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52 -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 (1) - 시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시편 105:16~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7-15

말씀내용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말이라고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 15권의 첫 권의 제목으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인간이 한 문명세계를 건설하고 제국을 세우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신의 전능하심을 시간 속에 제한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시간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빚어가시는데,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그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 개념은 시간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는데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는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중요한가, 하나님은 어떻게 시간을 통해서 일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시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박영선 목사님과의 대담을 엮은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신앙에 관하여 많은 것, 특별히 시간의 요소를 생각하게 하는 인상적인 책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면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신앙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
저는 만 28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후 28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스물 여덟 해는 제 신앙에 무의미한 시간일 수 없습니다. 목사로 안수를 받던 당시에 비하면 지금 저는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폭에서 조금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도 좀 더 성숙해진 듯 합니다. 설교도 변했습니다. 정확한 해석과 많은 정보들을 따발총처럼 제시했던 젊은 날에 비하면 말은 조금 느려졌지만 그때보다는 좀 더 따뜻하고 깊고 풍성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좀 더 여유로와졌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숙해진 신앙의 관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급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변하지 않나?”하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일하심이 지금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하시겠지” 생각합니다.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좀 더 닮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차이들입니다.
물론 시간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마술적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서 내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내가 그것을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고 있는가?” 또는 “내 장래에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 이루어주실 일을 기대하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어떤 대답을 가지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차이를 자신 안에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또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인식을 잘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정직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에배당에 나온 날, 처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믿었던 첫 날과 지금을 비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시간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2. 요셉의 크로노스(Chronos)와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요셉의 삶에 대한 매우 압축된 설명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의 삶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요셉과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고대 근동에 주신 기근으로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일을 말합니다. 17절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기근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는데 그가 요셉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8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것도 부족해서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힌 일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셉은 이 감옥에서 바로 왕의 신하 두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들은 바로에게 범죄한 일로 죄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사람은 각각 꿈을 꾸었고, 이 꿈 때문에 근심하던 중,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복권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그날에 사형 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 꿈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던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설명하고, 복권이 되면 바로에게 말해 자신을 건져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창세기 40:23은 이렇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얄궂은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게 됩니다. 아무도 바로의 꿈을 해석할 자가 없자, 비로소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옛날 일을 기억하여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합니다. 드디어 요셉은 감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향후 7년 동안 큰 풍년이 온 뒤에 7년 기근이 올 것을 말하게 됩니다.요셉의 해몽과 지혜에 감동한 바로는 당장 요셉을 높여 애굽의 전권 총리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본문 20~22절의 내용입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그리고 요절은 19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요셉의 인생에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에 대한 해석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작정과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에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몇년 몇월 몇일이라고 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계시간으로 측정되지 않는 소위 배꼽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점심을 12시에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점심은 배고플 때 먹을거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는 요셉이 30살이 될 때라고 표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요셉의 신앙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되기를 마쳤을 때, 즉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를 감옥에서 풀어 바로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요셉의 크로노스와는 언제나 맞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되면 자기도 곧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마 한 달 안에 풀려나겠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크로노스였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나서야 찾아왔습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요셉은 17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30살이 되어서야 노예와 죄수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13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 13년 동안에 요셉에게는 수많은 기대를 품었던 크로노스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총애를 입었을 때, 그런 기대를 품어봄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이젠 됐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해 주시는 시간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는 이제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이 모든 일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 속에서 당신의 말씀과 작정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도 적용됩니다.

