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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2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5) - 신자의 교회 생활 - 예배

히브리서 12:18-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09

말씀내용
신자의 교회 생활—예배 (히 12:18~29)

신자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소명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넓은 세계에서 문화적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살아갑니다. 신자는 속세를 떠나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위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도가 노아 언약으로 수립된 일반 나라와 아브라함 언약으로 수립된 구속의 나라에 기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일반 나라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인류 전체를 포용하며 자연 질서와 사회 질서를 보전하는 역할을 하지만 한시적입니다. 이에 반해, 구속의 나라는 신앙적이고 영적 영역을 다루고,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을 포용하며 구원에 따르는 모든 유익을 제공하는 나라로서 항구적이고 영원합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 이 두 나라를 구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 두 나라를 혼동하고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와 복음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의 사회 생활 혹은 문화 생활을 다루기 전에, 먼저 신자의 교회 생활이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영역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경험한 주관적이고 경험적 지식일 뿐입니까?

1. 신자의 삶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생활은 성경적입니까? 여러분은 셩경적 으로 교회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교회에 헌신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과는 좀 다릅니다. 교회 생활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 그리고 교회 생활이 여러분에게 가지는 의미를 묻는 것에 가깝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 교회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온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하나의 습관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을 생각해본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비유적으로 질문해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운전 중에 주유소에 들르는 심정으로 예배당에 오시는 것은 아닙니까? 연료가 떨어졌거나 떨어져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주유소를 찾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연료를 채웁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삶에 지치고 고단해서 더 이상 달려갈 힘을 잃곤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새로운 힘을 충전 받고 다시 힘차게 세상으로 나갑니다. 혹시 이것이 여러분이 예배당에 오시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것과 비슷한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전에 교회를 주막에 비유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주막(酒幕)은 단순히 술집과는 다릅니다. 인심 좋은 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친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입니다. 주모가 밥상도 차려주고 술도 따라주겠지만, 정말 이웃집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접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해줌으로써 지친 나그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가 주막 같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심정으로, 또는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예배당에 오십니까?
또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배구나 농구 경기 중에 작전 타임을 가지는 것처럼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지고 있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코치가 작전 타임을 요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돌아보는 것이지요.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달리 더 효과적이고 새로운 방법으로 살 수는 없는 건가?” 물으면서 말입니다.
이런 비유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이유와 동기들은 부분적으로는 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동기와 이유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교회가 의미하는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유를 하는 것이 운전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작전 타임을 가지는 것이 운동경기를 하는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에게 교회의 존재는 단지 주어진 인생을 더 잘 살기 위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는 주유소나 주막 혹은 작전타임과는 달리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그 자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찾는 이런 이유와 동기들 보다 우선되고, 타당한 성경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교회는 인생을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합니까, 아니면 교회는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과 상관이 있습니까? 만일 교회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과 상관된다면,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먼저 생각해보지요. 이 명제에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여기서 지적 동의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 인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상관되며,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혹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들을 때, 약간의 주저함이나 심하게는 거부감 같은 것이 느껴 지시지는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 명제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단순한 주저나 반감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교회라는 말은 성경적인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일주일에 단 하루, 주일에만 상관이 되는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런 반론에 대한 타당하고도 성경적인 근거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이런 대답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면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하라는 문화명령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말씀하신대로, 땅의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고, 땅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창 1:26,28).
그러나 소위 문화명령으로 알려진 이 명령은 아담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말씀들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는데, 여기에는 문화 명령도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다시 첫째 아담이 받았던 것과 같이 문화명령을 받게 되고, 이제 세상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문화로 구속하고 변혁시켜야 할 사명이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아담이 순종하지 못하여 죄를 범함으로써 잃어버리게 된 생명을 되찾아 주신 것만이 아니라,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 했던 아담이 반역하는 뱀으로부터 동산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던 문화명령까지도 우리를 대신하여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히 2:10).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의 영광에 ‘장차’ 들어갈 것이지만, 사실, 이미 들어간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종말론적인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땅을 정복해야 하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삶이 참으로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갑니다(고전 7:31).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되고 있을 뿐입니다(벧후 3:7). 이것이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세우신 일반 나라의 한시적인 성격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세우신 구속의 나라와 동일시되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장차 올 세상을 보여주고, 그 나라의 축복을 제공하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즉, 일반 나라에서 이루고 성취한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되겠지만, 구속의 나라에 속한 교회는 영속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구속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질지라도,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와 같이 장차 올 세상에서도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바벨론은 멸망하지만, 예루살렘은 영원합니다. 큰 성 바벨론은 세상 곧 일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가지는 애국심이나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 대한 애정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부차적인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보다 소중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큰 성 바벨론과 같이 멸망하지 않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광스럽게 역사의 마지막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든지 그것은 그 자체로 영원한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가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구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세상에서 여러분이 하는 일을 다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면서 주께 하듯 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상급은 영원한 나라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삶이 가지는 가치는 이런 점에서만 영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성실하게 감당했던 삶에 대해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이루고 성취한 것은 다 사라질지라도, 여러분이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과 인정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영속적 가치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영속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구속의 나라에 속한 일들이고 그것은 곧 교회의 삶과 직결됩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가, 교회의 삶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여러분이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 쏟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만이 영속적 가치를 지니기에, 교회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변형되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신부로 존재할 것이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기에 타당하고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타당하고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본문을 통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3. 