 합니다. 전쟁이 숨가쁘게 치열하게 진행되던 상황에서, 대통령이자 북군의 지도자인 링컨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한 참모가 “하나님도 참 고민이 많으시겠다”고 말했답니다. 왜냐하면 남군 지도자인 리 장군 역시 신실한 신자였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링컨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해본 적이 없소....... 나는 오늘도 기도하기를, 내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소." 이 일화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태도의 문제-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제 아무리 국회요, 정당에 속한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 다워야 하고, 정당, 정책,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정당의 경계, 정치적 입장의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정치적 입장, 자기 정당의 입장이 자신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가치처럼 보이는 기독교 정치인들을 적잖이 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는 처사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라면, 불의에 맞서고 약자를 돌보며 정의와 긍휼 같은 성경적 가치들을 지키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공인일 때, 더욱 더 강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론 정치인, 혹은 정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앞서 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가 정치적 진영 논리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원치 않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그 누구도,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주장으로 인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혼동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혼동은 악하고 불량하며 천박한 태도를 낳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행동이나 연설이나 논의를 할 때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과 정치를 논할 때에도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언사와 태도가 지나치게 독선적(獨善的)이어서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된다면,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형제 사랑 보다 중요하며,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정치의 문제가 우리 자신 안에서 이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 숭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라.
신앙은 멀리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어줍니다. 단지 멀리 보는 사람으로서 만이 아닙니다. 멀리 본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신앙을 성품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눈 앞에 있는 것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지혜로울 수 없고 여유롭지도 못하며 천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멀리 보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신앙을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문화활동을 하거나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합당하게 세워진 일반 나라를 존중하는 합당한 수고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원리를 따라 이 수고를 감당해야 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 합당하게 활동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수고가 구속의 나라와 연결된 영원한 가치를 지닌 일이 아니며 한시적 가치를 지닌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수고들은 다 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손으로 만들거나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고가 헛되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처럼(마 6: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셔서 내 뜻, 내 개인적 정치적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게 하시고 주님 재림의 날에 우리의 선한 수고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인식은 세상에서 특별히 일반 나라와 관계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게 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가지만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고 자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앙 성숙의 열매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정치에서 좀 멋있는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나와 다른 견해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와 다른 당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눈 앞의 정치적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정권욕에 눈이 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뭔가 위대하고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분이구나” 하고 존경심을 품게 하는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을 보고 싶습니다.
19세기 영국에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 정치인이 있었으니,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입니다. 우리나라에서 2008년에 상영되었던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그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신실한 신앙인이자 영국의 하원의원이었던 그는 노예 무역 위에서 경제 번영을 누리던 대영제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총 11번의 노예무역 폐지법안의 부결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20여년 만인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고, 이후 건강문제로 의원직을 사퇴한 후에도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다가, 결국 죽기 직전 1833년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은,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자기가 속한 정당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그리고 때로는 자기가 섬기는 국가의 경제적 이익과 가치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정치인만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어떤 정당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이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정당의 정치적 견해보다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이 있습니다.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함은 물론입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과 주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해치고 무시하고 짓밟는 자리로 가는 것은 신자에게는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적용적 권면
말씀을 맺으면서, 간단한 적용적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자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의 정치적 표현이 우리가 한시적이고 일시적 가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임을 드러내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것,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이 땅에서 어떤 정치적 가치를 위해 수고하지만, 우리는 한시적 가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정치적 입장이 보수이거나 진보일 수 있습니다. 신자는 반드시 보수여야 한다거나 진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으로 승인 받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신자 역시 어느 한 입장에 설 수는 있지만, 그는 늘 그것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비판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는 최고의 가치, 절대의 가치,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관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자기가 속한 진영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더 높고 더 깊은 가치와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진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노아 언약에 기반하여 세우진 국가의 기능으로서,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피를 흘린 사람에게서 피를 흘리게 하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창 9:5~6).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를 돌보는 긍휼 또한 중요한 성경적 가치입니다. 정의와 긍휼!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이 가치들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언제나 주장만큼이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례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교회 안에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틀렸을지라도, 여러분은 심판자가 아닙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적으로 상대 진영에 있는 지도자들을 희화화하거나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런 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물론 그리스도인도 시위에 참여하여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열되는 정치적 논쟁이나 시위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감당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옷 입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끝으로, 하나 더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입장과 쟁점들을 달리 할 수 있고 때로는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일에는 함께 주님의 상에서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의 상에서 함께 먹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낄 만큼 정치적 이해관계가 영향을 미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리고 하나님 보다 중요한 우상이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치적 입장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게 놔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십시오(마 6:33).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정치적 이상, 이념, 목표는 그 다음 자리에 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정치를 하든지,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