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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5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8) - 신자의 교회생활 : 영적생활 C

로마서 14: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30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신자의 교회생활에서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두 나라를 구별하고 두 나라에서 각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혼동은 사실, 우리 믿음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막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두 나라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사회에서 배운 습관과 원리와 사고를 가지고 교회에서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을 때(막 1:15), 이 나라가 노아 언약으로 세워진 일반 나라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재림 때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큰 음성으로 들려진 말씀대로,“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계11:15).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늘 제자들에게도 혼동을 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사실, 주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상 나라와 다른지를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혼동을 겪었을 때에야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혼동 가운데서 질문하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 나라와 다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요 18:36).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구속의 나라를 구현하는 교회와 노아 언약으로 세워진 일반 나라가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또 어떻게 다른지를 아십니까?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말하려고 하는데,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써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세상 나라의 특성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입니다. 너무 원색적 표현이기는 합니다마는, 결국 경제가 중요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거의 공통된 대답 아닙니까? 그래서 대통령을 뽑아도 경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거 박정희대통령이 개발독재로 일으킨 새마을운동이 무엇을 하려는 것이었습니까?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자~알 살아보세.”
유치해보이지만, 정직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가사가 아닙니까?
본래 노아언약에서 세워진 일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하지만, 죄인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세워지는 정의는 최소한의 정의일 뿐입니다. 마치, 오염된 수원지에서 흘러나오는 지류에서 약품을 풀어서 정화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정의를 구현하러고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다 소용없다고 외칩니다. 세상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 나라의 특성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중심인 세상에서는 내 견해, 내 주장, 내 권리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신자들은 세상의 방식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로마교회 안에서 소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연약한 자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14장 1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 양심이 음식과 날을 지키는 구약 율법의 관습에 어느 정도 매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음시과 날에 관한 모든 율법의 의식 규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고 믿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부릅니다. 이들 사이에 먹는 것과 지키는 것을 가지고 서로 비난하고 다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까? 물론, 현대 교회에서도 먹고 마시는 문제로 다투고 갈라지기도 합니다. 주일에 점심을 무엇을 먹을 것인가, 주일 점심에 사용할 식판을 선택하는 문제를 놓고 당회가 몇 시간을 다투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다투고 분열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로 인해서, 분열을 불사할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서 상대를 비난했고 다투었으며 분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모든 것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라고 싸잡아서 말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교회 안에서 중요해질 때, 교회는 비판과 다툼과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해집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다툼이 어디서 비롯됩니까? 정욕에서 다툼이 온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약 4:1).
우리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지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가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밥상에 오르는 나물들과 양념들에 대해서까지도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면서도, 그들은 율법의 정신인 정의, 긍휼, 믿음은 버렸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우리는 정의, 긍휼, 믿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버리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덜 중요한 것을 중심에 두게 되자, 중심에 있어야할 것들이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이 지상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 나머지, 형제들을 비판하고 그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의 역사인 교회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너무나 높이는 태도, 어떤 특정한 교리로 자신을 다른 형제들과 구별하려는 태도, 자기 교회가 제일 잘낫다고 여김으로써 다른 형제를 무시하는 마음, 혹은 교회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만을 마치 가장 중요한 듯이 여기는 태도, 성경의 어떤 부분을 마치 전부인양 강조하면서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 이런 것들이 바울 사도가 지금 책망하는 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인 것처렴 여기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날의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 부적응자’라는 표현은 조금 낯설고 그다지 좋은 표현일 수는 없습니다마는, 오래도록 교회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중심인 세상의 방식을 따라 교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부적응자라고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관계맺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하게 되면, 첫째로 자신이 불행합니다. 겉으로는 주장하고 주장을 관철시키는 리더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속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그것이 내 의견, 내 주장, 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표출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그런 경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마 20:1~16).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오전 6시경) 나가서 품꾼들을 모아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하게 합니다. 이들에게는 노동자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이 약속되었습니다. 아침 9시에 주인 또 나가보니 장터에 노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에게도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들어가 일하게 합니다. 다시 낮 12시에, 또 오후 3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주인은 그렇게 품꾼들을 불러 일을 하게 합니다. 날이 저물어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늦게 온 사람들부터 줍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은 기껏해야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모두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새벽 일찍 와서 일한 품꾼들에게도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주인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마 20:12).
바로 이들이 하나님 나라 부적응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을 옳다고 여기고 주인을 비난하고 사실 늦게 와서 일한 동료들까지도 머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반 나라의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규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하면 불행해집니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은 그 왕의 은혜로우심에 감복하여 왕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올려드리는 나라입니다.
그 본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마 20:20~28).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자기 두 아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일반 나라의 생각과 관습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마 20:22).” 무지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으며, 세상 나라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게 되면, 이 여인의 경우처럼, 기도도 어리석은 기도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따른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부적응자가 되고 불행해집니다. 주님을 지근거리에서 3년 동안 줄곧 따라다녔지만 결국 끝까지 부적응자로 남았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상황을 정리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나라에 잘 적응하고 계십니까?

