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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7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0) - 신자의 교회생활 : 권위와 자유

베드로전서 5:1-6, 로마서 14:1-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2-03

말씀내용
신자의 교회생활-권위와 자유 (벧전 5:1~6; 롬 14:1~10)

오늘 우리는 다시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교회생활 중 ‘권위와 자유’라는 소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상고할 본문은 두 군데인데 특별히 권위와 관련해서 베드로전서 5:1~6을, 자유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로마서 14:1~10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와 노아언약에서 유래하는 일반나라로서의 국가, 또는 사회를 잘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기독교를 끌어들이는 작금의 현상들을 보면서, 이 주제에 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더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반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교회생활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원리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할 수 없고, 교회는 세상은 그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1. 다스리는 직분의 권위 (벧전 5:1~6;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24문)
모든 인간 조직에 정치가 존재하듯이, 교회에도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다스림의 체계가 존재합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교회는 영향력 있는 목사나 지도자가 다스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 당신의 종들을 세우시는데 이들이 장로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도록 교회를 다스리고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난점이 있습니다.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가령,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왕정시대라면, 문제가 될 게 없겠습니다마는,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설 (社會契約說)과 주권재민(主權在民) 사상에 근거한 민주주의 체재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권위는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스림은 권위를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과 함께 다스림의 권위도 부여하십니다. 만일, 교회에서 장로의 권위가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스림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이 권위와 관련한 오랜 논쟁에는 그 사람의 인격(person)에 권위를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맡은 직분이나 직책(office)에 권위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쟁점을 주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분과 함께 권위를 부여하셨고 그 권위는 교회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크 데버(Mark Dever)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어떤 이들은 지역 교회와 관련해 ‘지도자’나 ‘권위’라는 표현의 사용을 꺼린다. 그들은 이런 표현을 으뜸 되기를 좋아한 디오드레베 같은 인물이나 비기독교적인 자랑과 결부시키는 것 같다(고전 1-3장; 요삼 1:9).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명히 이르기를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딤전 3:1)고 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자(프로이스타메노스)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롬 12:8).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 교회 일을 감독하는 자들을 존경하라고 당부했다(딤전 5:17). 히브리서 기자는 ‘인도하는 자들’에 대해 말했다. 이 모든 말은 교회지도자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책임과 주도권을 함축하고 있다.”(더 처치, 5장 교회의 정치)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벧전 5:2a).” 이 말씀은 장로의 직분에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의 장로가 직분에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교회는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권위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계속 보지요.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b~3).”
이 말씀은 장로(목사를 포함)의 권위 행사 방식은 자발적 섬김, 돈을 위해 일하지 않음, 군림하지 않음, 본의 됨이라고 가르칩니다. 권위는 권위로되, 이런 권위 행사 방식에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됩니다.
그러나 권위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위는 그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 빛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5~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여기서 젊은 자들은 나이가 젊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회중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내가 더 잘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겸손은 성경이 늘 우리에게 가르치듯이, 그저 굽히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데서 나오는 가식이 없는 참된 태도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서 참된 순종을 하려면, 참된 겸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겉으로야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마음 중심이 중요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오계명도 사실은 부모만이 아니라 모든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순종하라는 포괄적 명령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24문은 오계명이 말하는 부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5계명에서 말하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 뿐 아니라 나이가 많거나 뛰어난 은사가 있는 모든 사람과, 특히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서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이런 말씀은 인기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부응해서 현대의 탈 권위적 렌즈로 성경을 읽고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견 멋지고 쿨 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교회에 세운 권위에 순종할 줄 모르는 회중을 낳게 될텐데, 이런 문제는 목사들의 전횡 이상으로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는 시대 정신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교훈에 착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교만하여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대적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순환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해지고 겸손한 자는 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장로들의 판단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라고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닙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라면, 당회(장로들)의 의견과 교회 회중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문제가 교회의 중요한 문제일 때, 그것은 공동의회에서 전체 회중의 의견을 듣고 최종적으로는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본질적인 문제일 경우에는 회중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회중이 이런 결정을 하려면, 무지해서는 안됩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하는 순종은 참된 순종이 되기 어렵습니다. 회중은 교회의 중대사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한 투표를 할 때에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 받는 가운데, 장로들은 권위를 행사하여 다스리며 온 교회는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구하게 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건강한 성경적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2. 자유의 행사 (롬 14:1~10; 약 1:5)
권위의 문제와 더불어 우리가 살펴볼 또 하나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종종 권위는 오용되거나 남용될 위험이 많고, 그렇게 될 때 언제나 자유가 침해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오랜 군사독재를 경험한 우리 현대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성경적으로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 경향성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세상의 역사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왕들이 이것을 증명해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목사의 권위가 절대시될 때, 얼마나 패악한 폐단이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도들에게 순종을 명할 권위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분명하게 다루지 않는 문제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지혜를 구하면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5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만일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하라고 명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 입니다. 라고 말하게 된다면, 이것은 신자 개인에게 주신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됩니다.