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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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0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11) - 고난은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

베드로전서 5: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7-01

말씀내용
고난은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 (벧전 5:10)


1. 고난에 대한 비성경적 관점은 위험하다.
고난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추상적일 수 없는 매우 현실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바르고 분명하게 알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에 대한 오해 위에 서게 되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고난을 회피하거나 축소시키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날 수 없고 믿음의 삶도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대한 비성경적 관점이 위험한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A. 영적 성장의 장애가 된다(욥 42:5; 롬 5:3~4).
첫째는 고난에 대한 비성경적 관점은 영적 성장의 장애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기르시는 방식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징계를 포함한 시련과 연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심지어는 그를 대적하시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아브라함을 몰아넣으시는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성장시키시려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욥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욥의 신앙을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연단하고 성장시키시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통과한 후에,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롬 5:3~4). 그러므로 고난을 피하려는 태도는 결국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B. 고난을 필요 이상으로 고틍스럽게 한다(벧전 1:6~9).
둘째로 고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고통이나 좌절을 겪을 때 필요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신자는 고난의 현상과 상황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것 마저 무너져 버리게 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뻐하고 영광스러워 하는 은혜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6~9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난은 그 자체가 힘들지만, 그 고난이 가지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가 고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C. 소명을 저버리게 된다.
세 번째로 우리가 고난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붙잡지 못하게 되면 고난을 당할 때 소명을 저버리는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메시지는 매우 드물게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좀 더 편하고 고난을 피해갈 수 있다는 뉘앙스의 설교가 더 보편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악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을 신기루로 속이는 행위이고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소명을 저버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고난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소명을 저버리게 되고 더 쉽고 편해 보이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영원의 관점 즉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상의 부르심에서 벗어나 적당히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당연할 뿐 아니라 도리어 지혜로운 일로 여겨지는 것은 실로 위험한 태도입니다. 이처럼 고난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을 성숙에 이르게 하고, 고통 속에서도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뒤바뀐 고난의 의미
오늘 설교의 제목은 “고난은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입니다. 본래 고난이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주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스러운 과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영광스러울 수 있는지, 고난이 영광스러운 의미와 목적을 지니게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좀 정리해보지요.

A.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고난을 다 받으셨다(고후 5:21; 요 19:30).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받는 고난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고난을 받으신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범죄하지 않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셨기 때문입니다(고후 5:21). 예수님은 믿음이 더 성숙해지거나 더 온전해지셔야 할 필요도 없으셨으며, 더 거룩해지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연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철저히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는 형벌의 고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죄와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저주와 형벌이었고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죄의 대가로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요 19:30).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죄의 형벌로서의 고난과 죽음이 조금도 남겨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조금도 남김 없이 끝까지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로써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이상 죄에 대한 형벌이나 심판으로서의 고난이 존재하지 않게 된 근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죄의 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길러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B.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무관하지 않은 고난(계21:3~4)
비록 그리스도인에게 죄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고난이 그 자체로 여전히 죄의 결과로 존재하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고난은 없어지겠지만(계 21:3~4) 그 전까지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죄는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죄인들의 심령 속에서 살아 활동하는 실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악을 강제로 막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죄는 이 세상에서 더욱 활동적이 되고 때로는 역사 속에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악은 사람에게 고통을 더해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 안에 죄성이 남아있어서 그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의 악의 실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라고 할지라도 고난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세상에서 맺는 관계는 물론 교회 안에서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연약하여 충분하게 사랑하지 못해서 당하는 소극적 고통도 있겠지만, 악이 발동해서 미워하고 속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적극적 고통도 있습니다. 여전히 죄와 무관하지만은 않은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길러가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고 미쁘신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는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모든 고난의 목적을 일일이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믿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C. 피할 수 없는 고난은 신자에게 영광스러운 목적을 지닌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남아있고 주어지는 고난은 형벌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비록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에는 여전히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고난과 죽음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노쇠하고 썩을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고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게 되지만,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과 명예가 무너지는 실패, 경제적 고난, 관계의 실패나 치명적인 질병의 선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모든 것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지닌 영광스러운 고난이고, 영광스러운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에게 고난의 의미가 영광스럽게 바뀐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입니다.

3. 고난과 영광은 패키지다(눅 24:26; 롬 8:17~18; 벧전 1:11; 벧전 4:13,16; 벧전 5:10).
‘영광’이라는 개념은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놀라운 개념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패키지입니다. 실제로 성구사전에서 고난과 영광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쓰인 구절들을 찾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몇 구절들을 확인해볼까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그리고 한 구절 더 본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 베드로전서 5:10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고난이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늘의 기쁨을 소진시켜 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지닌 영광서러움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 신자에게 고난이 유익한 이유들
신자가 고난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하나같이 영광스러운 것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유익이 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A.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빌 3:12).
먼저 우리는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재를 경험하게 해주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간절히 원했던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고난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바울 사도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고난은 신자를 최고의 영광스러운 영적 체험으로 인도합니다.

B. 죄성을 죽이고 거룩을 이루게 한다(창 50:15~21; 히 12:10).
두 번째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성을 죽이시고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실 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우리를 낮추십니다.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뼛속 깊이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용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봅니다. 창세기 50:15~21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닫는 것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고난은 우리의 죄성을 죽이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해져 가고, 완성에 이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 그리고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 고난이 없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이교 제국에서 높은 관직을 누렸던 다니엘도 사자굴에 들어가야 했고 온갖 모함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외부적 압박 아래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도 그런 고난이라는 영광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거룩함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C. 영원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임을 알게 한다(고후 5:2; 롬 8:18~25)
세 번째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에덴 밖에 있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위해 지음 받은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영광에 취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게 하십니다.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영원한 왕을 위해서 살아갈 존재라는 사실을 고난 보다 더 잘 가르쳐주는 수단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의 행복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난은 지나가는 이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과 하늘의 기쁨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박국이 고백했고, 스바냐가 고백했던 기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장막, 몸이 후패해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아래 탄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탄식을 하지만, 이 탄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로 드러나게 될 몸의 속량을 간절히 바라는 탄식입니다(롬 8:19~25). 사도 바울은 고난이 아무리 심해도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롬 8:18). 이것은 장차 받을 영광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장차 여러분이 받을 영광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장차 얻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엡 1:18)? 우리의 죽을 몸은 우리가 이 땅에 살 존재가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5. 현재의 고난이 장래의 영광을 성취한다(고후 4:17; 롬 8: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썼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고 살아가는 고난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장래에 우리가 누릴 영광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깐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잠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잠깐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굳건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사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유독 고난이 많다고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느낌과 그런 생각 때문에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광스러운 일, 영광스러운 과정을 여러분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리고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고난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적극적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감당하십시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6. 하나님은 선하십니다(시 119:67~68).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67~68).” 이 고백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 고백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십시다. 영광스럽게 고난을 당하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이 보게 하십시다. 고난의 유익, 고난의 영광을 고백하면서 나에게 고난을 주신 그 하나님은 실로 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영광을 우리 생애에 놓치지 마십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스러운, 너무나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돌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