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68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1) - 신자의 교회생활 : 용서와 관용

마태복음 18:21-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2-10

말씀내용
용서는 부담스러운 주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보다 복수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용서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때때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속적이거나 일관되지 않다는 것은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용서라는 숙제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오랜 관계 속에서 내 인생에 중요한 한 사람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가해진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 또 반대로 내가 지속적으로 잘못을 행한 일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여기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만 가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억만 죄악을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용서를 떠나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경험을 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용서가 흘러나오는 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원리상 용서의 공동체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용서 모두를 포함합니다.

1. 무제한의 용서를 하라.
우리가 오늘 마주하는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라도 할지니라(마 18:22).” 주님은 완전수인 7을 거듭 사용하심으로써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적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 사람 당 7번씩 나눠 70명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잘못을 행한 그 한 사람을 그렇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고(4),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으며(6), 이 작은 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고(19),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이야기(12~13)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함으로써 형제를 얻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15~17).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본문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니,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겠느냐고 조금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물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번도 용서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일곱 번은 용서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용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이런 생각을 가진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2.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합니다. 왕이 신하들과 결산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종들’이라고 한 것은 왕을 대면할 수 있는 고위급 신하들을 가리킵니다. 아마 그들에게 맡겨준 큰 영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에 대한 결산을 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중 왕에게 만 달란트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도 이행하지 못한 종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고스란히 신하의 빚이 되었습니다. 만 달란트라는 빚의 액수 때문에 이 비유를 듣던 제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달란트는 화폐의 가장 큰 단위였고 ‘만’은 수를 세는 가장 큰 단위였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계산하면 만 달란트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20만년 동안 쓰지 않고 벌어야 하는 금액입니다. 이것은 비유에서 사용되는 과장법으로, 만 달란트는 말하자면 이 신하가 처한 무한한 절망적 실존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기간을 연장해 준다고 해서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왕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지만, 당시 노예의 몸값이 500~2000 데나리온이었다고 할 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 뿐입니다. 머리를 조아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하는 신하의 말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만 달란트를 탕감해줍니다. 여기 탕감이라는 말이 ‘용서’를 의미하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사하다’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용서는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게 갚을 빚이 없는 것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둘째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신하가 집으로 가던 중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탕감받은 빚의 60만분의 일이고 노동자의 세 달 급료입니다. 이 신하는 빚진 동료를 보는 순간, 그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동료가 조아려,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조금 전에 자기가 했던 말과 태도를 똑같이 보이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신하는 동료를 옥에 가두고 맙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동료들이 왕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고, 왕은 다시 그를 불러 옥졸에게 넘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옥졸’이라는 말은 충격을 줄만한 단어인데, 원래 ‘고문하는 자’라는 의미로, 채무자들을 괴롭히고 옥죄어 결국 빚을 갚게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잘못하면, 이 말은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한 분이라는 뜻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여기서 주님이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이 신하가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인가?
주님은 이 비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말씀은 우리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비유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는 기도도 이런 뉘앙스를 가지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1:25도 하나님의 용서가 조건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이 비유와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용서한다는 명제를 반어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행한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가 서신서에서 주신 구체적인 권면들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4:32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 골로새서 3:13에서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것이 복음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 비유도 왕의 탕감이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런 무한한 빚의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이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용서할 수 없다면 그가 받았다고 말하는 용서는 가짜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이런 무한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몰인정하게 행동하는 것은 모순이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 동료에게 작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면, 왜 사도들은 용서하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용서가 우리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성에 굴복하여 형제를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내가 과연 만 가지 은혜를 받은 자가 맞는가?” 되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쉼없이 날마다 우리의 기도에서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만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건적인 것은 율법의 논리입니다. 복음의 논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를 받은 사람은 형제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된다!”

