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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9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2) - 신자의 교회생활 : 권력이냐, 섬김이냐

마가복음 10:35-45, 마가복음 8:31-33, 마가복음 9:31-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2-17

말씀내용
신자가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교회가 어떤 원리, 어떤 원칙을 가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세상에서 배운 원칙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교회 안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범한 그런 실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제자들의 무지와 무감각(막 10:32~34)
먼저 우리가 상고할 본문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앞, 32~34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세번째로 당신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신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였는데, 이것이 8:31에 기록되었고, 그 다음 두번째 예고의 말씀은 9:31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 10:32~34이 그 세번째 예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에서 이 세 번의 말씀 뒤에는 모두 제자들의 부끄러운 실패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처음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하는 것이지요. 그때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부끄러운 잘못을 주님은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에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8:32). 그런데 제자들의 무지와 무감각은 “서로 누가 크냐”하는 논쟁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로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는 좀 알아듣고 변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서 주님께서 왕권을 세우실 때 자기들을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최고 권력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번번이 메시야로 오신 주님의 사역의 본질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자기들이 배운 것을 주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곤 하기에, 오늘 이 주제는 우리의 교회생활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합니다.

2. 인간의 본성은 권력을 추구한다.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권력의 자리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마 20:20), 그들의 어머니도 가세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왜곡되면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런 세속적 욕구가 작동하게 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본성, 곧 죄성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는 성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이 되어 누군가를 섬기기 보다는 권력을 휘두르고 누군가를 다스리려는 본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도 인간의 권력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낌없이 돈을 쓰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표를 얻으려는 권력 의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돈과 권력은 일단 맛을 보면 볼수록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속성이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은 열 제자의 반응이 41절에 나옵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모든 제자들이 이 두 사람에게 분통을 떠뜨렸습니다. 제자들이 이 두 사람에게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은, 이들도 두 사람 못지 않게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열 제자들은, “그래, 잘 되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섬겨야 하는 자리일텐데, 너희 두 사람이 그렇게 수고를 감당해주겠다고 하니, 너무나 고맙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아니, 너희 두 형제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겠다고?”라고 하며 화를 낸 것입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야고보와 요한을 통해서 그 마음이 표출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언제나 앞에 나서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나섰던 야고보와 요한도 문제지만, 가만히 있던 제자들 또한 권력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야고보나 요한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과 태도는 언제나 그 안에 분쟁을 초래합니다. 이것은 오랜 교회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입니다. 권력에의 욕구는 제자들에게서 보듯이, 언제나 교회 안에 분쟁을 초래하게 됩니다.