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앞서 잠깐 언급한 정치 영역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 어떤 정권, 정당, 정치적 성향을 선전하고 강조하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 교인들을 동원하여 정치적 집회에 참여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집회에 예수님의 이름이 동원되고 십자가가 들려지며 이런 정치 시위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정당을 지지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행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는 교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불편하게 침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이런 일에 호응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목사 자신이 목사에게 주어진 권위를 스스로 지나치게 높이는 불경함을 저지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인들이 성경의 원리에 무지함으로 목사의 명령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여기고 따르는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에게 어떤 정당에, 혹은 어떤 정치인에게 투표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나 정치인에 대하여 성경적 관점을 말할 수 있고 비판 내지는 호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흑백의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인이라면 이 정당인 이 정치인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는 말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극단적 상황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또 한 예로, 교회의 공 예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이 경험하셨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제 기억으로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교회의 예배 형식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경배와 찬양 운동이 한국교회에 들어오면서, 예배형식과 순서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어느 교회를 가든지 예배의 형식은 대동소이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마다 예배의 형식이 참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 교회는 어떻게 하면 예배를 더 감동적으로 드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예배를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예배 형식을 제공하여 자기가 선호하는 예배를 선택하여 참석하게 하는 교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예배에 저런 순서가 들어가야 하지?”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예배 중에 드라마나 춤이 들어가는 경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보통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순서와 형식은 3년 전쯤에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를 통해서 설명 드린 바가 있고, 그 외에도 “하나님 중심적 예배”라는 주제로 전했던 일련의 설교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배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성경이 말씀한 대로 드려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성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예배는 이렇게 드리라고 명하신 대로, 드릴 때 그것이 기호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명하지 않은 방식을 교회의 지도자들이 행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것이 자기 기호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성도들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방식으로, 예배와 같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에서 성도들이 양심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고집하고 행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두번째 본문이 이 주제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는 음식의 문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본문에는 ‘믿음이 연약한 자’와 이들을 받아(용납하여) 주어야 할 사람들—믿음이 강한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가리키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기는 합니다마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아마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소수였던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구약의 음식에 관한 정결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서 음식의 정결 규례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2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 14:2).”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믿음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의식법으로부터 자유 하게 하신 것을 알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들 사이에 먹는 문제로, 그리고 또 날을 지키는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안식일의 문제 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바, 월삭(달의 첫 날)과 절기들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이 모든 갈등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3~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3–4).”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저 친구들 봐,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어리석게도 저렇게 매여서 살잖아?” 라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믿는다는 사람이 저걸 먹을 수 있고, 안식일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거야?” 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전에 어떤 배경에서 신앙생활을 배웠는가 하는 것으로 다른 형제들을 판단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서로가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배운 것이 전부이고 내가 배운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느냐, 날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행한 것입니다. 대개, 믿음의 약함과 부적절한 이해(지식)는 함께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방식이나 행동을 성경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아닌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고기를 먹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여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6절에서 말씀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중요한 것은 먹는 것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그리 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중요한, 더 깊은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겪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로마서의 본문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7~8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졌거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때 그것 때문에 그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이며, 주를 위하여 그것을 하려 하는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성숙함의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기독교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든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정치적으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비성경적으로 행동한다고 비판하는 셈이 되고, 그 형제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며,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집단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내 방식이 성경적 자녀양육이라고 이야기하면, 다른 방식으로 자녀를 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을 판단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 성경적 입장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성경적 입장이 분명한 일에서 우리는 한 걸음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작은 것을 침소봉대하여 전체라고 주장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형제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가령, 제가 “성경적 목회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이와 다른 방식으로 목회를 하는 형제들을 본의 아니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적’이다, 혹은 ‘기독교적’이다 라고 말할 때는 매우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겸손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내가 성경적이고 너는 비 성경적이라고 판단하고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권리를 받은 바 없습니다. 성도들은 각자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이 명확하게 다루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활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주장함으로써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권위가 없습니다. 신자는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문제에서 가능한 스스로 최선이라고 여기는 바를 행하고 믿을 자유를 가집니다. 목회적 권위를 가진 장로들은 신자 개개인에게 이 자유를 위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런 문제에서 서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3. 균형: 다스림 아래서 누리는 자유
우리가 신자로서 누리는 자유는 다스림 아래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라고 말하는 무제한적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사실은, 마귀와 죄의 종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신자는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기에 어떻게 행하여도 망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인도할 권위만이 있고 주님이 명하신 방식대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은 그 권위를 인정,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를 자신의 편협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충분히 누리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부적절한 이해와 부족한 지식들이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깨달음으로써 교정되고 온전하게 되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장로 중,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못했지만, 권위와 자유는 평생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주제입니다. 진리에 섬으로써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되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교회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벧샬롬 교회에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