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54 -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 (3) -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시편 90: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8-26

말씀내용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시 90:12)

여러분은 혹시 인생의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낭비된 시간’ 혹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느껴지는 날들이 있으신지요?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10살 짜리로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 아이가 나이 50이 되어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 아버지 손을 붙잡고 애굽에서 나와서 이제 50이 되었으니, 인생의 거의 전부를 광야에서 보낸 것입니다.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을 돌아보면서, 그들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 40년 동안, 물이 없어 힘들었던 경험, 전쟁을 치렀던 경험 뿐 아니라,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부모 세대의 죽음이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 14:11)”는 부모들의 원망을 그들은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잃어버린 40년이었을까요? 만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그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목적이 무엇이냐? 이것이 시간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1. 기도하는 모세의 마음(민 20:1,12,22~29; 시 39:4~5)
시편 90편의 표제어는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편이 다윗의 저작으로 돌려지지만, 이 시편은 모세의 저작으로 돌려지는 유일한 시편입니다. 모세의 삶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 적지 않은 분량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친숙한 사람들은 모세의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기도를 했을까요?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1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모세가 이 시편을 썼다면, 아마 민수기 20장의 상황에서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20장은 출애굽한지 40년째가 되던 해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죽음입니다(민 20:1).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성 리더로서 선지자이기도 했습니다(출 15:20). 모세가 아기 때 갈대상자에 놓여 나일강에 떠내려갔을 때, 그것을 지켜보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유모로 어머니를 소개해주었던 특별한 누이였습니다. 그녀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민수기 20장에 기록된 두번째 사건은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지만, 모세가 반석을 지팡이로 두번 치고 백성에게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바라보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39년을 잘 해오다가, 40년째에 들어와서 범한 이 작은 일로 하나님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막으셨습니다. 이때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짐작이 되십니까? 어쩌면 모세의 삶은 이것을 위해서 준비되었고 이것을 위해서 달려온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이런 불미스러운 실수로 인해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120세에 말입니다. 그의 형, 아론과 함께 말이지요.
모세는 이 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23 이하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 3:24~25).”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세를 대면하여 만나주셨던 하나님께서(출 33:11) 그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20장에 세번째 중요한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의 죽음입니다(민 20:22~29).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겁을 준 것이 아니라 진짜였습니다. 이제 모세만 남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애굽 1세들이 다 죽었습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의 상상이 맞다면,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시편 90편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 90편 전체를 주의깊게 읽어본다면, 우리는 그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120세가 된 모세가 먼저 보낸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을 생각하면서 했음직한 고백이 아닙니까?
이어지는 7~11절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그렇게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향하여 불평을 쏟아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간 수많은 출애굽 1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모세가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2절은 바로 여기에 이어지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보장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남은 시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습니까? 무엇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시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 지혜가 아닙니다. 모세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를 구하는데, 그것은 ‘우리 날 계수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알게 해달라는 모세의 간구는 남은 수명을 알려달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이것은 시편 39편에 있는 다윗의 기도와 같은 간구가 아닐까요? 시편 39:4~5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는 겁니다. 나의 날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 일생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 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그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우리 날 계수함’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은, 이런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지혜로운 마음이 아닙니까? 한때 잘 나가는 것이 마치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행하는 어리석음이 어디 있습니까?

