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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4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7) - 신자의 교회 생활 - 주일 B

출애굽기 5: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23

말씀내용
우리는 신자가 일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주일로 보내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됨의 표지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창조와 구원의 정점으로 제시된 구약의 안식일이 어떻게 신약교회의 주일이 되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로써 구약의 안식일을 성취하셨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일의 노예로 살지 않고 안식일-주일을 지킴으로써 그 안식을 맛보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는 것입니다.
일요일을 안식일-주일로 지키면서, 즉 행하고 살아가던 모든 일에서 쉼을 얻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는 구별된 날로 지키면서, 성도들은 게으른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며, 또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신 말씀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을 모르는 세상에서 안식일-주일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대항문화적인 저항행위라는 것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이 주제를 계속해서 상고해보겠습니다.

1. 바로의 통치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이라는 주제에서,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는 한편, 공유하고 살아가는 문화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은 적대적 대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 나라 안에서 문화를 공유하고 함께 만들어가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삶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오늘 설교는 대립을 좀 더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한 요구가 이야기의 발단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 절기를 지킨다는 말은 예배와 안식일에 모두 연관되는 개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바로의 대답의 핵심에는 ‘일(노역)과 성과’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출 5:4).”
바로는 감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립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 5:7~9).” 재료를 스스로 조달해서 벽돌을 만들라고 요구하면서도 결과물을 조금도 감해주지 않는 비정하고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바로는 쉼없이 일하는 자들을 게으르다고 비난합니다. 바로의 말은 무정하고 가혹하며 잔인합니다.
그때로부터 3천 5백년이 지났습니다. 인류역사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직장은 야근을 정상적 근무 형태로 여길 만큼, 야근은 일상화 되었습니다. 돈으로 일꾼을 고용한 회사는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야근을 요구합니다. 야근을 피하려는 것은 게으름으로 간주됩니다. 이 야근은 아버지와 남편을, 아내와 엄마를 가족들로부터 앗아가고 가정을 해체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현대사회는 불안이 야기하는 무한경쟁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재화와 상품으로 측정됩니다. 성과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노역을 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고용한 곳이나 고용된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한 부속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아니고 내 자식이 아니면, 그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안이 야기하는 무한 경쟁이 가져온 비극입니다. 바로의 시대와는 조금 다른 동기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비정함, 가혹함 그리고 잔인함의 관점에서는 바로의 통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정함, 가혹함, 잔인함이 바로의 통치의 특징이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기만적 요소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의 일부 계층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서양의 근대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등)이 21세기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등)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과거의 규율사회에서는 규율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낙오자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 간다”는 말이 통했습니다. 가만히 규율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성과사회에서는 아무리 규율을 잘 지켜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성과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성의 과잉은 현대인들을 새로운 궁지로 몰아갑니다. 가령, 주5일 근무로 토요일을 쉰다고 할지라도, 누구보다 더 주도적으로 멋지게 능력을 보여주면서 휴일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은 참된 안식을 빼앗아가고 피로만을 남깁니다. 어디로 가고 오는지에 대한 자랑을 SNS에 올리는 것은 또 하나의 피로를 만들어냅니다.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치열하게 놀아야 합니다. 그래서 휴식 조차 피로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피로사회의 딜레마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 이전보다 더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자리로 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만과 착각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하여 바로가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이런 성과사회에서는 우울증 환자가 급증합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로서 자신과의 내면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병철은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이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는 인간을 대변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이 바로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여기에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현실은 교회조차 이런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바쁜 직종 중 하나가 목사직이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담임목사도 바쁘지만, 부목사들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분주합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렇습니다. 새벽기도에서 시작한 하루는 밤 늦게 찾아가는 심방으로 마칩니다. 아내와 함께 할 시간, 어린 자녀들과 놀아줄 시간, 심지어 성경을 읽을 시간도 없습니다.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책을 읽느라고 바쁜 것이 아닙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바쁜 것일까요?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입니다. 주변의 많은 교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해치는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 스며들어와 당연시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의 통치가 교회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바로의 통치에는 쉼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송하신 적이 있습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상황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주님의 자비한 배려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장이라는 목표를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치일 뿐입니다.
바로의 통치는 죽음의 시스템입니다. 살리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이런 체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존중하며 작은 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며 참된 안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통치 아래서는, 요구하는 벽돌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천대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힘으로 강탈하게 됩니다. 이익을 얻으려고 왜곡과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탐욕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바로의 통치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죄악된 특징들이 하나 하나 우리의 삶에 자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만나와 안식일
하나님께서는 이 가혹한 바로의 통치로부터 자기 백성을 건져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광야로 나왔습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거대한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주님께서 그 이적을 행하신 곳은 ‘빈 들’이었습니다. ‘빈 들’은 광야입니다. 주님께서 빈 들에서 그 많은 무리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일은 바로 이 광야의 백성을 40년 동안 신실하게 먹이신 일을 기억하게 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떡을 먹은 백성들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만나를 먹은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 6:30~31).”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보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앞섰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걱정을 무색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아침마다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음식인, 만나를 경험했습니다. 만나는 하루 이상 보관이 불가능한 음식이었습니다(출 16:13~21). 하지만, 신기하고 놀랍게도 여섯째 날 만큼은 안식일인 일곱째 날을 위하여 저장해 두어도 상하지 않고 보존이 가능했습니다(출 16:22~24).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먹고 사는 음식의 문제를 안식일에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안식일을 연결시키심으로써 어떤 메시지와 어떤 교훈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애굽에 살 때, 이스라엘 백성의 뼛속 깊이 새겨진 삶의 방식은 바로의 통치 아래서 쉼 없이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이들을 가르치십니다. “너희의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은 바로의 혹독한 통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나를 공급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메시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안식일과 연결시키심으로써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무상으로 공급해주시는 만나를 주워서 먹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가 매일 아침 나가서 주워오는 수고를 하니까 먹는거지”라고 생각하는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기적은 더 이상 기적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나가 안식일과 연결될 때, 우리는 내가 주워오는 수고를 해서 먹고 산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날에는 일하지 않고 어제 주운 것으로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의 통치 아래 적응이 된 백성은, 쉬지 않고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배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내십니다. 이것을 배워야,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배부름이 가져오는 영적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이 바로의 통치 아래서 쉼 없이 일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3. 안식일의 충격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가 3개월이 되었을 때, 시내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계시하십니다. 십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그 백성이 십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특별히 안식일 계명을 들었을 때, 그들이 받았을 충격이 짐작이 되십니까? 물론, 이미 2개월 이상 만나에 의존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에 쉰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번째 계명으로 시작해서 십계명을 하나씩 선포하셨을 때, 그들이 정말 까무라칠 만큼 충격을 받고 놀랐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부분은 바로 네번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들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통치 아래서 태어나서, 바로의 가혹한 통치 아래서 쉼 없이 일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이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년으로 일터로 끌려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쉼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속에 들어와 양식을 얻기 위해서 일해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일하는 월화수목금토 그리고 쉬는 일요일이라는 패턴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요일은 무의미 했습니다. 그들은 7일, 1년 365일을 쉼 없이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전에 ‘안식’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하나님께서는 엿새를 일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예외없이 지켜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바라는 백성을 게으르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안식을 명령하십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더럽히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실만큼, 하나님은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출 31:14~15; 35:2~3).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표지였습니다(출 31:13,16).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명령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신 10:13).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주일 성수는 괴로운 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을 친히 제정하여 쉬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이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맛보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여전히 주일 성수는 괴로운 짐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날은 찬송가 가사에 있는대로, 주의 백성이 함께 모여 ‘즐겁게 안식할 날’입니다.

