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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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1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4) - 거류민과 나그네

베드로전서 2: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02

말씀내용
거류민과 나그네 (벧전 2:9~11)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 삶에 긴장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삶에서의 긴장이고, 종종 혼동을 낳게 되거나 균형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극단적인 태도로 치닫게도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긴장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정체성, 신분에 대해서 먼저 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절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 성경을 인용한 말씀으로, 출애굽기 19:5~6절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에서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붙고, 그 조건에 따라 “너희가…되리라”는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이미 너희는 이런 존재라고 말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는 “너희는…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실패를 완전한 순종으로써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10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차용하여 좀 더 부연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래, 우리가 이런 영예로운 신분을 얻을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처럼 영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다’는 것입니다. 거류민은 시민권이 없이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그네는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갑이 아니라 을이라는 말입니다. 이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예로운 신분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겠지만, 이 땅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권면을 합니다.

2. 가나안 정복 모델 vs. 바벨론 유수 모델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존재했던 양식을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정복 모델이고, 또 하나는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가나안 정복 모델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불러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여 내쫓고 그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모세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법령을 율법에 담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함으로써, 가나안 족속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구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나라는 그들 자신이 왕이 되어, ‘여기는 우리가 주인된 나라’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430년의 시절과 그 이전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가나안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던 시절(히 11:13)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거류민과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자로서, 을이 아니라 갑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4대왕 르호보암이 즉위하면서 남북이 분열되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를 열게 됩니다(주전 930년). 그리고 200년쯤 지나,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주전 722년), 130년을 더 버틴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주전 586년). 북왕국의 열 지파는 앗수르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남왕 유다 지파는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귀환할 때까지 70년의 바벨론 유수라는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예루살렘의 붕괴와 성전 파괴를 목격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망국 백성의 삶은 얼마나 비극적이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바, 바벨론 유수 모델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은 다른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예레미야 29:4~7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유다 백성은 그들이 붙잡혀간 땅에서 70년만 지내면 되니까, 한탄하고 절망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버티라는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땅에서 계속 살 것인양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고 살며 텃밭도 가꾸고 열매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또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시집 장가보내면서 자식을 낳아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건축, 직업, 결혼, 출산, 양육을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다 하는 일들이 아닙니까? 너희는 비록 포로로 잡혀온 거류민과 나그네지만, 본토인들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성읍)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 성읍이 평안해야 유다 백성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명령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원수가 아닙니까? 유다 백성은 자기 조국을 파괴하고 정복한 바벨론을 저주하고 그들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포로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 성읍의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이방 땅에 사로잡혀와 있는 너희 유다 백성의 존재가 그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내쫓고 그 땅을 정복하여 주인 노릇을 하며 살던 시대와는 다른 삶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바벨론 유수 모델은 단지 70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직 그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또 요셉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보낸 430년도 바벨론 유수 모델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각각의 시대를 일일이 살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객으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어떻게 아브라함 언약대로,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는 소명을 이루고 살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오늘은 다만 신약 성도들이 살아가는 양식이 가나안 정복 모델이 아니라 바벨론 유수 모델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3. 신약 성도들의 삶의 양식
오늘 본문은 이 문제에 빛을 던져 줍니다. 9절에서 말씀한대로,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7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9절과 14절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언약을 누리는 아브라함의 상속자들로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갈 6:16). 이렇게, 교회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구속의 나라가 온전하게 드러나고 펼쳐지는 유일한 실체가 되었습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최종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 구속의 나라는 교회에서 그 최종 단계이 직전까지 이를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성취는 재림하신 주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때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간 가나안 정복 모델의 실재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우리는, 민족과 지리적 경계를 넘어 이루어진 보편적 영적 공동체를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차 올 세상을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 참여하며 영원의 문턱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더 영광스러운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여전히 노아 언약을 통해 세워진 일반 나라가 존속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땅이 있을 동안”(창 8:22)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이런 일반 나라 속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의 은혜와 영광을 이미 맛보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의 삶의 양식은 가나안 정복 모델이 아니라 가나안 유수 모델인 것입니다.

