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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0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3) - 신자의 사회생활 : 평안을 구하는 자들

예레미야 29:4-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2-24

말씀내용
우리는 신자의 교회생활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8주 동안 살펴보았는데 이제 성도의 사회생활 혹은 시민생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결코 교회생활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영역을 포함하여, 가정과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사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은 교회라는 영역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상의 영역에도 임재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할까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는, 무조건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따르지 말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함으로써, 세상에서 교인의 비율과 교회의 양적 성장에 비하면 교회의 영향력은 너무나 미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들의 다수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내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놀라울 만치 미미합니다. 한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비율이 25%에 달했던 시대가 있었음에도 기독교의 영향력은 주로 사람의 숫자나 돈의 힘, 대형건물의 존재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지, 교회의 성숙함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함에서 나오는 힘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우리 존재는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막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왔다고 말할 수 없고,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도 제대로 감당해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런 문제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가 무엇이며 세상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고 세상 속에 교회가 존재하는 양식을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영향력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야 하며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한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통해서 이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지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주전 597년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당시 아버지 여호야김을 이어 유다의 왕이 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여호야긴을 페위하고 왕과 함께 유다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모든 용사들과 장인, 대장장이 등 모든 기술자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게 됩니다(왕하 24:8~17). 이때, 예루살렘 성전의 많은 기물들이 파손되고 또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때, 바벨론으로 붙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선지자 에스겔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로부터 11년이 지나서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유린되어 유다가 멸망하게 되지만, 이미 유다는 바벨론 군대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바벨론에 사로잡혀간지 2년이 좀 지날 무렵,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붙잡혀간 동포들에게 한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내용입니다.

당시 바벨론으로 붙잡혀간 유다 백성들의 괌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냐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제4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 28장 3~4절 그리고 11절입니다.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니라…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렘 28:3–4,11).”

하나냐는 이렇게 예언을 하고 2개월 쯤 지나서 죽습니다(렘 28:17). 하지만,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유다 백성들에게나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백성들에게나 이런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할 만큼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특히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사람들은 이미 바벨론에서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이제 2년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요지는, 10절에 쓴대로, 70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사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2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던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11절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어떻게 바벨론에서 70년을 보내야한다는 말씀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는 말씀인지, 이 백성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인지를 예레미야는 이 편지에서 설명합니다.

●바벨론에 사는 유다 백성과 세상 속의 교회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인,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유다 백성과 오늘 불신 세상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바벨론에 사로잡혀가서 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적실성을 가지는 것일까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유다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성격을 가지는 유다라는 나라에서 유다 백성이 살아가던 방식과는 너무나 달랐을 것입니다. 이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아무리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 위에 서 있던 나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나라에서 살아가던 것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환경 속에 떨어진 것입니다. 바벨론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하는 삶과 세상에 나가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교회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구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도 않고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 월요일에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방식은 인정받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롱을 받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두 영역에서의 삶은 이점에서 현저히 다릅니다. 만일, 이것이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말한 것처럼, 그저 몇 년만 보내면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견뎌보고 버텨보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70년이라면, 아니 우리의 평생을 지내고 자손들을 보아야 하는 세월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적실성을 가지는 지점입니다. 유다 백성이 이제 70년이라는 세월을 바벨론에서 살아야 한다면, 여기서 평생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듯이,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평생을 살다가 주님께로 가게 된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냥 몇 년 버티고 살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종말론적 삶의 의미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론적 삶이라는 개념입니다. 여러분은 종말론적 삶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삶이 그려지십니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론적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스리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언제나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세상, 이 세상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이 속해서 살아가는 땅/지구, 나라, 그리고 조직을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삶에는 언제나 긴장의 요소가 있습니다.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긴장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언제나 이게 전부가 아니며,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가치일 뿐임을 알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긴장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종말론적 삶

그래서 역사에는 왜곡된 형태의 종말론적 삶이 종종 등장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종말의 관념을 얼마나 많이 강조해야 하는가에 따라서 현세의 삶에 우리가 두는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에, 여기서 성경적 강조를 바르게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바벨론에 사로잡혀가서 2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을 유다 백성들처럼 잘못 살아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기억할 수 있을만한 소동이 1992년에 일어났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이름은 교주인 이장림이 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말의 약자로 이단 집단이 일으킨 소동입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한 이장림을 따라, 8000여명의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모여서 휴거를 기다렸던 소동입니다. 물론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기 말을 앞둔 때에 이들이 일으킨 소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외국에서는 짐 존스의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도 있었습니다. 1978년 교주 짐 존스를 추종하여 미국에서 삶을 정리하고 남미의 가이아나의 집단 농장으로 이주하여 공동생활을 하던 900여명의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이런 유사한 일들은 사이비 이단 집단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언제나 종말론적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종말을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포기하게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신옥주라는 교주를 추종하여 사이판으로 가서 집단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종말론적 삶의 강조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와 정반대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위험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위에 언급한 바, 이단 사이비를 광신적으로 따르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올 것이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살아 생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만이 그들에게는 실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성취를 이루고 돈을 잘 벌고 모으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세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이면 예배당 안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바,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도 아니며, 소망을 가진 삶도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고,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듯이(계 22:20), 성도는 주님의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인삿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라나타’라고 하는 인삿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6:22에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

