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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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7 -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믿음 (6) - 영원의 관점으로 살기

고린도후서 4:16-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9-16

말씀내용
영원의 관점으로 살기 (고후 4:16~18)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신앙에 있어 시간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신앙은 오직 헌신과 열정으로만 평가될텐데, 이것은 위험한 관점이고 태도입니다.
오늘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이라는 소주제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은 성품으로 드러납니다. 성품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가 나타나려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일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성품이 거룩하고 성숙해지며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시간 속에서 망가지기도 하고 다듬어 지기도 한다.
신자의 성화에 대한 전체 그림은 하나님께서 질기고 완고한 우리들을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주로 이것들은 고난으로 경험됩니다--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이루시는 신비한 역사입니다. 문제는 고난을 겪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품이 주를 닮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성화에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맞추어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명령은 이런 차원에서 신자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이 명령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는가의 여부는 중요합니다. 이에 따라 시간 속에서 망가질 것인가, 다듬어질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그가 인생에서 겪은 고생의 정도와 횟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굴복하게 만드십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질기고 완고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결국 굴복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야곱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겪은 심한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아버지 답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정과 자녀들이 모두 함께 겪는 고통은 또 어떠합니까?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30대나 40대에 경건한 어른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를 저는 바랍니다. 생물학적 나이는 연소할지라도, 영적 어른으로서 경건함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배우자나 자녀들 혹 교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게 된다면 얼마나 선한 일입니까? 악착같고 각박하고 못된 성품을 가진 어른이 아니라, 여유롭고 돕고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 계십니까?
경건한 어른 한 사람이 귀한 시대입니다. 목사나 장로의 타이틀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단지 흰 머리 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신 하루 하루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에, 경건함을 입어 가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시간 속에서 망가지셨습니까, 아니면 다듬어 지셨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우리는 시간 속에서 망가지지 않고 더 다듬어지고 주님의 성품을 우리 인격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요?

2. 시간을 보는 세 가지 관점과 태도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고 역행할 수도 없습니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약자입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시간은 갑니다. 군인들은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말하지요? 시간 앞에 장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나 빈자에게나 하루 24시간을 똑같이 주십니다. 같은 속도로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관점과 태도에 따라서 사람은 시간 속에서 망가질 수도, 혹은 다듬어질 수도 있습니다. 관점과 태도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시간을 보고 대하는 관점과 태도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A. 속사람의 관점에서 겉사람의 노쇠함을 바라보기(16; 엡 3:16~19)
첫째로 속사람의 관점에서 겉사람의 노쇠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무엇이고 겉사람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플라톤의 철학에 익숙해 있었을 고린도사람들이 얼른 들으면, 바울이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초하여 몸과 영혼을 나누어 말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겉사람과 속사람은, 앞에서 말한 질그릇에 담은 보배의 비유에서 연장되는 이야기입니다. 속사람은 보배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이 보배가 질그릇 같은 인생에 담겨 있습니다. 겉사람은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육신, 몸을 가리킵니다. 우리 몸은 세월이 흐르면서 노쇠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일, 육신의 노쇠함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노쇠하고 희미해 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비극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 이하를 보지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이것이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바,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속사람은 오는 세상,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함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겉사람인 육체와 달라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신자의 삶에서 겉사람이 노쇠하면서 속사람의 강건함과 새로워짐이 날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만족이 있겠습니까? 물론 돈을 더 벌어서 더 좋은 집과 차와 부동산을 살 수 있고, 더 많은 직업적 성취를 이룰 수 있고, 혹은 더 즐거운 취미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시간의 현실 앞에서 낙심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아, 나는 돈을 충분히 벌어 놓았으니 늙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큰 집이 있으니까 노쇠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삶이 없다면, 시간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요소 이상이 되지 못함은 물론, 우리도 성품과 인격 속에 신앙이 녹아져 있는 경건한 어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참됨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고, 우리는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고,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아 알고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엡 3:17~18), 시간은 우리를 무덤으로 데려가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과 함께,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쇠잔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시간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고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장래의 영광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을 것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사도가 여기서 속사람의 관점에서 겉사람의 노쇠함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정초할 수 있는 속사람의 성장과 새로워짐이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시간과 함께 노쇠해 가는 육신을 보면서도 여러분은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시간을 보는 관점이고 태도입니다.

