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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8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9) - 교회를 위한 고난

골로새서 1: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6-17

말씀내용
교회를 위한 고난 (골 1:24)


1. 고난을 피하는 기독교는 은혜의 진수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와는 별개로, 실제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리한 거리’라는 말은 참 편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도 이런 식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좋으면 만나고 안 좋으면 안 만나는, 자기 편한 대로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미숙한 관계 맺음입니다.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거짓 신앙이거나 심각하게 병든 신앙임에 분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값싼 은혜’가 만연하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값싼 은혜를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죄사함, 제자도가 결여된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 즉 고난이 없는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값싼 은혜는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한 교회를 만듭니다. 값싼 은혜는 내세를 보장해주는 영생보험의 혜택만을 바라고 살면서 적당히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양산합니다. 교회당에 모이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오합지졸,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고난이 오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전제합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서신서가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난을 회피하는 값싼 은혜의 기독교가 가지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살아가는 경험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은혜의 진수는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듣는 간증들은 은혜의 진수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실은,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수많은 거짓 신앙을 양산해내는 모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은혜의 진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것(빌 3:7~12)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자신의 가치와 소원을 언급한 본문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3:7~12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는 여기서 복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전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복음은 그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비그리스도인과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긴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위해서 그는 자기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그가 그렇게 높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거저 주어진 의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갈망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보다 친밀한 인격적 지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고 닮는데 있어 세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둘째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셋째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 3:10). 사도는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만을 배우겠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욕하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에 이 모든 것?고난과 죽음?이 도리어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본문은 골로새서 1장 24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종종 잘못 이해되어온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부족한가 보다 하는 생각에서 우리가 이제 2~3%미만으로 남은 고난을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성하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복음적 생각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성을 완전히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 정도의 타당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 사람에게 적용되기 위한 고난
첫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택하신 백성의 구속을 완성하셨지만, 그 구속 사역이 백성들 각자에게 이루어지기 위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영혼들을 낳기 위해서 감당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은 이것을 해산하는 수고에 비하기도 하였습니다(갈 4:19).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 필요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취되었지만 그 복음의 메시지가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해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B. 그리스도의 고난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
조금전 살펴본 빌립보서 3장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연합)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주님께로부터 들은 대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재차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 9:4~5).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주님은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박해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교회와 주님은 연합된 몸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특별히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교회를 공격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할 때,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 고난에 대한 말씀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지난 주에 상고한 빌립보서 1:29과 같은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의식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과 유대, 연합을 더 깊게 경험하게 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모든 유익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지라도 얻기를 원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머리를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실재를 더 깊이 경험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그는 부활의 권능과 기쁨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재를 깊이 누리게 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더 알려는 마음이 여러분의 심정에 없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하는 갈망은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닮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앞에 믿음의 길을 걸었던 모든 선배들의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그들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밝히 아는 자였고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능히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행 6:10).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그의 설교는 그가 공회에 붙잡혔을 때 공회 앞에서 했던 설교입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공회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그리고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역사상 많은 순교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구주의 남은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닙니까? 그 고난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가정이었던 여사의 가족들은 수용소에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수용소에 함께 있던 코리 여사와 언니 베티가 보여준 모습은 고난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니 베티는 자기를 채찍질하는 간수에게 삽을 들고 달려들려는 코리에게 말합니다. “보지 마, 코리. 예수님만 바라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구주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행위가 주는 고통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불행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비통한 마음을 떨쳐내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은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우리의 고난 속에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힘입니다.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 1925~2016) 선교사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영국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한 헬렌은 콩고 의료선교사로 파송됩니다. 당시 남성중심의 선교사 사회에서 그녀의 헌신과 지도력은 인정받았고 괄목할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64년 콩고에 유혈내전이 발발하고, 헬렌은 반군 게릴라에게 붙잡혀 5개월 반 동안 갖은 강간을 포함하여 갖은 잔혹한 고통을 겪습니다. 헬렌은 훗날,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런 깊은 회의 속에 있던 순간, 주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너는 진정한 선교사가 되는 특권, 나와 같이 되는 특권을 구했었지? 지금 네가 받는 고난은 너의 고난이 아니란다. 그건 내가 받는 나의 고난이란다.”

5.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 고난 즉 괴로움을 기뻐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하는 괴로움과 고난은 복음의 일꾼이자(1:23) 교회의 일꾼으로(1:25) 부름받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때 피할 수 없이 찾아온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는 이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2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이 무어을 의미합니까? 공동번역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서”라고 번역했고, ESV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알게 하기 위하여(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완전히 다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신 그 직분의 목적이고 내용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이 일을 이루겠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 일이 너희에게 이루어진다면 내가 받는 그 어떤 괴로움이라도 나는 기뻐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인 제게는 언제나 큰 도전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남김없이 온전히 다 알게 하는 것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에 붙들린 바 되기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지요.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바울 사도는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서 만이 아니라, 개인교사로서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28절에는 ‘각 사람’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사도가 얼마나 개인적으로도 성도들의 온전한 성숙을 위해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성도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성숙해지도록 노력했고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에게 오는 모든 괴로움을 달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6. 모든 성도가 참여할 고난과 은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그리고 온전히 알게 하는 일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각 사람을 충분히 성숙하게 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가 받는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바울 사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을 충분히 성숙한 사람을 세우는 일,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가는 일은 아무리 능력이 많은 목회자일지라도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말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이제 이미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전해졌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사도와 함께 이 복된 일, 하나님의 백성을 성숙하게 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3:16 상반절을 보지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이것이 사도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사도는 이제 복음을 들은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이 받는 것과 같은 고난--적극적 고난--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구질구질한 자리가 아니라 영광의 자리입니다. 성도들은 바울 사도로부터 복음의 비밀을 듣고 받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나누고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자리 바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세 등등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휘두르고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고난을 받는 자리, 사람들에게 위세를 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아래서 고난을 겪는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추격을 하던 자가 추격을 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를 이 고난 속에서 깊이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적어도 그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의 고백이고 간증이었습니다.

7.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자가 누리는 기쁨(29)
사도 바울이 29절에서 하는 고백을 보지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멋진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 사도의 수고와 고생, 괴로움과 고난이 쉽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수고하노라’는 표현은 ‘맞은 것처럼 피곤함’ 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육신의 힘이 다하는 극한 수고를 일컫는 말입니다. 또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싸우다, 투쟁하다, 경쟁에 참가하다’를 의미하는 말인데, 종종 무기를 가진 전투나 포기할 수 없는 경기에서 마지막 힘까지 다 쏟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바울 사도가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고 한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힘들게 수고했고 땀을 흘렸습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고 핍박했던 사람이 이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다 전하여 알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받는 모든 괴로움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입증하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자리로 나아가셨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일, 경건한 어른으로 자라는 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지스 페르난도는 신약 성경에는 고난과 기쁨이 함께 언급되는 곳이 18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기쁨은 십자가를 가치 있게 만드는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찬송가의 이 가사를 묵상해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참 기쁨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이 기쁨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것은 넘치는 위로가 됩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 구금되어,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교회를 위한 수고는 곧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이고 이것보다 값진 수고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인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랍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위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감사할 것이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신자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심령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합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하는 기쁨을 충만히 주시기를 구합니다. 평생 복음의 얕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