4. 주일지킴은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여전히 바로의 통치의 특징인 가혹하고 비정하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쉼 없이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특권계급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게 되면, 쉼없이 돌아가는 체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겠지만, 실상은 그들 모두가 바로의 체제 아래서 살아갈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쉼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 나라에서 바로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주일에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이 세상에서 드러낼 수 있는 표지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의 사람들,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 주일에 쉼을 누리는 사람들,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식일-주일을 성경대로 보내고 지킴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매 일요일마다 일을 그치고 쉬는 이런 신실한 행위는 일종의 저항행위입니다. 이 행위는 우리가 우리 사회 환경에 널리 퍼져 있는 불안의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몸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주일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적 영역, 인간관계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바쁨과 탐욕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품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이 바로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실제로 그들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바로의 체제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의 통치가 지니는 ‘죽이는 시스템’을 거부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돈 보다 가볍게 여기는 모든 태도와 체제를 거부합니다. 안식일-주일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주일은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일반 나라의 시민으로서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시민임을 세상에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주일로써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지킴으로써 우리는 장차 올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생산품이 아니라 관계에 헌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나온 당신의 백성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생산품(벽돌)이 아니라 관계(언약)에 헌신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의 이전 통치자 바로는 오직 생산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효용성은 벽돌을 만들어내는데 있었습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을 만들기 위해 태어났고 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살아가며, 벽돌을 만들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생산품의 관점이 아니라, 관계의 관점에서 백성을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 얻으실 이익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그들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으셨고 그 관계에 자신을 친히 묶으셨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홀로 당신의 백성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a)”는 열 번째 계명도,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들이 주어졌기에, 안식일 계명도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쉼을 주실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쉼을 주시려는 의지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이 백성만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6.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보내는 주일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은 말합니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통찰입니다.
이점에서,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이 세상의 바로의 통치 체제에 대한 저항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주일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고, 모든 탐심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을 누릴 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약자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고,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면,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분노와 폭력과 질투의 열매만을 맺습니다. 안식일은 생명과 희락, 찬송과 샬롬의 선한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이날에 여러분은 더 일하지 않아도 되고, 더 팔지 않아도 되고, 더 연구하지 않아도 되고, 더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더 점수를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우리 생명을 보존하고 우리로 살게 합니다. 이 안식을 믿음으로 누리십시오. 이 주일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표지라는 사실을 아십시오(사 56:3~8).
주일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해지기 위해서 보내는 날입니다. “너 성결키 위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영어로, “거룩해지기 위해 시간을 들여라(Take time to be holy)”하는 말입니다. 안식일-주일은 거룩해지기 위해서 시간을 들이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영원한 안식에 장차 들어갈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 이 안식일에 그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 땅에서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매주일 참된 안식을 맛보고 누림으로써,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울증과 피로증후군에서 벗어나 살아갈 삶의 동력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영원한 안식을 성취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완수하고 나서 들어갔어야 했을 그 영원한 안식을 둘째 아담이신 주님께서 성취하셨고 그 안식에 우리 믿는 자들을 들어가게 하시고자 선구자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영원한 안식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노아 언약 아래서 허락하신 일반 나라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완전히 완성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주일 함께 모여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속 받은 백성과의 사귐 속에서 하늘의 기쁨과 영원한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주일마다 영원한 안식을 맛보고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안식을 이미 이루셨지.” 이 사실을 알고 오늘 쉼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안식일-주일을 보내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 날을 사모함으로 오늘을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