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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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6 -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 (5) -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는 신앙

히브리서 11: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9-09

말씀내용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는 신앙 (히 11:13)



오늘 우리는 믿음의 본질이 어떻게 시간과 깊이 연관되는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1.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말(딤후 4:7~8; 고전 15:19)
먼저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고 할 때, ‘이 사람들’은 8~12절에서 언급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리고 이삭과 야곱 등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부분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약속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구체적으로 큰 민족과 이름 그리고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창 12:1~3).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의 중요한 순간 마다 나타나셔서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번역성경들이 이해하듯이, 이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셨던 것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성취되고 실현되는 것을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히 그 약속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의롭다는 하나님의 최종판결을 받게 한 그 믿음은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라는 믿음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한때 현상적으로 뭔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일 때에만 잠깐 믿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죽는 순간까지 믿음의 씨름 속에서 그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사도 바울이 바랬던 것은 현세보다 내세에서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을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러므로 본문에서 족장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고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은,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라는 말에 잘 드러나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먼 훗날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본질, 인내(히 11:1)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과거의 일에 대한 믿음이면서, 동시에 장래에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장차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이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입니다(히 11:1).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소망과 깊이 연결 짓습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라면,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취되는 것들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우리 삶은 필연적으로 장래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은혜에 대한 기대로 채워지고, 더 나아가 천국에서의 삶에 초점을 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가 바라고 싶은대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신자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주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 시간이라는 요소는 중요합니다. 믿음의 삶은 한편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아브라함의 삶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
먼저 아브라함이 성취와 실현을 본 약속과 보지 못한 약속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들이 하나도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경험한 약속의 성취를 생각해볼까요? 그 대표적인 것이 독자 이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거주하다가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였으니(창 12:4) 이 약속을 받은 것도 그 무렵 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의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성취를 본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그가 100세가 되고 아내 사라는 90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 노부부는 적어도 25년을 기다려서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그 25년은 보통 부부의 25년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10년을 기다리다 지친 그들은 부인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하여 상속자를 얻기를 시도한 결과,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조급함이라는 불신앙이 낳은 불순종의 열매입니다. 결국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린 25년의 시간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성숙하게 빚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셨습니다.

4. 아브라함이 받지 못한 약속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씀하듯이, 아브라함이 받지 못한 약속도 있습니다. 사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은 것 외에 그가 받은 약속의 실현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땅의 약속과 큰 민족, 자손의 약속입니다.

A. 땅의 약속?400년 후의 일(창 15:13~19; 고후 5:7; 히 11:15~16)
첫째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갔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그러나 오늘 본문이 기록한대로 아브라함 자신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적어도 400년이 지나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 내려가 400년, 4대에 걸쳐 종살이를 하고나서야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5:13~17을 봅시다. 이 400년, 4대가 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19절에서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이 땅을 그때에 주실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자, 400년 후에 주어질 땅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자,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주신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약속에 대해서 무의미하다거나 의아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자기 인생이 제일 중요하고 내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태도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깨뜨립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고 소망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는게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신자들은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상이 대단하게 여기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작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입니다(고후 5:7).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땅을 소망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중심에 계심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긴 안목으로 자기 인생과 현실과 역사를 보게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중요하고, 여러분이 주님의 재림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이건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누고 베푸는 삶이었던 것은, 당순히 성령의 강림으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마라나타 신앙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는 16장에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고전 16:22). 이 말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만날 때 서로에게 전하는 인삿말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그들은 이렇게 인사함으로써, 주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했고, 이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재림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뭔가 대박이 나서 소위 팔자가 펴지길 바라고 기도하여 그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우리는 세상에서 관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베푸시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것을 물질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15~16을 보지요.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2000년 전에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5년의 기다림을 통해서 그리고 400년 후에야 주어질 땅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 안에 이런 신앙을 빚어내신 것입니다.

B. 자손의 약속?2000년 후의 일(요 8:56; 갈 3:16)
이제 아브라함이 그 성취를 보지 못한 두번째 약속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큰 민족. 곧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2). 이것은 정말 기분 좋은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이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써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후일 자신을 통하여 형성되는 큰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았던 것일까요?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한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56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듣는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일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던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신앙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판단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단으로 정확무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단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 문제를 깊이 다루기 보다는, 아브라함에게 큰 자손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이 많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깊어지면서 점점 오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씨)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약속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님의 영감으로 설명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주님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믿었고,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이 있음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400년 후에야 얻게 될 땅에 대한 약속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2000년 후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그는 믿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100세에 아들을 낳기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단련해가시는 가운데 점점 그 믿음의 초점은 분명해져 갔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안에 드러난 제사 제도 아래서 살아간 구약의 모든 참된 성도들도, 그들이 드리는 짐승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짐승 따위의 피로 자신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씻어질 수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더 값비싼 피가 흘려져야 했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막으시는 순간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비하신 수양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실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2000년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고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5. 신자에게 시간이 의미하는 것
신앙은 시간 속에서 단련됩니다. 신앙은 시간 속에서 성숙해집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25년 동안,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75세부터 100세까지 25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끝까지 골탕을 먹이시는가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부조리해보이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신앙으로 자랄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불가능 속으로 떠밀려갔던 25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여 무책임하게 왕들에게 넘겨버린 이 비겁한 남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믿고 씨름하며 살아온 25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씨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간 싸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수년 간 기도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아마 조급함과 싸우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이삭만이 아니라, 이삭을 넘어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고 알고 믿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주겠다고 하신 그 땅을 넘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한 성을 바라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다리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믿음을 빚어가심을 믿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이것이 신자에게 시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6. 믿음으로 산 자는 믿음으로 죽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믿음으로 죽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특성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불신앙으로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래 믿음으로 가장한 불신앙으로 살았음을 입증할 뿐입니다. 우리는 도르트신조를 통해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배웠습니다. 참된 신앙, 구원 얻는 신앙은 인내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자기 인생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붙잡고 살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죽음이 끊어 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이 있음을 알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주님을 만나볼 소망으로 즐거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에게 죽음은 생애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 재림의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에 대한 즐거움이 있으며, 당장에는 낙원에서 깰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믿음과 소망 가운데,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눈을 감으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런 영광스러운 죽음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믿음을 따라 죽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연약하지만 참된 믿음을 여러분의 인생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성숙하게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 믿음은 점점 그리스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실패와 상실과 약함과 고난을 통해,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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