3. 권력 말고 십자가를 주목하라.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권력의 자리를 요구한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먼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하셨습니다(막 10:38). 영적 무지를 꾸짖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아 사역의 본질 즉 주님께서 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별로 알고 싶어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도 오해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이 두 제자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39~40).
이것은 다시 주님께서 받으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잔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몫으로 받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번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시 16:5),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시 11:6; 합 2:16).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미도 물론 부정적입니다. 본문에서, ‘잔’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주님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을 때 언급하신 잔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또 주님은 ‘세례’도, 잔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셨습니다. 세례는 문자적으로 물에 잠긴다는 뜻인데, 구약성경에서 깊은 물에 잠기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울리게 합니다(삼하 22:5; 시 42:7).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의미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마시고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나는 죄인의 대속물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부활하는 메시아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너희는 고작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있단 말이냐?”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권력에의 욕망에 영의 눈이 어두워진 이 제자들은 주님의 책망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질문에, “할 수 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막 10: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들의 대답을 긍정하신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라고 이들의 대답을 긍정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몰랐겠지만, 주님께서 긍정하신대로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칼에, 열 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가 되었습니다(행 12:2). 요한은 열 두 사도 중 가장 오래 살았지만, 철저하게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짊어진 삶을 끝까지 살다가 주님께로 간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영광스러운 사도의 반열에 서게 하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 은혜는 그들이 원했던 세속적 욕망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서 살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권력에의 의지나 욕망을 따라 살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십자가를 주목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권력 말고 십자가를 주목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4. 하나님 나라는 서열과 권력에 기초한 나라가 아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두 제자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42절을 보면,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라고 시작합니다. 여기 ‘불러다가’ 라는 말은 마가복음에서 특별하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소환한다’는 뜻으로, 마가복음에서 9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주님께서 특별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집합!’ 이라는 말일 수도 있고, ‘주목!’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 앞으로 가까이 불러모으시고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세상에서는 이렇다고 말하지 말아라. 여기는 교회다.” 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엄연히 구별되는 곳입니다. 세상의 원리가 교회에서도 동일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달라서 서열이나 권력에 기초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십니까? “교회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에서 임직을 앞두고 직분자들을 선출할 때 내홍을 겪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99% 권력과 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의지와 욕망 때문입니다. 교회를 서열 구조에 기초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오해하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의 목사—장로—집사—권사—성도의 순서를 계급 서열이라고 오해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본문에서 지적하신 문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권력에의 의지를 대놓고 추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이들에게 분통을 터뜨린 열 명의 제자들로 인한 내홍은 21세기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데, 우리는 자신의 계급과 영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교회에서 내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며 자기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목사들도 이 유혹 앞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더 큰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어하고 교회를 더 성장시키려는 욕구에는 권력과 성공과 영화에의 의지와 세속적 욕망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시건만, 더 큰 교회, 더 안락한 삶, 성공한 목사라는 타이틀을 얻기를 추구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말리며 항변하였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주님이 세상에서 영광의 보좌와 권력의 중심이 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세속적 욕망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우리가 권력과 영화를 향해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온갖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권력과 서열로 움직이고 작동되는 조직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섬기는 자’ 그리고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집사를 의미하는 διάκονος 라는 단어이고, ‘종’은 δοῦλος 라는 단어로 고대사회에서 노예 중 가장 끝에 있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섬기는 자’는 주로 식탁 시중을 드는 종으로 어느 정도 괜찮은 종이라면, 여기 ‘종’이라고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지시를 받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최하층 노예입니다. ESV성경은 ‘심기는 자’와 ‘종’을 각각 servant 와 slave 로 번역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의도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나 앉아서 먹는 자가 되기를 바라지, 식탁 시중을 드는 웨이터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지위는 높아지고 권세는 많아지며, 부리는 종들이 많아지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교회는 세월이 흐를수록(세상 말로, 짬밥이 쌓일수록) 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자, 으뜸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 교회를 섬기고 세워가면서, 평생 주님의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면, 교회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면모를 드러내게 될까요? 이 교훈을 언제나 우리 가슴에 새깁시다. 앉아서 먹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부리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교회의 재정에서 사례를 받는 소수 전문사역자들만이 식탁 시중을 들고, 종이 되어 심부름을 한다면, 그것이 어찌 교회겠습니까? 반대로, 교회 안에 섬기는 자와 종들이 즐비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억지가 아닌 기쁨과 감사와 은혜의 충만함으로 섬기려 하고, 종이 되어 누군가를 섬기며 기뻐합니다. 이런 교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멋질까요? 세상에서 이런 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5. 선택은 특권이 아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은밀한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 부탁드리지 않고 모든 제자들이 보고 듣는 자리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들은 무슨 심산으로 다른 제자들이 듣고 보는 상황에서 자신감 있게 이런 부탁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들의 자신감은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주님께서 열 두 제자 중에서 핵심 그룹으로 가까이 두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제자는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실 때 주님과 함께 있었고 그것을 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마가복음 5:3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 이들은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영광도 목도했습니다(막 9:2). 이뿐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들 세 제자 만을 가까이 데리고 가셨습니다(막 14:33). 이 세 제자는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선택을 받아 다른 제자들이 가지지 못하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이들 세 제자는 안드레와 함께 주님께 가장 먼저 부름 받은 네 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 이런 부탁을 드린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이 정도의 부탁은 주님께 드릴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형제니까 어쩌면 자기들보다 앞장서서 두드러지게 행동하는 베드로를 배척할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이미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도 들었으니 이 두 형제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착각하고 오해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이런 선택을 특권으로 착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세 제자를 특별히 가까이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이지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특권이란,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리고 특권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허영과 부풀려진 자아와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보는 바입니다. 하지만, 선택을 은혜로 여긴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은혜는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집니다. 선택을 은혜로 여긴다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부요함과 흘러넘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택이 특권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은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잘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구원의 문제만 선택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로 선택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교회 공동체의 투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선택을 특권으로 여길 수도 있고 은혜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 여부는 태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고집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은혜가 아닌 특권으로 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변의 형제와 자매들을 더 많이 섬기고 배려하고 살펴주며 그 일을 위해 시간과 돈과 마음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택을 은혜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목사니까 당연히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 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원리요 내용임을 합당하게 분별한 결과로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은혜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으로 인하여 교회는 은혜롭고 평안하며 풍성한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6. 섬기는 종,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더 알기를!
마가복음은 특별히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조명하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전체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 바로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은 받으실 고난과 죽으심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의 이기적 권력 욕구로 영적 눈이 멀어 있습니다. 번번이 그랬습니다. 이제 주님은 다시 당신이 왜 오셨는지, 메시아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집권자들이 하듯 주관하지 않으셨고 세상 고관들이 하듯 권세를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심에도 자신을 낮추어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섬김의 절정은, 대속할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당신의 목숨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시는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 영화, 자기 권력에 대한 욕구로 가득합니다. 이들의 생각과 마음은 자신으로 가득해서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성령님께서 마가로 하여금 이것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두번째로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싸우고 있었습니다(막 9:31 이하). 우리 모습을 보는 듯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은 세 번이나 당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번번이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무감각만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끄러운 실패만을 드러냈습니다. 주님을 지척에서 모시는 세 제자 뿐 아니라, 열 두 제자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거울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심은, 교회는 세상의 지배, 권력, 서열 구조와 원리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메시아 사역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십니까? 우리는 이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알았고 온전히 알았기에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구속해 주신 은혜, 대속해 주신 그 사랑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은혜, 그 사랑을 더 알면 알수록, 더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이 섬기지만, 섬기는 만큼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섬기는 자로 오신 주님, 대속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섬기되 주장하지 않는 자리를 고수할 힘을 얻지 않을까요? 섬기는 자로 오셔서 어떤 생색도 내지 않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대속물로 죽임을 당하신 주님을 따라 섬길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이런 은혜가 충만한 곳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제자들은 마치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제자도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 그렇게 오셔서 우리의 대속물로 죽으신 주님을 우리가 시야에서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은혜를 더욱 더 알기를 바라지도 않는 듯 합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했고 무감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여쭈어 보았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주님,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십오.”라고 말씀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지도 않고,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은 더 알기를 바라십니까? “주님!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감각한 저를 깨우쳐주셔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더욱 더 알게 하옵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그렇게 섬기며 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의 평생의 교회생활에서 이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