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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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1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12) - 믿음이 무너질 때 세워지는 믿음

욥기 42:5-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7-08

말씀내용
믿음이 무너질 때 세워지는 믿음 (욥 42:5~6)


오늘로 12번에 걸친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전한 설교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에 대하여 정리가 좀 되셨습니까? 신자에게 고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손길인지 이해하셨습니까? 오늘 그 마지막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신앙을 연단하는 고난: 익숙한 하나님의 환상이 무너질 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익숙한 분이 되실 수 있습니까? 익숙하다는 말은 내 생각과 기대에 벗어나지 않고, 어느 정도 예견이 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놀랄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상대로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물이나 사람은 시간과 함께 익숙해져감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도 오래 하다 보면 하나님이 이제는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올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익숙한 분이 되실 수 있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거나 우리가 거의 하나님의 경지로 갔다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성이나 판단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조차 내가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익숙한 하나님’ 또는 ‘길들여진 하나님’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즘의 표현방식으로 하면, ‘하나님 사용법’을 알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으로 믿고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섬기는 종이나 심부름꾼 아니면 어떤 능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월이 가면 신앙생활도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익숙한 분이 되시는 것은 실로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성향을 아시기에, 우리가 좀 익숙해졌다고 느끼게 될 즈음에는 고난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익숙해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깨지게 하십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분을 바르게 알지도 못하며 그저 우리 인식의 한계 속에 들어온 익숙하고 길들여진 신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니다.
욥의 고난을 보십시오. 그가 고난을 거친 뒤에 고백한 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여기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회개하나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 의미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욥이 지금까지 고난 중에 하나님께 소리지르고 화를 내고 했던 그 모든 태도를 회개한다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욥이 지금까지 자기가 친구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굽히지 않고 하나님께 항변해왔던 그런 내용들을 거두어들이고 회개를 한다면, 이것은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의 의도와는 다른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인정해 주셨고 도리어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어지는 7~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7~9).”
잘 들어보십시오. 여기서 욥이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제가 이 고난을 받을만한 잘못을 한 일이 없고 떳떳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고난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제게 설명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런 제 주장과 하나님께 대한 요구를 거두어들이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뵈옵고 나니, 제가 하나님께 그런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설명해주셔야 할 의무가 없으시고 저는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설명해주시고 제가 이 고난의 이유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하나님을 뵈옵고 나니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신뢰와 사랑과 절대적 순종을 받으시기 합당하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저는 이제 제 마음과 제 뜻대로 하나님을 조종하고 싶어했던 그 태도를 회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 욥은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서 욥은 자신 안에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마음, 길들여져 있고 익숙한 하나님으로 편하게 가려는 태도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에게 허락하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길들여질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 익숙해질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셈입니다.
실제로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세심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욥이 던진 그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답이나 설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욥에게 답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알려고 하지도 말고 무조건 믿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설명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설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로써 우리 이성에 완전하게 다 설명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욥기가 보여주는 욥의 고난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을 네가 충분히 혹은 완전히 이해하고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적어도 이런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셔야 해!” 또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이렇게 하실 수는 없어!”하는 식의 생각과 태도들 말입니다. 이런 게 우리에게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뭔가가 일어나고 있을 때, 내가 동의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지!” 하는 생각이나 말들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서 욥이 경험한 일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행하셔야 하고 이런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자신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의 틀 속에 넣으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런 하나님을 확인하는 수준에서만 살아가신다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참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섬기실 수 없습니다.
고난의 경험은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경지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이점에서 ‘고난’은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기는 하지만, 본질상 내가 이해하고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 소위 ‘익숙한 하나님’ 또는 ‘길들여진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모든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 무한하고 불변하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사실 이렇게 고난 속에서 내 예상과 기대가 모두 깨어질 때, 우리의 믿음도 무너지는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진짜 제대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받은 최고의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 자신이 답이 되는 신앙의 자리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통해 얻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믿음이 무너지고 믿음이 세워지는 축복입니다. 어쩌면 시편 기자가 고백한 내용도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71).”우리의 믿음은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신앙의 경지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2. 신앙을 증명하는 고난
고난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하나님, 길들여진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또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고 입증해줍니다. 누구에게 말이니까?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실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실 때, 이 명령을 하시는 분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확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인하거나 못 들은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내 생각에 이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속히 움직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이 지명하신 그 산으로 출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명하신 산에 도착하여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제지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엄청난 순종을 보시고서 이제 마침내 확인하셨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알게 하시려는 시험이고 고난이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이 시험이라는 성격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를 향한 네 믿음이 이런 자리까지 왔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경우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변호사와 사업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씨는 하나님의 종 무디의 신실한 후원자였습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 전재산을 거의 잃은 스패포드씨는 2년 뒤 아내와 네 딸을 영국으로 가는 여객선에 태우게 됩니다. 그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되는데, 여기서 스패포도는 자신의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마치 욥을 생각나게 하는 고난입니다. 실의에 빠진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가던 중, 침몰 해역을 지나던 스패포드씨는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함을 경험한 스패포드씨는 그 감동을 즉시 찬송시로 쓰게 됩니다. 바로 이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말할 수 없는 깊은 고난을 겪은 스패포드씨로 하여금 이런 평안을 누리고 이런 찬송시를 쓰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찬송시는 고난 속에서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익숙한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참된 믿음의 자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스패포드씨의 믿음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것이 아닙니까?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입증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는 평안함과 더 큰 확신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3. 고난 속에서 빛나는 교리