4. 거류민과 나그네
사도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표현했습니다. 질문을 드리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온 세상의 왕으로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셨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데, 성도들은 왜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또 에베소서 1:21~22도 보지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많은 세력들이 주님의 왕권에 도전하고 반역하는 일이 허용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지금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고 계시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구속의 나라를 세워 다스리시면서,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노아 언약을 통해 이 세상의 제도와 일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 나라들을 종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은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 8:22).
주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의 왕으로 다스리시지만, 그리스도인은 장차 올 세상이 완성될 때까지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브라함과 족장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처럼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이 땅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될 때, 노아 언약은 종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며, 우리는 바라던 본향,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가정과 국가에도 속한 그리스도인
그렇다면,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역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은 가정과 국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 영역입니다.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이 보전하겠다고 하신 사회 질서는 최소한 두 가지 영역을 상정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가정을 상정한 말씀입니다(창 9:1,7). 둘째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국가의 정치 제도와 사법 제도를 상정한 말씀입니다(창 9:5~6). 이렇게 가정과 국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의 영역이고 소위 일반 나라의 두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가정과 국가는 이 땅에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초대교회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혼이나 부부 관계가 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했던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하기를,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닌 잘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7:2,36~38). 디모데전서 5:14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외에도, 신약의 서신서들은 가정 안에서의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상당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관련하여 특별한 책임을 지닙니다. 미혼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고후 6:14), 그리스도인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엡 6:4), 믿는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 6:1~3).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경험하는 부부관계의 은혜를 누리고 그 거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엡 5:22~33). 성경은 가정이 신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지는 제도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고 신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와 책임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나라인 국가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신약성경은 일반 나라 세속 정부의 위정자가 가진 권위를 인정합니다(롬 13:1~7; 딤전 2:1~2; 딛 3:1).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3~14절도 말씀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일반 나라의 위정자에게 그 나라를 구속의 나라인 천국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위정자에게 요구할 것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정의를 시행하는 것뿐입니다. 디모데전서 2:2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로마서 13:3~4도 보지요.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이것은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일반 나라의 기본 기능입니다(창 9:5~6). 일반 나라를 구속의 나라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구속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는 영원하지만, 일반 나라의 특징인 가정과 국가는 한시적입니다. 그리고 가정과 국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 영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직업의 영역, 팔고 사는 모든 매매와 상업적 행위 등의 공통 영역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살 특권을 받지 않습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서신서의 몇 구절을 찾아서 확인해 보지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전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거나 구속의 나라로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살고 거래하고 사업하며 살아가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나라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만 신실함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고, 가정과 국가 같은 일반 나라에서도 동일한 신실함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가령, 좋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고, 좋은 사주이며 좋은 직원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는 오랜 실패를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 신앙이 교회의 영역에서만 작동함으로써, 신앙은 병들거나 미숙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품과 무관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불균형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성숙]이라는 설교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모범 시민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6. 일반 나라 시민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점
그리스도인이 일반 나라에 속해 살아가면서 가지고 누리는 문화활동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회로 가지는 것은 바르지만, 이것은 모든 문화활동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모든 영역에서 살아갈 때 특별히 주의할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나안 정복의 자세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쟈세로 행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모든 문화 영역에서 정복이 아닌, 이런 섬김과 사랑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다양한 지도력과 지휘권을 행사하는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치에서든지 정복자인 갑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섬김과 사랑의 자세로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가정과 국가 그리고 모든 직업 활동과 기타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문화적 공통의 영역을 가진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과 대립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보이면서도, 타락한 세상에서 죄가 얼마나 무섭게 모든 문화를 부패시키고 있는지도 항상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롬 12:2).
셋째로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문화와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롬 8:18).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없는 듯 있는 듯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에 온 마음을, 인생 전체를 붙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입니다. 우리도 지나가는 인생이지만, 이 세상도 우리를 대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류민과 나그네 답게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장차 올 세상, 진정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매일, 그리고 아침과 밤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속상하고 분요해질 때, 이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하여 마음과 삶을 다 빼앗기고 살지 않아도 되는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