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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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5 - 시간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 (4) - 그 시간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베드로전서 5:6-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9-02

말씀내용
그 시간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벧전 5:6~7)



1. 잘 되는 때와 안 되는 때
인생을 살다 보면, 잘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빨리 가는 것 같은데, 나만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고속으로 승진하고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속도가 스트레스를 줍니다. 남들은 시속 130km로 가는데, 나는 자전거로 시속 10km로 가는 느낌입니다. 모두가 쾌속 질주를 하는데 나만 정지한 느낌입니다.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다 나를 추월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스트레스를 경험해 보지 않으신 분들은 물론 없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만일 이런 것을 모르신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교만해 지지 않도록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잘 되는 때에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셨고 안 되는 때에는 하나님께서 별로 일하지 않으신 때인가 하는 것입니다. 빨리 가는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컸지만, 늦게 가는 때에는 내 힘으로 가는 때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간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으시겠지만, 한 번 그 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분들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그 시간’ (삼하 5:4~5)
다윗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시간은 그리 빠르게 가는 시간이거나 잘 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매우 더디고 거친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때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략 그가 20세가 되기 전 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골리앗과 싸우려 하자, 사울이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고 했는데(삼상 17:23), ‘소년’이라는 말은 하인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나이와 관련되어 언급될 때는 어린 아이부터 성인 되기 전의 청소년기를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단어는 실로의 성막에서 섬기던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도 사용되었고(삼상 2:11), 17세의 요셉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창 37:2). 또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의 장성한 세 형들 엘리압과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가 징집되었던 반면(삼상 17:3), 이새의 막내이자 여덟째 아들이던 다윗이 징집되지 않았다는 것도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는 20세가 되기 전, 대략 15세에서 17세 정도 되는 때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성경은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를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5:4~5을 보지요.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단지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이 속했던 유다 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외에 대부분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따름으로써,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무려 7년이 넘도록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30세에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다스리던 다윗은 7년 6개월이 지난 뒤 이스보셋의 죽음과 함께 내전이 종식되고 나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37세가 넘었고, 이때부터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33년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처음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10대 중반 정도라고 보면, 그가 이때로부터 유다 지파의 왕이 되기까지는 15년 정도 걸렸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천천히 흐르는 긴 시간을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일까요? 다윗이 왕이 되기 직전에, 기름을 부어 왕이 될 것을 알리시면 되는데, 왜 이토록 일찍 기름을 부으셔서 왕이 될 것을 미리 알게 하시고 그 오랜 시간 애간장을 태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왜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주시는가? (삼상 15:17)
다시 질문하면 왜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왕이 되지 않았을까요? 다윗이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뒤에, 자연스럽게 왕위로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다윗 자신에게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되었을까요? 다윗은 누구보다 일찍 역사의 무대에 올라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비교가 불가능한 멋진 모습으로 공적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다윗의 공적 삶이 조금은 더 위로 올라가는듯 하지만, 사실 왕이 되기까지 그는 10년 이상의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고 거의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과 두번째 왕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사울은 빨랐고 다윗은 더뎠습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되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은 모든 지파를 미스바에 모으고 제비를 뽑는데 사울이 왕으로 뽑힙니다. 그리고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를 위협하는 암몬을 멋지게 물리친 뒤, 길갈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이렇게 왕이 되기까지 쾌속 질주한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 선지자의 도착이 지연되자 사울은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이 일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다는 첫번째 선고를 받게 됩니다(삼상 13:14).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 아말렉 왕과 좋은 짐승들을 남겨두는 불순종을 행합니다. 결국 이 일로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다는 두번째 선고까지 받게 됩니다(삼상 15:17~31). 이 일로 슬퍼하는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그리고 남은 평생 자신의 경쟁자 다윗을 추격하는 일로 소진하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슬픈 왕의 이야기입니다.
사울과 비교하면, 다윗에게 왕이 되는 길은 더뎠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뒤, 다윗은 여전히 사울의 옆에서 그에게 악령이 내릴 때 수금을 타서 악령이 떠나게 하는 자로 지내면서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지만 그의 많은 빛나는 전과로 곧 사울의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면 사울 같은 인생이 있고 다윗 같은 인생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사울 같은 인생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끝까지 봐야 압니다. 사실,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을 탄탄대로로 이끌지 않으셨을까요? 또 우리 인생에도 왜 이처럼 더디고 험하고 고된 시간이 있는 것일까요? ‘그 시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그 시간’을 잘 보내는 열쇠
사실, ‘왜’라는 질문 만큼이나 중요하고 이 질문과 뗄 수 없는 것은 ‘그 시간’을 잘 보내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잘 보내야 하나님께서 내게 ‘그 시간’을 주신 뜻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잘 보내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그 시간을 잘 보내는 열쇠는 한 마디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친 길을 가다보면 마음도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더딘 길을 가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여유로와지기 보다 조급해지고 참을성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됩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보내고 있는 그 거친 시간들 속에서도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유없이 나를 대적하고 내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을 향해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그 시간 속에서 이기는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을 지킨 다윗만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마음을 지키도록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권적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도 보아야 합니다.
