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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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3 -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 (2) - 늦게 되는 사람

창세기 48:12-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8-05

말씀내용
늦게 되는 사람 (창 48:12~20)

1. 믿는건지 안 믿는건지.. 이런 사람도 있다(시 103:10).
야곱이라는 사람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특별한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이삭의 아들이며 약속을 받은 자이고 족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서 성화는 지지부진해 보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우리 모습을 야곱의 삶 속에 투영해 보면서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그는 믿기는 하는 것 같은데 믿음의 증거가 별로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기질 또한 약아서 속일지 언정 속으려 하지 않지만,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교활한 외삼촌 라반을 만나 고생을 합니다. 그는 믿음 보다는 잔머리를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부인들 틈에서 갈등합니다. 그리고 많은 자식 중에서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아들 요셉을 유별나게 편애합니다(창 37:3). 이것은 미숙한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런 미숙한 아버지와 서로 갈등하는 부인들 아래서 자란 자식들이 잘 자라고 서로 화목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했고, 차자와 삼남인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족속에 대한 대학살극을 저질렀으며, 나머지 아들들도 노략질에 가담했었습니다. 인간 야곱이 이런 자식들을 볼 때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야곱의 집의 많은 자녀들은 화살통에 가득한 화살이라고 할 수는 없엇을 것입니다(시 127:4~5). 세상 말로, 그의 가정은 콩가루인 셈입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이 지나간 흔적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손은 보이는데, 그가 그 손을 잡아 인생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이익과 손해가 걸려 있거나 절박할 때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노년의 야곱을 보아도 도무지 경건한 어른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애굽에 억류된 시므온도 구해야 했고, 곡식도 필요로 했던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창 42:36,38).” 얼마나 미숙한 어린 아이같은 모습입니까?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품은 정말 미숙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믿음보다 성품이 중요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은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겠습니까? 청년들은 그런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시고 죄악을 따라 갚으셨다면 야곱은 진작에 지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시 103:10).”
사실, 야곱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 자신의 합당함,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약속,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임자입니다. 별로 본받을만한 구석이 없고, 그와 그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교훈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완벽한 조련
이런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께서는 “너 같은 야생마는 도무지 준마로 조련할 수가 없구나. 네 갈 길로 가거라”고 말씀하실 사람이 있을까요? 선생님이 포기한 학생처럼, 하나님이 포기한 인생도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불러서 기르시다가 포기하는 인생이 있을까요? 하다 하다 안 되서 포기하는 인생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 이런 느낌이 있으시다면, 잘 들으십시오.

A. 인생의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징계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징계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훈육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고난의 형식으로 찾아오지만, 그것은 변장한 축복입니다. 길어야 몇 달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떠났던 야곱의 여정은 20년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속이는 외삼촌 아래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속이는 자 야곱은 20년 동안 내내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또 속았습니다. 후일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올 때, 세겜에서 그의 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한데 대한 징계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삶의 이유와 의미라고 여겨지던 중요한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죽음 그리고 화해한 뒤 바른 관계를 회복했던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라헬을 잃은 야곱은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집착하지만, 결국 요셉마저 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던 모든 사람들을 하나씩 그에게서 앗아가십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진도가 나갈 때마다 그때 그때 잘 배우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다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아! 그거구였나!”하는 학생에 더 가깝습니다. 늦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B. 움켜쥐는 인생에서 손을 펴는 인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늦게라도 배웁니다. 야곱이 배웠다고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들들이 애굽으로 갈 때,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한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야곱이 결국 이렇게 아들들에게 대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 43:14).” 지금 야곱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까? 에스더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어떤 사람은 에스더처럼 젊어서 이런 고백을 하기도 하지만, 야곱같은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이런 고백을 비로소 합니다. 드디어 야곱은 하나님의 손에 자기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맡기는 법을 배웁니다.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모리아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을 때와 비슷한 경험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거의 처음으로 야곱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겼구나 하는 희미한 증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이 베냐민을 돌려받았을 뿐 아니라,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까지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받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움켜쥐기만 하면서 살아왔던 야곱이 움켜진 손을 하나님을 향해서 펼쳤을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고 맛보기 시작합니다. 노년, 그 인생의 끝에 말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움켜쥘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손을 펴서 그 움켜 쥐었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본래 자기 것 인줄만 알았던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움켜쥐는 인생은 괴로움이 더할 뿐입니다.

C. 험악한 130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창 47:6~10).
야곱은 요셉의 생존과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알게 되고, 요셉의 초청을 받아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그는 총리 아버지의 자격으로 바로 앞에 서게 되는데, 이 대목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47장 7절과 10절을 먼저 보지요.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7,10).”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형 에서가 무서워서 형에게 선물들을 미리 보내고도 두려워 7번이나 몸을 굽히는 7배를 하면서 나아갔던 야곱입니다(창 33:3). 쌍동이 형 앞에서 그렇게 몸을 굽혔던 야곱이 지금 애굽의 통치자 바로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바로를 축복하면서 그에게 나아가고 축복하고 그를 떠나지 않습니까? 야곱은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바로의 은혜에 기대어 살려고 애굽으로 이주한 가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은혜를 입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총리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창 47:8)”고 묻자,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은 그의 말대로 정말 험악한 130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야곱의 모습은 그가 보낸 험악한 13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제 압니다. 인생이 나그네 여정이며, 나그네의 삶은 움켜 쥠으로써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베풀고 축복한 것들이 남는 것이라는 사실을 1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야곱은 늦게 배우고 늦게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 늦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인생에 낭비되는 시간도 없습니다.