2. 모세의 처음 40년 (히 11:24~26; 행 7:22~25)?올바른 믿음이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압 땅에서 120세의 나이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신 34:7). 모세의 인생은 3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길러졌던 처음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목자로 보낸 40년,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마지막 40년입니다. 처음 40년은 애굽 바로의 왕궁에서 성장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갈대상자에 뉘어져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놓여졌다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바로의 딸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첫 눈에 알아봤지만, 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어린 동생이 담긴 갈대상자를 멀리서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른 달려가 바로의 딸에게 히브리 유모를 구해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바로의 딸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머니 요게벳의 손에서 길러 가십니다. 비록 모세가 왕궁에서 자랐지만, 그의 정신, 그의 신앙, 그의 영혼은 경건한 레위 지파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요게벳을 통해서 자라났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출 2:11) 자기의 동족 형제들이 노동하는 현장으로 나갔다가 동족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보고 그를 때려 죽이게 된 사건은 사실, 모세에게 자기 민족을 향한 애정,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모세의 믿음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평가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을 보지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것은 모세의 생애에 그 이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세가 소위 사고를 쳤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장성하여, 거사를 시작하였지만 이것은 사고로 끝나고 맙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가 40이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23입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히브리서의 증거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어머니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동족을 돌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칭함을 받는 것보다, 동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애굽 왕궁의 왕자로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임을 알았고,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귀히 여겼고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믿음으로 행한 일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뭐죠? 뭐, 이런게 있습니까? 올바른 믿음으로 행하면 잘 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성공해야 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7:25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이미 불혹이라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미숙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애굽의 왕궁에서 배운 학문과 무예와 리더십이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충분히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또 묵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나를 이 왕궁에서 학문과 무예를 배워 왕자의 수업을 받게 하심으로써, 내 백성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에서 언급한대로,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했습니다(행 7:22).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열정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순수했고 바른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젊은이의 미숙함을 안고 있었고, 이것은 다분히 자기의 열정과 힘을 믿는 태도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실 그 일을 감당하려면, 더 성숙해져야 했고 자기가 가진 열정과 힘을 믿는 태도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 모세를 리더로 기르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배우며 보낸 40년의 시간은 낭비되었거나 잃어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후일, 광야에서 한 민족, 한 나라의 지도자로 그들을 인도할 때, 그가 받은 왕자로서의 교육은 낭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3. 모세의 두번째 40년(출 3:11; 4:10,13)
이제 우리는 모세의 두번째 40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모세의 생애에서 정말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이 바로에게 알려지고,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하자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출 2:15). 하루 아침에, 애굽의 왕자가 미디안 광야를 떠도는 거지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거사를 감행했던 결과는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미디안 광야 생활은 모세의 생애에서 무려 40년을 차지했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피할 때, 모세는 잠시 몸을 숨겼다가 다시 거사를 해볼 작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재기의 소망도 점점 희미해져갔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미디안 광야의 평범한 목자로서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습니다(출 7:7). 80세가 된 모세에게 자기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있었을 리 없습니다. 이쯤 되면, 젊은 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시편 90:10에서 모세가 하는 말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의 나이가 80이 되었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멀리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십니다. 그때 모세가 보인 반응에서 여러분을 무엇을 보십니까? 모세는 힘이 다 빠진,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노인이 되어습니다. 아마 그의 나이 40쯤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면, 그는 얼마든지 “아, 하나님께서 드디어 나를 알아보셨구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출애굽기 3:11을 보지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또 4:10,13을 보겠습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자기가 적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태도가 아닙니다. 모세는 정말 자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40년 전, 모세가 거사를 감행했던 40세 때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40세의 모세에게 찾아가셔서 말씀하고 가르치셨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야, 자기 열정과 자기 힘으로는 나를 섬길 수 없단다. 너는 힘을 다 빼야만 나를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주시고 다신 그렇게 하지 말고, 답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늘 말씀하십니다. 답을 모르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서 배운 지식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만이 당신의 목적이었다면, 늙은 모세보다는 젊은 모세가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목적은 단지 그런 표면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시는 일을 오해할 수 밖에 없고,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모두가 다 뒤틀리고 맙니다. 가령, 세계복음화의 사명에 삶을 건다고 해봅시다. 이것 뿐입니까? 이게 다입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세계복음화의 과업을 수행하는 도구로 내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그렇게 일차원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 그 성품이 우리 인격을 통하여 반영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이것을 희생하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 나라의 일꾼, 머슴으로 쓰임 받고 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셨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무너져가는 동안에, 당신의 일을 모세 안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두번째 40년은 결코 잃어버려졌거나 낭비된 40년이 아니었습니다.

4. 그 시간들은 결코 낭비되지 않았다! (민 20:10,12; 눅 12:47~48; 신 33:29)
이런 과정--처음 40년과 두번째 40년의--이 없었다면, 우리는 출애굽 이후 불신앙으로 반역하는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 모세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고,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세를 우리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봅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래 참고 기다리던 모세가 광야 생활 40년 차에 큰 실수를 하고 맙니다. 우리가 앞에서 잠깐 보았듯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을 향해 그는 그답지 않게 행동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 이렇게 말하면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려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향해,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민 20:12)”라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신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불신하고 대적하는 백성을 향해 무한히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했고, 그 선하심을 반영하는데서도 실패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큰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렇게 넘어진 모세였지만, 그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말입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관점이 변한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얼마 전,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사건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였습니다(민 20:10). 그런데 이제 모세는 뭐라고 말합니까?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시간은 헛되지 않았고, 모세는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백성을 보는 관점이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시간을 통해 일하시고 일하실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학책을 읽어서 배운 것이라기보다, 시간을 통해서 모세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무려 120년이라는 세월을 통해서 말입니다!

5. 목적이 시간의 의미를 결정한다.
말씀을 맺기 전에, 우리가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교훈 하나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그것은 목적이 시간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모세의 인생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인생을 시간을 통해서 다루신 것과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문제는 돌아보면, 잃어버린 세월, 낭비된 시간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에게 있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면, 그는 실패했다고 느꼈을 것이고, 자기 인생의 시간들은 의미없이 낭비된 시간이고 잃어버려진 시간이라고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120년의 시간 속에서 말입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배운 학문과 무예와 리더십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쓰일 때를 기다려야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목자로 보냈던 40년의 세월 역시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모세의 힘을 빼는데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그 알량한 자존심, 자기 신뢰, 열정과 힘이 빠지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 없는 기다림과 낙심을 거듭하면서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우리는 “내가 이만한 사람인데 이런 대접은 받아야지”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순간 순간 우리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이제 그런 생각 같은 것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꿈틀 거리고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아,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따라가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더 알아갑니다. 내가 얼마나 자기 부인을 못하는 질긴 존재인지, 자기 부인이 그렇게 쉽게 결단으로 되는게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시간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래가지고서야 내가 언제 주님을 제대로 섬겨보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만이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목적이라면, 여러분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끈질긴 우리 인생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자기의라는 죄를 거듭 보게 하시고 그것을 마침내 은혜의 자리에 내려놓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지치지 않으시고 거듭 거듭 수도 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베푸시고 또 베푸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렘 32:39~41).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동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안식을 누릴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자괴감, 자기비하, 자포자기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아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여러분이 그런 깊은 낙심 가운데 있음 조차,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과연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실력, 나의 상황, 나의 성취에 소망을 걸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소망을 두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것은 오직 시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참되게 하시고, 온전하고 견고하게 만들어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