잘못을 행하지 않은 자신을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던 왕 사울,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왕 사울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고, 그를 죽일 두 번의 기회를 모두 하나님께 맡겼던 다윗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대신,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 것입니까? 또 우리는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A.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삼상 24:4~7; 26:8~10)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다윗이 붙잡았던 신앙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 사울에게 쫓기기를 10여년을 하면서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며, 이 모든 일이 사울이나 어떤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무너져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없이, 이렇게 거칠고 오랜 시간을 지내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내용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하나님은 나의 건강과 부와 번영을 주는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이라면, 10년을 질질 끌면서 내 인생을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번영신학에 근거한 기복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그리고 행하신 일과 하시는 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바로 이런 시간이 길어질 때,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뜨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대단히 헌신적이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간들이 길어질 때 도리어 그들의 믿음의 참됨을 인내로써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열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조급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다윗에게는 이 무섭고 지리한 시간을 자신의 힘으로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두 번 찾아왔습니다. 한 번은 3000명의 군대를 데리고 엔게디 광야에서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변을 보기 위해서 한 굴에 들어왔을 때였습니다(삼상 24:1~7).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굴로 사울이 들어온 것입니다. 부하들이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그러나 다윗은 말없이 뒤에서 사울에게 가만히 다가가 겉옷 자락만을 베고는 물러섭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 뒤의 다윗의 반응입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삼상 24:5~7).”
두번 오기 어려운 기회가 한 번 더 다윗에게 주어졌습니다. 사울이 군대 삼천명을 거느리고 십광야에서 다윗을 추격할 때였습니다. 다윗은 부하 아비새와 함께 한밤중에 느슨한 경계 속에서 잠든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가, 잠자는 사울의 곁에까지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아비새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 26:8).” 이번에도 다윗은 말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9~10).”
다윗은 그 시간을 끝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조급함이 찾아올 때,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조급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이 시간을 끝낼 방법을 찾게 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 시간을 끝내려는 유혹에 굴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시작한 분도 마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분명히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B. 눈 앞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고후 5:7).
두번째로 우리가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긴 시간 속에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나를 대적하는 그 사람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울은 다윗의 대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까닭없이 그를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던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사울을 향하여 증오와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고, 기회가 왔을 때 조차 그를 향하여 칼을 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 보다 더 큰 그림을 믿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신앙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 인생을 좌절시킨 누군가를 향하여 증오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만일,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행동할 수 있고, 심지어 정당하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고후 5:7).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내 주변에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계시는 큰 그림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 이 상황들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증오와 복수심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증오 대신 긍휼함을 품게 하여,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C. 싸움의 본질은 믿음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런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길고 지리한 시간 속에서 마음을 지키는 세번째 길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싸움의 본질은 내가 저 원수와 대적을 이기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싸움의 본질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만일, 다윗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면,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이고, 스스로 이런 상황과 시간을 종결했을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생각하기를, “내가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왕이 되어야 하고, 그러니 사울을 죽이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지”라고 그의 부하들의 생각처럼 생각했다면, 그는 사울을 죽이고 더 이른 시간에 고생도 좀 덜하고 왕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질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본질이 고생 덜하는 것입니까? 고생 덜하고 좀 더 빨리 성공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만일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자녀들에게 최고의 부와 안락함과 건강과 모든 환경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가지는 의미,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무의미해 보이고 낭비되는 것처럼만 느껴지는, 이뿐 아니라,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지리하고도 괴로운 시간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제가 던졌던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골리앗에 대한 승리에서 바로 왕위로 이끌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탄탄대로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루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긴 시간들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답입니다. 더 멀리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여기에는 물론 좋은 시간도 있고 나쁜 시간도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백성, 합당한 사람으로 빚으시고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입는 것 보다 말입니다. 싸움의 본질은 괴로운 시간을 내 마음대로 빨리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마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눈 앞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그림을 보는데 있습니다.

5. 적용적 교훈
어떤 분들에게는 ‘긴 시간’이 지금일지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 긴 시간을 과거의 시간으로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십시오. 그 긴 시간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질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우리 안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빚어가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거나 조급해하지도 마십시오. 이 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주무시거나 멀리 떠나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그리고 과거의 그 시간에도 항상 여러분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일을 행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사울 처럼 쾌속 질주하는 인생을 더 이상 부러워하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일도 멈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그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상승일로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추락하는 쇠퇴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혹은 더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그 시간 덕에 하나님은 왕이 된 다윗이 교만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낮추도록, 하나님께 엎드리도록 만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생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시도록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해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좋은 시간이나 나쁜 시간이나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마땅하고 합당한 찬송을 올려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