자, 이제 저는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하겠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어느 정도는 경험하셨다시피,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있어주는 일을 할 수 없는 한, 고난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실제적인 조언들이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리가 중요합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매우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가령,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자책을 하거나 자기의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는 콩고 선교사였던 헬렌 로즈비어가 그녀의 고난 속에서 생각했듯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은 질문들을 하나님께 쏟아냅니다. 욥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욥이 지금 겪는 고난은 욥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리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요 19:30)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남겨진 어떤 벌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가져가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교리입니다. 이 십자가와 구속의 교리를 깊이,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서 알게 될 때, 이 교리는 우리의 고난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십자가로 증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교리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십자가 구속의 교리는 당신의 아들을 버리심으로 영원히 버려진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증명하고 또 선포합니다.
부활의 교리는 또 어떻습니까? 설령, 그 고난이 우리를 죽음 속으로 이끌어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할지라도, 이런 고난이 어떻게 부활의 교리를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절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처음 300년은 박해가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부활의 교리로부터 죽음도 질식시킬 수 없는 한 없는 위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교리를 알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하심, 불변하심, 무한하심, 그리고 그분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 지혜와 능력, 거룩과 선하심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는 언제 드러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그 모든 지식, 그 교리들은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시는 방편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바르게 그리고 깊이 알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확신을 주는지를 경험적으로 더 많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교리는 고난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합니다. 교리는 사람들이 주는 값싼 위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으로 들어갔을 때가 아니라 평안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리를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4. “그분의 방법, 그분의 시간, 그분의 뜻대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미국 작가 중에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1926~2015)이 있습니다. 그녀는 짐 엘리엇(1927~1956)의 아내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에콰도르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남편 짐 엘리엇은 다른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당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짐 엘리엇을 포함한 5명의 선교사들은 경비행기로 아우카 부족이 있는 강변으로 날아가고 결국 1956년 1월 초 그들은 모두 창에 찔린 주검으로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게 됩니다. 이때 그녀 자신이 영적으로 겪은 심정, 그리고 짐과 함께 순교한 다른 4명의 선교사들의 남겨진 아내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책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교사가 되어 남편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아름다운 헌신으로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드린 이 젊은 부인들은, 모두 무너지는 믿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의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녀들의 참된 믿음이 세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익숙한 하나님, 길들여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환상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을 죽인 원수들인 아우카 부족에게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짐과 함께 죽임을 당한 네이트 세인트의 누이인 레이첼 세인트가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동생을 죽인 원수들에게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수고를 통해, 아우카 부족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됩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 사후에, 남편의 일기와 전기 외에도 탁월한 경건서적들을 많이 썼고 많은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열정과 순결]이라는 책에 쓴 이 말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일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관리 능력에 우리의 가장 간절한 목표를 맡기고 그분이 그분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그 일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동의하십니까? 그렇게 고백하십니까? 30살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죽고 어린 딸과 함께 선교지에 남겨진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하거나 그렸던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도 우리가 생각하고 그려왔던 삶처럼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지만, 우리가 얻기를 바라던 그 도움을 얻지 못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열심과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지? 이건 아닌데?”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무너져야만, 진짜 견고한 믿음이 자라나고 세워집니다. 이런 경험은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말한대로, 일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관리 능력에 우리의 가장 간절한 목표를 맡기고 그분이 그분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그 일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신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분의 방법, 그분의 시간, 그분의 뜻대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은 이런 신앙입니까? 이런 신앙은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자라나고 세워집니다.
그녀의 책들에는 이런 전제들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간절히 기도한 대로 일하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주권자시다. 신앙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런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 것이다.” 이런 논지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앙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왜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 묻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그저 여러분이 바라는 인생을 주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들여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할만한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중에서 고난과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찬송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5.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후 13:4)
하나님은 길들여질 수 없는 분이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이런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모든 표적으로 당신의 메시야되심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제자 요한은 십자가 아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여인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은 무력하게 못박히신 주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약자처럼 비방과 조롱을 받으시는 주님을 말입니다. 끝까지, 주님이 운명하시기까지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그 모든 무리를 심판하기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이때 그들의 믿음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이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참되게 하시고 견고하게 빚어가십니다.
십자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승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패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방법 뿐입니다. 참된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 믿음을 세우시면서, 때로는 울어야 할 시간에 깜짝 놀라 웃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줄 알고 있는데, 놀랍게도 내 믿음이 가장 아름답고 순전하고 견고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심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만이 답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