D. 하나님의 은혜(헤세드)의 승리(히 11:21)
하지만, 위에서 야곱이 보여주는 태도와 고백은 그의 생애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야곱의 믿음을 묘사할 때 야곱 인생의 어떤 부분을 언급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정말 의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1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것이 어떤 사건을 가리킵니까? 야곱이 자기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창세기 49장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라는 말은 창세기 48장 12~20절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왜 히브리서 기자는 많은 야곱의 이야기 중 이것을 야곱의 믿음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야곱은 자기가 사랑했던 아들 요셉에게서 태어나 애굽에서 자란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합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라고 야곱이 말합니다(창 48:15~16a).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하는 최고의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그의 위대한 할아버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거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실로 야곱은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였고, 평생에 하나님은 자기를 떠난 적이 없으셨으며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은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여기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나 메신저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천사 보다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야곱의 인생 최대 위기의 순간에 사람의 모양 혹은 천사처럼 오셔서 그에게 씨름을 걸어오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가 인생에서 겪은 모든 환난에서 자기를 건져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한 번도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지 않으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섬기던 그 하나님이 자기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지금 임종의 침상에 이르기까지 길러 주셨고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인생의 모든 환난에서 자기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표현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양들을 치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기르신’이라는 단어는 ‘목양하다, 방목하다, 먹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끝까지 참아 주심으로써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 시간, 이 자리까지 먹이시고 목양해 주신 선한 목자셨습니다.
늙은 야곱은 이때 병이 들어 침상에 앉을 기력조차 없었고(창 48:1~2) 눈은 나이 때문에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창 48:10). 요셉은 이런 야곱에게 자기 두 아들을 축복해달라고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야곱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내밀어 두 손자의 머리에 안수하여 축복하면 될텐데, 놀랍게도 자기 두 손을 교차하게 하여 오른 손으로는 자기 왼편에 앉은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 손은 자기 오른 편에 앉은 요셉의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안수를 한 것입니다(창 48:13~14). 당황하여 말리는 요셉에게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라고 말합니다.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형의 축복을 가로채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자기 뜻과 주장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야곱이 이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드디어 자기 뜻이나 육신의 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행하기를 배운 것입니다. 노년 거의 임종의 시간이 가까왔을 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 인생 여정의 절정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그 언약의 사랑, 그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이 끈질기게 고집스러운 야곱의 인생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야곱을 이 자리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자,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얻는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A. 하나님의 헤세드가 드러나는 삶
무엇보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관점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자신의 훌륭함과 경건, 또는 사역과 열매에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이룬 열매와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얼마나 신실하고 선하신 분이셨는지, 그분의 은혜, 그분의 헤세드는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소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것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이 사람이 잘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요소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의 한심한 삶 속에서, 그 삶을 통하여 당신의 헤세드를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언약의 사랑이고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참하게 실패하는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사람 같으면 이렇게 기다려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인생,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기는 한건가 싶은 의문이 드는 인생, 사람은 그를 참아줄 수 없지만, 길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붙들어 주시고 결국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고, 그를 영화로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야곱처럼 늦게 되는 사람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 인가가 아니라, 여러분 같은 인생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고 세상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B. 신자에게 낭비되는 시간이란 없다.
이점에서 신자의 인생에 낭비되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야곱의 험악한 130년 인생은 허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많은 징계의 손길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 하나가 축적되고 쌓여서 결국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교훈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깨닫고 배우지만, 늦게 깨닫고 늦게 배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제각각 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모든 교훈은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져서 실행됩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떠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 하나가 쌓여서 언젠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야곱이 그랬듯이, 하나님께 기가 막힌 진국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나그네 길 130년 세월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걷고 있는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고, 뭔가 더디다고 느껴지는 모든 시간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C. 사랑하는 것은 기다려주는 것
야곱은 전형적으로 늦게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반대입니다. 하지만, 둘 다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한 배에서 난 자녀들이 제 각각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 태어난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다니엘과(科)입니까, 야곱과(科)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가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다니엘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훌륭하니까요. 하지만 늦게 되는 사람, 야곱 같은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그는 교회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야곱같은 사람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을 참아주고 용납하고 기다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지라도, 우리 같이 조급한 사람들이 그리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야곱 같은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러나?”하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형제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헤세드가 우리의 질긴 인생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듯이, 여러분도 또한 늦게 되는 형제의 인생을 끝까지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은혜의 승리를 주실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야곱 같이 늦게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포기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한 없는 헤세드, 언약의 사랑, 실패할 수 없는 자비와 은혜를 이길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형제 사랑을 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로 벧샬롬 공동체를 세워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