4. 복음의 논리의 작동방식—신자의 자기 인식
어떻게 이 복음의 논리가 그리고 능력이 용서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용서하게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소극적으로, 복수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 5:15; 벧전 3:9; 롬 12:17~19; 눅 6:35). 두 구절만 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15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또 누가복음 6:35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악을 갚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약속을 참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며, 또한 내게 상주실 것을 바라보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고 복수를 하려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고 상주심에 대한 약속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논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가해자가 뉘우치는 빛이 없다고, 혹은 잘못을 빌면 용서하겠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는 일은, 그 가해자의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함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전서 2:22~23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벧전 2:21).”
용서의 문제는 특히 그리스도인 형제들 사이에서 중요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죄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이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고, 내게 상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우리를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은혜를 입은 자’로 보게 합니다. 앞에서 읽은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보지요. 에베소서 4:32~5:2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4:32–5:2).”
여기에는 어떤 관점이 제시되고 있습니까?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려 하나님께 제물이 되신 것처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죄용서의 은혜를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심판하심으로써 다루셨습니다. 나는 만 가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관점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신자 자신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하게 될 때, 신자는 형제를 용서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의 인식을 언제나 가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늘 당당하고 베푸는 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는데 네가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합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신을 베푸는 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쓰는 장부에는 내가 남에게 베푼 것만을 열심히 빠짐없이 빼곡히 기록해둡니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베풀고 살수록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남이 내게 하는 것보다 월등히 많을수록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셨습니까? 이 장부에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이 장부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탕감해주신 만 달란트가 빠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신하의 문제였습니다. 임금이 자기에게 탕감해준 막대한 이익인 만 달란트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동료에게 손해를 보았다고 느끼는 백 데나리온은 꼼꼼히 기록해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가 은혜 아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럽고 추하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만 달란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십자가의 은혜,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그 자리를 늘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모든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논리가 신자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율법의 논리가 작동할지라도, 이 복음의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5. 용서는 단번의 결단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과정이다.
용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속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용서를 단번의 결단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단이라기 보다 과정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사례가 있습니다(삼하 13~14).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형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로 도망하여 3년을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특별히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요압이 꾀를 내어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다시 불러오게 합니다. 이것은 다윗으로서는 큰 용서를 베푼 일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돌아왔어도 다윗의 마음은 자식을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또 2년이 흘러갔습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애증과 같은 양가 감정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었을까요? 다윗의 마음만큼이나 압살롬의 마음도 불타올랐습니다. 결국 아버지인 왕을 대면하고 입을 맞춰 화해를 하게 되지만, 이 용서하지 못한 긴 과정은 압살롬의 마음에 반역의 단초를 키우는 시간이 되고 맙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이스라엘로 불러들였을 때 그는 용서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시 2년을 기다려 압살롬을 대면합니다. 다윗은 사실, 매일 아들을 용서하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아들을 볼 때마다 그를 용서해야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용서는 압살롬을 이스라엘로 불러오는 한 번의 결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완고함은 매일 아들을 용서하는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기간 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누렸던 시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굳은 완고함에 익숙해져가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매일 반복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한 번 했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용서를 한 번의 결단 정도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오해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매일 우리는 반복해서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죄성은 끈질기고 꺾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끝이 있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독일의 천재 신학자요 순교자인 본회퍼는 언젠가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세지 마라, 베드로야. 횟수를 정하지 말고 용서하거라. ‘얼마나 많이’라는 질문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거라. 끝없이, 끝없이 용서하거라. 이것이 용서이며, 이것이 은혜란다. 그렇게 할 때 너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단다! 네가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횟수를 세면 셀수록 문제는 더 불거지고, 관계는 더 고통스러워진단다. 네가 횟수를 세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이전에 지은 죄까지 끊임없이 기억하고 계산에 넣게 되며, 그렇게 되면 네 자신이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베드로야, 횟수를 세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거라. 관대하게 용서한다는 것은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란다. 네 권리를 잃어버릴까 봐 근심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단다. 네 권리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지켜 주실 테니. 너는 다만 끝없이 용서하거라!"

6. 복음을 경험하는 삶으로의 초대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단 6가지 청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은혜를 구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이것은 용서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매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기도에서 이것을 구하십니까? 회개가 신자의 삶과 기도에서 사라질 때, 신자는 복음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하고, 당연히 이것은 형제를 용서하는 은혜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신을 만 가지 은혜를 입은 자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나아감으로써 입니다. 날마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할 때,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 복음이 깨달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냉냉해지는 것일까요? 용서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사라졌고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을 과연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책상머리에서 배워지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진 복음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용서하는 삶을 통해서 경험됩니다. 그리고 용서가 교회의 형제들 사이에서 경험되는만큼, 교회는 복음과 그 은혜로 충만한 공동체로 지어져갑니다. 왜 교회의 강단에서는 복음이 온전하게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안에 차가움과 완고함의 기류가 흐르는지 아십니까? 용서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 대신 판단이 많아지는 까닭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이때 우리는 복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7. 용서에서 관용의 성품으로
우리는 [신앙과 성숙]이라는 큰 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 큰 주제를 다루게 된 배경에는, 신앙이 좋다고 하지만 성품이 형편없는 경우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설명하고, 참된 신앙은 참된 성품을 낳는다는 명제를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귀로만 들어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귀로만 듣는 복음은 다른 사람을 지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으로 고약하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어야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은 은혜로운 성품으로 변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여 형제 간에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은헤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을 닮아 변화하게 됩니다. 특별히 용서는 관용의 성품을 낳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를 마치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이 관용은 율법이나 전통의 조문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을 향해서 참아주고 은혜롭게 관대함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영어성경인 ESV는 이 단어를 reasonableness로 번역했습니다.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이치에 맞는 태도, 적당하고 합당하게 행하는 태도, 사려분별이 있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장로의 자격을 말할 때, 사도 바울이 언급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 3:3).” 하지만, 관용은 오직 장로만의 품성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무엇이 이런 성품을 낳습니까? 날마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함으로써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신자들의 품성은 관용을 드러내게 됩니다. 관용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의 성품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없이 “무조건 OK”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까다롭고 비판적이며 까칠한 사람이 아니라, 너그럽고 은혜롭고 받아주며 도와주는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한 뒤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한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가려내실테니 너는 심판자가 되지 말고 형제를 향하여 관용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용서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하사 복음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고 누리는 교회로 우리를 세워주시기를 구합니다. 제임스 패커의 기도를 인용함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분은 당신뿐입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되새기고,
이전의 상처를 담아두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타는 불빛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드러납니다.
우리가 희미하게 알았던 진리를,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얼마나 작은지를,
주님께 진 우리의 빚이 얼마나 큰지를,

주님,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을 씻겨주소서.
분노를 멈추라고 명하소서.
그러면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의 삶은 주님의 평안을 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