B.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기(17; 히 11:6; 롬 8:17; 히 11:26)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시간을 바라보는 두번째 관점과 태도를 말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기서 사도는 단순히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사는 타락한 인간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고난은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한 뒤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에 일어나는 현재의 고난을 볼 때입니다. 사도는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사도는 인생에서 겪는 환난이 영광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환난이 영광을 성취하고 이루게 합니다. 이것은 ‘인생만사 새옹지마’처럼, 일어나는 일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일과 연계되어 뒤에 일어나는 일을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국한될 수 없으며 영원의 관점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이 없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영원의 관점을 심어 주십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인생에서 겪고 살아가는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은 크고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상급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이며, 성도들에게 주실 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소망이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은 상 받기를 원하여 인생의 경주를 달음질하고 계십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상 받기를 바라보고 오늘의 고난을 견디라는 말 이상입니다. 이 고난이 장차 누릴 영광을 이루고, 하나님의 상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물론 헛된 고생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쩔 수 없는 고난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고난,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보여준 태도가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성도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는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볼 때, 우리가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겪는 고난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7절을 다시 보지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환난은 가볍다고 표현했고 영광은 무겁다고 했습니다. 또 환난은 잠깐이고 영광은 지극히 크고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이 차이를 아십니까? 경험해 보셨습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볼 때 이런 차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힘든 환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별 것 아니구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교회 역사에 그 많은 순교자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환난이 별 것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그 극심한 고통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를 들지요(박영선목사님의 설교에서 빌려왔습니다). 1959년의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 역을 맡은 배우는 찰톤 헤스톤(Charlton Heston)은 영화에서 산전수전을 겪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는 총 5만명이었다고 하는데 이 중 네로 황제 역이 있었습니다. 그는 흰옷을 입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유유히 거니는 두 장면에 등장합니다.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역할을 맡으시겠습니까? 참고로, 찰톤 헤스톤은 이 영화로 25만불을 받았고(요즘 헐리웃 배우들의 출연료에 대비하면 300억원이 넘을 액수입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받았습니다. 반면, 네로 역을 한 무명의 엑스트라는 2불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느 역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고난을 영원의 렌즈로 본다면, 그것은 영화 중 배역의 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주를 섬길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여러분이 숨쉬고 살아가는 이생이 전부라면, 여러분에게 신앙은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C. 보이지 않는 것의 관점에서 보이는 것을 바라보기(18)
세번째로 본문이 가르치는 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보이지 않는 것의 관점에서 보이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 사도는 고난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고생하지 않고 편안히 산다”는 세상 정신에 사로잡혀 있었던 고린도 사람들은 “왜 당신은 하나님의 사도인데 그렇게 고난이 많은 인생을 사느냐?”고 바울 사도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봤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도 자신이 당하는 고난들, 또는 자신의 모든 결함과 약함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사도의 고난과 약함 만을 보았기에, 사도를 바르게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자신도 이런 것들 만을 주목하고 살아갔다면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고 살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다가올 부활의 때에 있을 만물의 완전한 회복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확실한 성취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여러분을 판단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이며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받고 장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될 사람, 이것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까?
사람에게는 다 감추고 싶은 약함이 있습니다. 이 약함은 열등감을 만들어내거나, 반대로 조금 잘난 것으로 우월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것에 좌우되고 일희일비합니다. 사실 유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보이는 것’을 주목하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과연 중요합니까? 의미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시간이 흐르고 겉사람이 노쇠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낙심을 낙심을 피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담대해질 것입니다. 여유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서 지금 바울 사도가 보여주는 태도가 아닙니까?

3.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영원을 이해하는 힌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시간을 마치고 영원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인생에서 가졌던 수많은 질문과 의문들이 풀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때, 그 모든 것에 대한 의문들이 풀릴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만 드러나게 될, 시간 속의 수수께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난의 의미들은 영원 속에서 비로소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 속에서 이 세상에서 겪은 일들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를 때에도,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여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모든 사건에 대한 답을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답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신실하게 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실 그 영광스러운 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4. 헛되지 않은 시간 vs. 헛되게 보낸 시간(엡 5:16; 골 4:5; 시 78:32~33)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권면했고(엡 5:16), 골로새서에서도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골 4:5).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닌, 정반대의 경우를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78:32~33입니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저 죽기 위해서 산 인생들, 즉 믿음 없이 사는 모든 인생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세월을 아끼는 것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믿음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믿음으로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세 가지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인생이고 헛되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경건한 어른이 많은 경건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5. 신앙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생각하십시오.
[시간 속에서 성숙해가는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마치면서, 한 두 가지를 더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가령, 목사를 청빙할 때, 설교를 잘 하고 신앙 인격도 훌륭한 목사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나이가 70세는 되신 목사님 중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40대 목사님 중에서 그런 분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의 요소를 무시한 채 성숙한 신앙인의 행동규범을 어린 신자들에게 부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신앙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그 자신이 시간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움이 사라지고, 뭔가 어색하고 치우친 신앙을 갖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요소와 관련하여 신앙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다리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하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의 느낌과 감정 혹은 확신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단정하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어린 아이가 부모님의 선물을 받고 기뻐서 깡총깡총 뜁니다. 그러나 사춘기를 겪으면서 표현을 하지 않는 시기도 거치게 됩니다. 그렇게 성장하고 성인이 됩니다. 비록 어릴 때처럼 표현하지는 않지만 사실, 부모를 사랑하는 깊이와 넓이는 선물 때문에 좋아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성숙한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할 때에도 이런 일들을 겪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하면, “왜 나는 이전처럼 그렇게 감격하고 기뻐하고 좋아하지 않는 거지? 뭐가 문제일까? 왜 내 신앙은 이렇게 후퇴하는 걸까?”라고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진단할 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볼 때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형제들의 신앙을 이상한 방식으로 평가하고 단정할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하면, 우리는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하여 시간 속에서 우리 신앙을 성숙하게 빚어가시고 우리를 거룩한 주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돌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