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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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2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5) - 신자의 사회생활 :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사람들

창세기 23:1-20, 창세기 14:21-24, 창세기 1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3-10

말씀내용
지난 30년 이상 한국교회는 크기라는 외양을 추구한 나머지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현상은 교회라는 조직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교인들 개인의 신앙과 성품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어떤 조직 못지 않게 돈과 세상적 성공을 추구하는 모습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의 삶의 내용, 인격과 성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는 것도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관, 인격, 성품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선교학에서는, 참된 회심은 세계관의 회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더 쉽게 와 닿도록 “주머니가 회개해야 참된 회개다” 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들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돈에 대한 관점과 인생관, 세계관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이런 변명으로 둘러대고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도덕적 수준이나 인격적 성숙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룩하고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삶이 확 변하더라, 하루 아침에 성숙한 인격, 주님을 닮은 성품으로 변하더라” 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제가 여러 번에 걸쳐 다루었듯이, 신앙의 성숙은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쳐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종종 실수와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신앙은 아무리 어린 신앙일지라도, 참된 신앙이라면 그 성격과 본질과 방향에서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앙이 가지는 본질적 성격과 방향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불신 세상에서 어떤 태도와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서 배우는 신앙의 본질과 방향은 한 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1. 본문의 배경과 상황--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알고 그것에 익숙해지라.
본문은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로 마므레 막벨라의 밭과 굴을 헷 족속 에브론으로부터 매입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와서 60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을 때가 75세였습니다(창 12:4). 그의 아내 사라는 남편보다 10살 연하였고 127세에 별세했으니 가나안에서 62년을 살고 별세한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25년을 기다려서야 이루어졌지만, 땅에 대한 약속은 사라가 죽던 순간까지도 아무 징조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창 12:7)?

하지만 오늘 본문은 사라가 죽던 순간까지도, 그곳에서 단 한 평도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땅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평생 시험하였던 것은 아들 이삭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가 되어 아들은 얻었는데, 땅은 한치의 땅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이 시대의 통상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62년을 사는 동안 이렇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이제 그 약속을 믿고 우리가 열심히 사업을 하고 힘을 길러서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땅부터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하자. 언젠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온 땅을 다 내 것으로 소유할 날이 오겠지.”

얼마든지 공감이 되고, 그럴 법한 태도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복하라고 하셨지. 그러니 우리는 망해서는 안 되고 망할 수도 없어. 열심히 사업을 해서 성공을 이루어 내야 해.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 돈을 벌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도 잘 섬겨야겠다.” 이런 태도가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대신 저주의 통로가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열심히 사업을 하다 보니, 나 때문에 넘어지고 손해보고 사업이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이런 태도는 믿음의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약속을 이루어 봅시다.” 결국 이런 태도가 만들어낸 것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창 16). 하나님의 뜻을 내 힘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태도는 오늘 한국교회에 너무나 익숙한 태도가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의 성공을 이루어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태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고, 이것은 인간의 계산과 능력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땅은 어떻습니까?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이삭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운 아브라함은, 이제 땅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능력으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얻게 하실 것을 알았고 그렇게 바랬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내 사라가 죽을 때까지도 아브라함이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족장이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이 주변의 세력들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간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사병 318명과 아모리 동맹군과 함께 참전하여 동방 동맹군을 치고 롯과 사로잡힌 자들을 구출해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힘으로 땅을 사들여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하나님께서는 묻는 아브라함에게 그 밤에 은혜로운 언약을 체결해 주셨고,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 객이 되어 섬기다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심판을 초래할 만큼 가득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창 15:13~1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그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아내의 매장지로 그곳에서 땅을 매입한 행위는 그가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실 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가족이 죽으면 고향에 매장하는 것이 보편적 관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매장을 위해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묻으려고 땅을 매입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전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이 주실 것을 소망하였다는 전제에서, 우리는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세상을 살면서 거래와 비지니스를 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믿는 자의 태도와 성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볼 것입니다.


2.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기품 있게 사는 자(창 14:21~24).
예수님을 믿으면 바보가 되어야 하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양보하고 손해보고, 또 우리의 그런 태도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알고도 그냥 참아야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신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는 우리는 친절할 필요가 있고, 믿음 때문에 양보하여 손해와 불이익을 겪는다면 그것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용만 당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리석게 속고 이용당하는 아브라함을 보지 않습니다. 그는 충분히 지혜롭고 충분히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절하게 요구하면서 거래를 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품위, 기품을 잃지 않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애곡하던 아브라함은, 일어나 나가서 자기 주변에 사는 헷 족속에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외국인으로서 객으로 와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히브리말로는 ‘게르’라는 말인데, 모세가 광야에서 낳은 장자의 이름, ‘나그네/객이 되었다’는 뜻의 게르솜이 여기서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자신을 ‘거류하는 자’로 소개합니다. 히브리 말로 ‘토샤브’라는 이 말은, 임시로 거주하며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소작농이나 사회 경제적으로 의존적 신분의 사람들을 토샤브, ‘거류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면, 아브라함이 자기 땅을 매입해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의존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더 이상 낮출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면서 헷 족속에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또 그의 태도를 보십시오. 7절에서 그는 헷 족속을 향해 ‘몸을 굽히고’ 말합니다. 12절에서도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말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태도는 굴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겸손하라는 것은 굴욕적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겠습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창 14:21–24).”
아브라함이 롯과 가족들을 사로잡아간 동방 동맹군들을 야습하여 롯과 소돔에서 사로잡혀간 자들을 구출하여 돌아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을 영접하던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돔 왕이 말하지 않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전투를 치르고 온 아브라함의 당연한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실 오라기 하나 취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라는 것입니다. 당당한 태도와 말이 아닙니까? 이런 태도와 말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실 것을 그는 믿고 소망합니다. 그런데, 훗날 소돔 왕이 아브라함이 거부가 된 것은 그때 내가 그에게 준 것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소돔 왕과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땅한 몫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익에 관해서도 초연하게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우리의 태도를 형성합니다. 눈 앞의 이익에 대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신사가 되게 합니다. ‘신사(紳士)’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숙녀’라는 여성명사가 있지만, 저는 남녀를 통틀어 신사라는 말에 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신사적이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사를 영어로 gentlemen(젠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젠틀하다’는 말과 유사한 말로 nobl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결하고 기품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불어 표현이 나왔습니다. 높은 신분 혹은 많은 재산 등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을 대하여 여유와 기품을 드러내고 살며 그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소돔 왕 앞에서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로서 자신을 낮추면서, 그 땅의 주인인 헷 족속 사람들과 교역을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태도는 고결합니다. 자신을 낮추지만, 품위가 있고 기품을 잃지 않는 신사의 모습입니다.