교회생활의 중심은 예배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할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여러분이 예상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뜻밖의 대답입니까? 예배가 여러분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이유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오신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영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이 얼마나 놀랍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기쁘고 흥분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이런 느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본문을 충분히 잘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백성들이 누리던 것과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백성들이 누리는 영광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놀랍게 경험한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신 4:33).”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을 직접 들은 백성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사건을 가리켜 말합니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불, 침침함, 흑암, 폭풍, 나팔 소리 가득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는 말씀하시지 말고 제발 당신이 듣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전해달라고 말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기 20:18~20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그들에게는 온몸을 마비시킬 만큼의 공포와 두려움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침범될 수 없는 거룩함은, 이성 없는 짐승이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산의 경계를 넘어 들어간다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실 만큼, 엄중하다는 것을 말합니다(20). 심지어 모세도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21절입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런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22절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민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구약 백성들은 이토록 무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떨었고 두려워했는데, 지금 너희는 그 무서운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이른 곳은 시온산입니다. 여기서 시내산과 시온산의 대조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과 엄청난 즐거움의 차이입니다. 시온산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정복한 산입니다(삼하 5:6). 시온 산성은 이후 다윗성으로 불렸고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습니다(삼하 5:9). 구약성경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불렸고 하나님이 특별히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시온산에 ‘이르렀다’는 표현에는 종말론적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윗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복하신 시온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시온산의 정상에서 누릴 완전한 천상의 약속을 100% 누리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장차 올 세상에 들어갔지만,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직 아닙니다. 본문에서 시온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과 연결됩니다(22).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의 분위기입니다. 22절 하반절부터 보면,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22b~23)”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 사이에 ‘잔치 모임’ 또는 ‘축제 모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누리던 기쁨의 축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22절 끝 부분을,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천만 천사의 즐거운 모임’ 혹은 ‘천만 천사의 축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축제와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 곧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22절 이하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 떨게 만들었던 그런 분위가 조금도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란 무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23).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의 원한을 신원하여 주신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도 성도들의 감격과 환희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도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절정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말하는 24절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뿌려진 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에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을 보증하는 피이기에,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내산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우월한 자리이며 특권입니다.
시내산에서 땅을 진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하늘도 진동시키실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26). 27절에서는 만드신 창조 세계가 변동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변동된다는 말은 제거된다,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우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새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 나라가 아니라, 완성된 구속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문화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 힘으로 만든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장차 올 세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만 천사들의 축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하나님의 모든 구속 받은 백성들이 지구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모인 기쁨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내산 에서 백성들이 가졌던 두려움과 떨림과 어떤 공포도 느끼지 않고 말입니다.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우리가 하게 되고, 또 영원히 하게 될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요한계시록 7:9~12을 봅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히브리서 기자가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림입니다. 믿는 우리가 이미 이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떨었던 그 엄습하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롭습니다.
28절 하반절입니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기서 ‘은혜를 받자’라는 말은 사실, 개역개정역의 난외주에도 있듯이, ‘감사하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내산 앞에 섰던 구약 백성들이 느꼈던 공포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토마스 슈라이너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버무려진 감사다. 겸손한 감사, 거룩한 두려움이 혼합된 감사, 이 나라는 자신들에게 전혀 과분한 소중한 선물임을 절감하는 감사다. 이런 감사에 거만함이나 자부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오직 경외함으로 정제된 기쁨 뿐이다.” 이렇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깁니다.” ‘섬긴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예배가 경외함과 두려움이 혼합된 감사와 예배인 까닭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29).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뿌려진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이 섞인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러나 감사함과 기쁨으로 나아가 예배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리고 감사함과 기쁨으로 예배하듯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더 큰 영광 가운데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배 속에서, 예배를 통하여 더 큰 영광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점점 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천국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를 우리는 공예배라고 부릅니다. 공예배라는 말은 공식적인 예배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라는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는 물론 개인적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공예배는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는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이 땅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 우리는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고 그 자리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4. 영원한 것과 한시적인 것을 구별하는 삶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저는, 여러분이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말고, 오직 교회 일에만 전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을 잘 사는 길은, 여러분이 구속의 나라의 시민과 일반 나라의 시민으로서 즉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잘 사는 길은,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교회에 속하는 그 모든 이유와 동기를 능가하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직, 기관, 단체는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피보다 진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이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 임이라(눅 20:35~36).”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예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가 뿌리신 피로 말미암아 이 엄청난 영광의 특권과 영원한 즐거움에 이미 이르게 된 자들입니다.
열쇠는 영원한 것과 한시적인 것을 구별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속으로 들어갈 때 여러분은 비로소 이런 분별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부차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만,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을 주목하고 경건함과 두려움, 감사와 기쁨으로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광에 빠질 때에만, 우리는 영원한 것과 한시적인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어떤 필요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앞에 올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앞에 오게 하지 마십시오. 이 예배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될 때, 여러분은 두 나라 시민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복된 은혜를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