여기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아람어로 마라나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께서 오신다”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이 말을 썼는데,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통용되는 인삿말이기도 했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라거나 “주님이 오신다”는 말이 인삿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만큼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걸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때때로, 21세기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대하여 하는 인삿말로 이 마라나타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주님의 재림을 잊어버리고 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목회를 하는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성경적 기준과 요소들과 함께, 주님의 재림을 얼마나 긴장감있게 기다리고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건강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재림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며, 이 세상이 전부일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삶은 다미선교회나 짐 존스 인민사원과는 정반대편에 서있으면서도 그들 만큼이나, 성경적으로 왜곡된 무종말론적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벨론에서의 종말론적 삶

다시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의 요지는 70년이 차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2년만 참으면 된다는 내용이 아니고 70년을 기다려야 하는 삶이라는 내용이었음에도, 이것은 바벨론에서의 삶이 전부가 될 수 없으며 결국 그 때가 차면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었기에 기본적으로 이것은 종말론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러나 이 날이 언제라는 것을 모르지만, 지금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점에서 이들과 동일하게 종말론적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바벨론에 사로잡혀가서 7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유다 백성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 5~6절을 보지요.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6).”

예레미야 선지자는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유다 백성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삶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레미야는 그들에게 그냥 평상시처럼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며” 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각들은) 아내를 맞이하고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가 가득한 이교도들의 땅인 바벨론에서 소수자로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들의 삶은 70년에 마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것처럼,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직장을 그만 두고, 한가하게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살 생각일랑 하지 말고 다 한 곳에 모여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합니다.그들이 일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더 이상 유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일하면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터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거부당하고 때로는 조롱을 받을 것이며 그들을 적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만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과 에스더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들은 믿음으로 평상시에 살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노아 언약 이후에 그 언약에 기반하여 세워진 일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구속의 나라에 속하는 교회에 속한 교인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교회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직장,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조직들은 하나님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 대한민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성애를 법적으로 인정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밀어닥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인이라고 여기시는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라는 요구도 거셉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성경의 기준을 타협하고 살라는 거센 요구들을 맞닥드리고 살아가야 하는 바벨론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주님께 속한 우리들도 미워하고 우리를 적대시합니다(요 15:18~19).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 때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핍박에 종언을 고한 이후로, 유럽사회는 세기를 거듭하면서 기독교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마치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가 만들 수 있다는 큰 착각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콘스탄틴 이후의 유럽 세계는 이런 기독교회의 착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유다 백성에게 보낸 편지를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너희가 살아가게 될 바벨론 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라고 명령하거나, 그 나라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곳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불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근본이 되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기본적 요구는 믿는 자로서 불신 세계 속에 존재하며 자기의 몫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리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물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삶의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나그네와 거류민, 외국인으로서 자기 몫을 감당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위해서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개인의 삶에서는 정작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반드시 신앙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사회 정의, 민주화, 인권, 평등 여러 가치들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의 개인 윤리는 전혀 살아내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대한민국이라는 세속 일반 나라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인 교우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 불신 세계에서 신실하게 삶을 살며 여러분의 몫을 감당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수록, 여러분은 다니엘을 중상모략했던 페르시아의 신하들, 또는 모르드개가 만났던 하만과 같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속에서 삶을 살면서 믿음을 살아내십시오. 이제 저는 몇 주에 걸쳐 여러분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이 바벨론이라는 불신 세계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믿음을 사용하여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는 자

오늘은 본문 7절 말씀에서 하나의 작은 결론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살아야 할 기본적 삶의 모습은, 그 땅의 평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시민으로서, 혹 더 작게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나라가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념과 이데올로기, 경제적 빈부차이, 사회적 차별의 조건들로 분열되어 반목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과 달리, 영원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가졌기에 더 여유를 가지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땅의 기독교회가 도리어 어떤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진리처럼 절대시하고 그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입장을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며 세상적 가치들에 불과한 것에 신앙을 적용하는 행태들은 미숙하기 그지없고 영적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갈 때, 유념해야 할 것, 여러분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대한민국의 평안을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이며, 그런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물론, 그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이 나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거나 바꾸라는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이 나라의 평안을 구할 때, 우리도 나라의 평안함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평안을 구하셔야 합니다. 이 나라가 평안함으로 교회가 평안을 누리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에 걸맞게 이 분열과 다툼의 땅에서 믿음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이요, 화평케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