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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9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10) - 고난, 위로 그리고 하나됨

고린도후서 1:3-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6-24

말씀내용
고난, 위로 그리고 하나됨(고후 1:3~11)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겪는 고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고난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사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엄청난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고난은 성도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한 축복입니다. 물론 성도들에게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이면, 그 고난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5)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쓴 부분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사도는 자기가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사도는 자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당하는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곧 자신에 대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난을 자신이 겪었다고 말하는 대신 ‘넘쳤다’고 표현합니다(5). 바울 사도는 실로 고난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내 인생이 바로 고난이 넘치는 인생이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날부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을 자라는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바울은 사도로서 특별한 고난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고난은 사도적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특별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가 이 고난을 자기 한 사람만의 독특한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4(6)
사도는 5절에서 ‘나’라는 인칭대명사 대신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6절에서는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사도가 받는 고난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는 고난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사도이기 때문에 너희 보다 특별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자신을 연결시킨 사도는 이제 다시 자신이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자신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핍박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위한 고난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때로는 고난 때문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가정이 깨어지기도 하며, 다툼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고난은 교회를 깨뜨리는 대신 도리어 하나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8절에서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했던 심한 고난을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이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극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사도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느낄만큼 심한 고난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가 이 심한 고난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 아무리 심한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런 고난을 겪은 자신을 생각하고 힘을 얻으라는 의도로 보입니다. 사형선고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9). 하나님은 이런 큰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 분이며 장래에도 건지실 분이라고 그는 말합니다(10).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기들과 같은 고난을 겪은 바울 사도와 심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자신이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며 고난을 감당해야 했던 모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겪는 것과 동일한 고난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결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3. 고난 보다 더 큰 위로(3~5)
본문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이 단어(헬. 파라클레시스)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그 뜻은 ‘사람이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고난 중에 있을 때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보혜사(여기서는 ‘위로자’라는 의미로) 성령님께서 그 옆에서 그를 위로하십니다. 3절에서 바울 사도는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보혜사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성자와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근본적으로 자녀들을 위로하시는 보혜사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모든 환난 중에서’ 그렇게 하십니다(4).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모든 환난’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지 않는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도의 산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그 극한 고난 속에서도 사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사도는 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합니다(5). ‘하나님의 위로’는 언제나 고난보다 더 큽니다. 고난이 넘치면 하나님의 위로는 더욱 넘칩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극한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위로를 아십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고난 속에서 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넘치도록 풍성한 위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조금 밖에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고난이 너무 작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받는 소위 적극적 고난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시라는 말입니다.

4. 고난이 만드는 위로자(4)
고난 속해서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을 받고 있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4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서 자신과 같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당한 고난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로자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개방적인 이교 도시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 열매로 거기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18:1~11).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핍박과 고난을 사도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과 그때마다 넘치도록 주셨던 하나님의 위로를 말함으로써, 자신을 고난 가운데 있는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는 자신이 겪은 고난이 고린도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아프리카 콩고의 선교사였던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제가 그녀를 잠깐 언급했었지만, 다시 한 번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953년 아프리카 콩고로 들어간 의료선교사입니다. 병원을 세우고 간호원들을 양성하는 등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던 중, 1964년 내전이 터졌고 그녀는 반군에게 붙잡혀 5개월 반 동안 강간과 갖은 고문을 당함으로써 그녀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한때 절망 속에도 빠졌었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를 경험함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그녀가 경험한 고통 보다 더욱 넘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년 후인 1966년 다시 자신을 짓밟았던 콩고로 들어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잔혹한 내전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고통을 겪은 많은 여성들을 힘있게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들이 겪은 고난을 동일하게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저술과 강연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도 이런 식의 고난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비록 그 어떤 일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알 것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6). 이렇게 성도의 고난은 위로의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위로자들이 됩니다. 상처받은 위로자, 상처받은 치유자가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고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게 해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가 되는 것입니다.

5. 고난과 위로를 통한 교회의 하나됨(11)
오늘 본문 전체는 ‘고난과 위로’라는 주제 아래서 바울 사도와 고린도교회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고난받는 그 한 사람 개인만을 위한, 혹은 그에게만 의미가 있는 고난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한 지체의 고통은 몸 전체가 느끼는 고통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난 중에서 성도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도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위로가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를 위로하시는 위로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혼자만 존재하는 개별자일 수 없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신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존재가 교회의 지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적 관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개인주의적 사고를 거부합니다. 사도는 이런 전제에서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교회가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 아들이 큰 환난을 겪었는데 그것을 아버지인 제가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일일 것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이런 신앙적 전제를 분명히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 전제에서 살아가십니까? 사도 바울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사도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가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너무나 약해진 나머지, 자기 연민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부름받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을 통해 바울 사도가 경험한 위로는 고린도교회 사람들 모두를 위한 위로가 되고, 바울 사도 자신의 감사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 모두의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의 고난은 고린도교회와 사도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결속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가 되어가는 교회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자신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5절에 언급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없어도 되는 말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이 말을 빼고 5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치는도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도리어 더 간결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사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쓰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없다면, 본문의 모든 이야기는 허구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누리는 위로라는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면, 사도가 말씀한 바 넘치는 위로는 결코 경험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오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없는 위로를 구하고 그리스도 없는 위로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의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아는 일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서 자비와 위로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말은 사실 고린도후서 1장의 열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그 모든 고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위로의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고난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십니까? 그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공급받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했던 바울 사도가 3절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린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3).”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7. 관점의 변화: 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 그리고 교회로!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가십니까? 과거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자기 밖에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받는 고난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네가 받는 위로는 너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보라고 하십니다. 교회를 위한 고난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영광이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게 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며, 그 위로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고난을 능히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며, 결국 바울 사도가 혼자 부르는 솔로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부르는 코러스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노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고난은 여러분 자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알아야 하고 서로에게 자신을 알려야 합니다. 고난 조차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또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의 약함은 강함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모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