3. 하나님의 카이로스 안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
하나님의 카이로스와 우리의 크로노스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질문이 야기됩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던지는 진지한 많은 질문들은 때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형들로부터 팔려 애굽에 온 요셉이 수없이 던졌을 질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때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질문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되어야 풀리게 될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요셉은 하필이면 아버지 야곱이 사랑했던 부인 라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편애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가는 일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요셉을 처치하려고 모의하던 바로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을까? 어떻게 미디안 상인들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던 것일까? 또 요셉은 애굽의 평범한 가정의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었는데, 하필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가 된 것일까? 요셉은 왜 일을 그렇게 잘 해서 그 집의 총무가 되기에 이르고, 보디발의 아내가 매력을 느낄만한 존재가 된 것일까? 요셉은 왜 억울하게도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가게 된 것일까? 보디발은 왜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 그것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가둔 것일까? 바로의 두 신하는 왜 그 때 바로에게 범죄하고 감옥에 들어와 요셉을 알게 된 것일까? 그 두 신하는 어쩌다가 같은 밤에 각각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술 맡은 관원장은 왜 요셉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그것도 2년 동안이나. 그리고 바로는 왜 그 시기에 흉한 꿈을 꾼 것일까? 어떻게 애굽에는 그 꿈을 해석할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하필 왜 그 때는 요셉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합당한 나이인 30세가 되었을 때였단 말인가?
이 모든 질문에 그냥 ‘우연’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면 비로소 모두 정확하게 해결됩니다. 이제 거꾸로 추적해서 이 질문들을 생각해 보지요.
하나님은 요셉이 30세에 바로 앞에 서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 날에 그가 총리가 되게 하시려고,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2년 동안이나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바로가 아무도 해몽할 수 없는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전에 요셉이 바로의 신하를 만나게 하시려고 미리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으셨습니다. 죄를 저지를 인물이 아닌 요셉을 감옥에 보내시려고, 보디발의 아내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하여 감옥에 갈 정황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게 하시려고, 요셉을 평민이 아닌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총리로 7년 흉년을 해결하게 하시려고 요셉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시간에 미디안 상인들을 그곳에 보내셨습니다. 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아들로 나게 하셨고 야곱으로 하여금 그를 편애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또 요셉이 어려서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을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미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하나 하나 진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팔려가던 열 일곱 살 때부터 총리가 되는 서른 살까지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형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던 그 아이를 하나님은 철저하게 단련하셨고 낮추셨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장치였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창세기의 마지막 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기까지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의미없는 시간의 연속이고 낭비처럼 느껴지는 세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면,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고 우연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들이 보낸 시간들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서 일해오셨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처럼 느껴지고, 낭비된 시간 같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입체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 모두 안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요셉 한 사람의 이야기 보다 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비록 요셉의 인생에 국한하여 생각하고 있지만 이 큰 그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이루어가시는 큰 그림과 목적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 안에서 많은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지는 경험을 하지만,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퍼즐 조각이 되어 더 큰 그림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엄한 서사시에 비유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야를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이 겪는 사건과 상황들을 더 잘 소화하고 견딜 수 있게 됩니다.

4.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
우리는 보통 성도의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일관된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적 간섭하심이라는 한 차원 높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우리가 본대로 입니다. 요셉의 생애, 특별히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뒤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가 총리가 되기 위해서, 또는 그가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를 이끄시고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모든 사건들이 때에 맞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셨고 주도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다만, 요셉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믿음에 걸맞게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이었고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만큼입니다. 요셉이 어려서부터 꿈을 크게 가졌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물론 요셉의 성실함을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주께 하듯 행동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면서 죄를 거부했듯이 우리도 그런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승진을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죄와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도하고 계시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지, 여러분이 잊혀진 존재가 되든지, 여러분이 망했다고 느낄만큼 심한 실패를 경험하든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각을 놓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로 인한 자괴감을 겪지 않을 길이 없고,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인생 안에서 이루시는 성화는 신자 개인의 노력이라는 차원보다 한 차원 높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한 연합이라는 구속의 경륜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 자신의 노력, 자신의 의지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찬양 시간에 들은 노래 가사가 대강 이러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나의 사랑..” 그들은 분명히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나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노래였습니다. 성경이 정말 이렇게 말씀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베드로에게서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있고, 우리의 믿음의 인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고백도 좋고, 결심도 좋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그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 때, 시간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신다.
때때로 우리는 실패합니다. 아니, 자주 실패합니다. 그리고 우리 의지, 믿음의 인내가 바닥이 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조금은 가볍게 여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 지나치게 좌절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자리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실패와 그 실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린 것처럼 생각하거나 느끼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 모든 실수와 실패,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성숙의 자리로 데려가고 계시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도록 우리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이루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신 70년 혹은 80년, 90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오늘 우리의 부족한 이 모습을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시간을 통해 빚어가시고 온전하게 만들어가시며 거룩함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 복된 은혜를 달라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겸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물리치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