교회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을 잘 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1~5).”
이것은 왕의 마음입니다. 왕의 마음을 알고 왕의 마음을 가져야 왕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시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듯이 그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각, 주님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영적 생활의 요체입니다.
여기서는 내 의견, 내 생각, 내 주장, 내 고집, 내 권리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이라는 영역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회에서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 정말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교회 회의 에 나오게 될 때 마귀가 된다는 것을 가끔 발견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기도할 때는 영적이지만, 회의에서는 자기 권리와 주장을 강하게 펼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회의도 기도회만큼 영적이라는 사실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서처럼, 회의에서도, 그리고 교회의 주방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영적 생활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부정적인 것을 먼저 말한 다음에, 이제 긍정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무엇이 중헌디?”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교회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면, 영적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이방인의 마음 중심에 있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목적도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이 세 가지 하나님 나라의 특성 모두에 걸리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님을 좇아 살아가는 영적 생활입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주장의 충만함과 그것에 이끌림을 받아서는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매우 거친 표현을 몇 군데서 사용하였는데, 그 한 가지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6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할례와 무할례는 너무나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6:15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할례받았다, 받지 않았다 하는 외적 의식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며,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 영향력, 사역, 심지어 성경을 아는 지식..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로되, 믿는다고 하는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내가 정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토대 위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자리하는 배경이, 형제가 형제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다투고 반목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섹 가지 특징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 세 단어는 사실, 로마서 5:1~2에서 함께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의롭다 하심, 하나님과 화평,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기쁨이 나옵니다. 이 두 절은 14:17과 겨의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절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지금까지 써오면서, ‘의’라는 단어를 썼을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존 머레이 같은 학자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요구받는 윤리적 의미에서의 의, 즉 정직하고 바른 행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지금까지 율법과 별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의였다는 사실을 견지해왔고, 사람이 행하는 어떤 것이 그를 의롭게 만든다는 율법주의와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바울 사도가 여기서 다시 인간의 윤리적 의를 언급함으로써, 자칫 자기 의로 흘러갈 여지를 준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맥락이 이것이 윤리적 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일차적 의미는 분명히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의로운 행위를 낳습니다. 요한일서 2:29입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두번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평강입니다. 로마 교회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무시했고 비난했으며 다투고 반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툴 소지는 많습니다. 주장이 달라서, 기질이 달라서, 성향이 달라서 다투고 반목합니다. 진리 때문에 서로가 진리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강조하다가 크게 다투기도 합니다. 여기에 평강은 없습니다.
성경, 특별히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평강은,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평강(peace with God)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하실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로마서 5:1에서 말하듯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평강은 신자의 마음에 주어지는 평강(peace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믿는 자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바로 이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에게 쓴대로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끝으로 이 평강은 형제들과 누리는 평강(peace with others)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을 헐어버리시고 원수들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엡 2:14). 주님께서 헐어버리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만이 아닙니다. 할례파와 무할례파, 야만인아나 스구디아인(1세기 당시 로마사회에서 야만인과 동등한 표현), 종과 자유인 사이에 있는 모든 담과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골 3:11).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이 평강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은 희락, 기쁨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5:2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희락입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저녁, 다락에 모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바로 이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영혼에게는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그는 이 하늘의 기쁨을 맛본 자입니다. 교회는 이런 기쁨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요 16:22).

교회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교회에서의 삶에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을 깨뜨리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주장, 의견, 고집, 지식, 권리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깨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영적 생활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마음에 평강과 하늘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구하십시오. 교회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