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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3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6) - 신자의 교회 생활 - 주일 A

마태복음 11:28-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16

말씀내용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천국을 현시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는데에도 의미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구속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에서 우리가 세상 시민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방식, 일반 나라를 대표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구속의 나라의 시민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여기서 시작하여 우리는 일반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야할 소명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감당하고 수행하는가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교회 안에서 우리 자신의 소명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받은 소명은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며, 이 소명은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소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상고했습니다. 오늘은 두번째로 주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모태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했다면, 주일성수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거나 그 정도 개념은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란 저의 어린 시절에, 믿지 않는 친구들과 저를 차별되게 하는 것은 물론 제가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일요일 혹은 공일이라고 부르는 그 날을 저는 언제나 주일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주일과 교회생활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에 다른 일을 한다든가, 놀라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저는 매우 강한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주일은 “~하지 말라”로 기억될 만큼 엄격하게 주일을 지키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침예배부터 저녁예배까지 하루를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이렇게해서 주일은 제 삶 속에 깊이 자리잡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일의 의미를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후일, 그와 관련한 책들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지점들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주일, 주님의 날로 지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이번에 2~3번에 걸쳐, 주일과 관련한 말씀을 상고할텐데, 여러분이 주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주일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두 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에 관련된 접근을 하는 것이기에, 만일,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일반적인 정리를 원하시는 분들은 홈페이지에서 출애굽기 강해 중 22, 32~36, 74번 설교를 들으시기를 권합니다.

1. 안식일, 창조와 구원의 정점(창 2:1~3; 출 20:11; 신 5:15)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일 개념은 본래 구약의 안식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십계명을 주실 때, 그 네번째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역사는 천지 창조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2장을 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
안식하셨다는 히브리 말은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완성하셨기에 그것을 기념하시면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세상 위에 왕으로 보좌에 앉으셔서 당신의 이루신 일들을 보며 만족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것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제7일 안식은, 하나님이 일중독자가 아니시며 피조물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하리라는 것을 염려하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행복이 끝없는 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 멈추신 일은 이제 아담이 이어받아서 문화적 소명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에덴 동산을 경작하여 지키라는 명령에서 나타납니다(창 2:15). 월터 브루그만도 암시했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께서 일을 완수하시고 쉬심과 같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한 후에는 새 창조로 들어가 안식을 누릴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추는 성경의 계시가 진행되면서 점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은 현대 사회가 경험하듯이,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소명은 영원한 노동이 아니라, 쉼으로 들어가는 노동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기 전부터, 아담은 새 창조, 즉 장차 올 세상으로 들어가 안식을 누릴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마도 생명나무는 이 땅에서 누릴 생명에 대한 상징이라기 보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누릴 생명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계 22:2).
일단,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부분은,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사역의 정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의 주제를 성경의 또 한 곳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시내산에 이르러 십계명과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네번째 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십계명 본문은 두 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거의 4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광야 초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이 출애굽기의 본문이라면, 신명기 본문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 첫 세대가 다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을 목전에 둔 2세대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두 본문의 차이는 사계명에 있습니다. 신 5:15을 보면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근거로 삼았는데(출 20:11), 신명기에서는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을 안식일 준수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성에게 구원 사건인 출애굽을 회상하게 하심으로써 이 구원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재창조 사건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에덴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시듯, 여기서는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난 40년동안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구원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책임지실 것과 그 주권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사 누리게 하시는 안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믿음 없이, 안식도, 안식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의 정점일 뿐 아니라, 또한 구원의 정점이기도 합니다.