3. 존중 받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 삶
우리가 헷 족속 사람들을 대하는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것이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껏 자신을 낮추지만 헷 족속은 아브라함은 매우 존중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창 23:6).”

그들은 아브라함을 ‘내 주여’ 라고 부를 만큼 존경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지도자’ 입니다. 그 땅에 60 여년을 넘게 사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존경에 기초하여, 헷 족속은 아브라함이 원하는 대로 묘실 중 좋은 것을 택하여 사용하라고 관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들 중에서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관대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에브론이 소유한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며, 그 값을 치르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힙니다(8~9). 그러자 무리 중에 있던 에브론이 아브라함이 원하는 밭과 굴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에브론의 말은 선물로 그 밭과 굴을 아브라함에게 주겠다는 말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에브론이 ‘드리고’, ‘드리되’, ‘드리오니’(11)라는 말들을 거듭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말은 관대함의 표현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상당한 값을 치르겠다고 말합니다.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창 23:13).”

결국 아브라함이 에브론이 요구한 은 사백 세겔을 줌으로써 거래가 성사되었고, 헷 족속 사람들이 증인으로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은 마므레 앞 막벨라의 밭과 굴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최초로 소유하게 됩니다(17~18). 사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레아와 야곱이 차례로 이곳에 매장될 것입니다. 족장들이 여기 매장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제안 대로, 그곳을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자기 소유로 삼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소돔 왕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중심 요지는 아니지만, 신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신자들과 거래와 비지니스를 할 때, 유념해야 할 한 가지 태도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과 비지니스 관계에 있거나 여러분과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손해와 불이익을 보지 않고 그들의 손해 위에 내 이익을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유업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사는 인생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에 비하면 점에 불과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물건을 살 때 지나치게 가격을 깎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는 사람의 기분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합니다. 일종의 버릇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자신과 거래하는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고결함과 기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가격을 심하게 깎고 나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부릅니다. “김권사, 이리 와서 사. 여기 물건이 아주 싸!” 우리는 하늘에 잃어버릴 수 없는 유업을 가진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저속하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고, 신자의 태도일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할 뿐 아니라,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분과 거래를 하거나 비지니스를 할 때 손해를 보지 않도록 마음을 쓰십시오.


4. 신자의 소명(창 12:1~3)
세상을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낮추면서도 신사적인 기품을 잃지 않게 하고, 존중을 받는 삶 속에서 주변 이웃들이 자기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지 않게 살아가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다른 말로는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소명이 창세기 12: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아브라함은 자기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그런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소명 의식이 그로 하여금,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 그런 태도로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우리 속에서 일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라고 불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자기 어깨에, 자기 삶에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가 걸러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서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손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소명 의식은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백성들을 데리고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곁에서 일을 했던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먼 길을 군대도 아닌 유다 백성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군대를 붙여서 보호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왕에게 자기가 해왔던 말을 생각했습니다. 에스라 8:21~23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스 8:21–23).”
에스라는 평소에 왕에게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고 말해왔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찾는 백성이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아무리 위험한 여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을 보호하실 것이 너무나 당연 했기에, 에스라는 왕에게 군대를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백성과 함께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결국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을 진멸하겠다고 하실 때,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출애굽기 32:12을 보지요.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2).”
모세는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너무나 당연한 본성적 태도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 소명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5. 제삼계명과 주기도문의 첫번째 청원(출 20:7; 마 6:9)
오늘 말씀의 결론은 십계명의 제삼계명과 주기도문의 첫번째 청원으로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중 제삼계명을 우리는 압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이 계명은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신자가 구할 첫번째 기도제목으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십계명의 제삼계명과 같은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비지니스를 하고 거래를 하는 모든 관계에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중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지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가진 인생임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비지니스를 하고 거래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으로 인해 유익을 얻습니까? 일터에서 만나는 여러분의 상사 혹은 여러분의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여러분의 태도와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는 것이 됩니까? 여러분은 비록 자신이 손해를 입더라도, 하나님의 영예를 높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이것이 복음의 은혜를 받은 신자,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삶으로 세상을 살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앎으로, 이 영광스러운 삶을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