2. 안식일과 주일(출 23:14~17; 레 23:15~17; 신 16:9~12; 레 25:8~12; 눅 4:16~19,21; 사 61:1~3)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입니다. 가끔 성경에서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없는데, 왜 기독교는 토요일인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인 주일을 지키는가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아시는 것은, 주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심으로써 구약의 안식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주일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 외에 특별한 안식일 규정들이 나옵니다. 무엇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하는데, 칠칠절과 희년입니다.
먼저 칠칠절을 보지요. 출애굽기 23장(14~17)과 레위기 23장(15~16) 그리고 신명기 16장(9~12)에 그 규정이 기록되어 있는 칠칠절은 맥추절, 초실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날이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절기의 의미가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이 날이 칠칠절로 불리는 것은, 유월절을 지내고 일곱 번의 안식일을 지낸 다음 날, 그러니까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7일의 안식일을 7번 보낸 다음날이라는 뜻이고, 같은 방식으로 유월절에서 50일이 지난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면 일곱번째 안식일을 지낸 다음 날이 또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입니다!
또 이날은 보리 추수가 완료되는 날이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부릅니다. 이날에는 제물로 누룩이 있는 유교병을 드렸는데, 이것은 매우 특이합니다(레 23: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누룩이 섞여 있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는 것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함께 드려지는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 숫양 두 마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맥추절의 이 특이한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떤 은혜로 하나님께 용납함을 입은 존재들인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 날을 초실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레위기 23:9~14의 해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바치라는 것을, 막 여물기 시작한 곡물의 첫 이삭을 첫 열매로 보고 바치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무교절과 겹치는 한 날이 되지만, 만일 완전히 익어 추수하게 된 첫 열매를 드린다는 관점에서 보면 맥추절이 그 첫 열매를 드림으로써 초실절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주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 영광의 부활로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고 그 날을 소망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초실절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또 오순절이라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강림이 오순절에 일어난 것을 압니다. 주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고 50일이 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마지막 영적 추수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여준 싸인입니다.
이렇게 종말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칠칠절은 유월절에서 일곱 번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입니다. 이날은 절기로서 안식일이 됩니다. 그리고 이날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일요일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왜 이런 특별한 안식일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이날의 의미를 부여하신 것일까요?
또 하나의 특별한 안식일은 희년입니다(레 25:8~12).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 외에 안식년이 있었습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에는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6년째에는 그해와 이듬해인 안식년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수확할 때까지 먹을 것을 수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일곱번의 안식년을 지내고 50년이 되는 해를 특별한 안식년으로 규정했는데, 그것이 희년입니다. 칠칠절과 같은 패턴입니다. 7일 혹은 7년이 7번 반복됨으로써 완전함을 성취한 다음 날, 다음 해가 칠칠절과 희년입니다. 희년에는 전국에 자유를 공포합니다. 이것은 모든 악과 불의를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 특별한 안식년의 안식년인 희년도 역시,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셨을 때, 구약의 어떤 말씀을 본문으로 사용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61:1~3입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19).”
이사야 61:1~3을 인용하신 것인데, 바로 희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4:21).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참되고 최종적인 희년을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희년에 종들이 일시적으로 풀려나는 것이 것이 아니라, 다시는 매일 수 없는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메시야 사역의 핵심을 바로 이 안식의 성취라고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자유와 해방, 치유와 온전케 됨의 안식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가져다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정한 희년이 된 것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고 안식 후 첫날(마 28:1; 막 16:1)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이 시간 선택은 정말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워 계시던 그 날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 이튿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의 선구자로서 장차 올 세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부활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첫째 아담에게 맡겨졌던 사명을 완수하셨고 장차 올 세상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상급으로 받으셨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3. 안식일-주일 지키기(마 6:19~31, 8, 32)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첫째 아담이 처해있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노동을 마친 다음에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이미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이 아닌, 첫날인 주일을 우리의 안식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의 의미가 바로 안식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덕분에 안식을 얻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순종하면서 일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안식이 이미 달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은혜 덕분에 안식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단순한 율법주의적 규정이 아니라, 구속의 나라와 관련이 된 일들에 우리의 관심을 최대로 집중시키는 영광스러우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육신을 새롭게 하는 영적 관습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을 잠시 접고 예배와 친교에 전념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하늘의 도성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을 미리 음미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다는 외부의 비난이나 내적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한시적인 문화적 노력을 잠시 멈추고 진정한 보화인 하늘에 속한 것들을 한껏 즐기는 이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기쁨의 날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마 6:19~31). 이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 그대로, 하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돌보시며 필요를 공급하시며 책임져주실 것을 알고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이 안식을 누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의 칭의, 구원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살아가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거룩한 백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일반 활동을 삼가는 한 날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이 안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주일은 저항이다(출 5:15~18; 마 11:28~30)
주일이라는 우리의 관습적 인식을 떠나, 성경이 말씀하는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생각해봅시다. 주일은 안식의 날입니다. 그리고 모든 날이 그렇지만, 특별히 이날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우리는 인정하고 함께 모입니다. 안식이 없는 타락한 인생들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로써 우리의 안식이 시작되었고 확보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믿는 우리는 진짜 안식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그 안식을 경축합니다. 기뻐합니다. 그리고 장차 올 세상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안식을 누릴 날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이날은 즐겁게 안식할 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지난 화요일, 서부발전 태안화력에서 석탄을 옮기는 컨베이어 벨트를 청소하던 24세 청년 김용균씨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그 젊은이가 생명을 걸고 일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그 벨트는 쉴 줄을 몰랐습니다. 2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19살 김군이 사망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철은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정비를 하는 사람은 그 사이에 목숨을 걸고 정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쉼없는 세상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슬프디 슬픈 단면입니다. 쉼이 없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의 통치를 대변하는 특징입니다. 출애굽기 5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출 5:15–18).”
하나님은 이 잔인한 바로의 통치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명하셨고, 안식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점에서, 그들이 바로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원받은 백성의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계명은 유난히도 중요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날을 안식일-주일로 지킵니다. 이것은 세상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대항문화적이고 이 세상에 대하여 저항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의 안식을 성취하고 완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쉼을 약속하십니다. 이 안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세상, 현재의 과중한 업무와 장래에 대한 그치지 않는 모든 불안과 염려로부터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안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께서 이미 성취하고 완성하신 안식으로, 장차 올 세상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을 이 땅에서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와 안식을 누림으로써, 안식 없는 인생들을 참 안식으로 부릅니다. 바로의 가혹하고 잔인한 통치에서 나오라고, 여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쉼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대끼고 힘겹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땅에서 구속의 나라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이고, 우리는 이렇게 안식일-주일을 함께 모여 예배하고 지킴으로써, 하늘의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