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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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6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7) - 고난과 하나님의 때

시편 105:16-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6-03

말씀내용
고난과 하나님의 때(시 105:16~19)


1. “언제까지입니까?”
고난 가운데서 성도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것은 좋고 즐거울 때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수록 우리는 본능적으로 “언제까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질문은 시편에도 많이 등장할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도 보게 됩니다. 아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930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에덴에서 살았다면 문제는 달랐겠지만, 에덴에서 쫓겨났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서 시작된 인간 죄악의 역사를 특별히 그 후손들에게서 보면서 그는 긴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구원자를 기다리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 약속하신 그 아들을 보내주시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에덴을 경험했기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75세에 아들을 약속 받았고 100세에 그 아들을 얻었으니 그 노년의 25년이 보통 사람의 정상적인 25년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하신 구원자를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끊임없이 질문했을 것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길어야 몇 달이면 될 줄 알았던 외삼촌 라반에게 갔던 여정은 끝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 곤고한 여정이 끝났을 때는 이미 2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뒤였습니다. 야곱은 수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속이는 외삼촌 밑에서 살아야 합니까? 저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모세는 어떻습니까? 애굽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보낸 40년뿐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보낸 마지막 40년을 생각해보십시오. 모세도 시간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기도라고 알려진 유일한 시편인 시편 90편은 특별히 시간에 대한 관점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4절에서 그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젊은 시절에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울 왕으로부터의 도피 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 시편에 많이 나오는 “어느 때까지니이까?”하는 표현들이 다윗에게서 나왔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때’에 대해서 늘 생각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 ‘때’를 위해서 오셨고 그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이자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늘 보좌에 다시 오르시는 대관식의 때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언제까지입니까?”하는 기도는 나만의 특별한 기도는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

2. 신학적 명제
이런 질문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물론이고 어떤 신학적 명제를 전제한 질문입니다. 만일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위기와 고난을 면해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호소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마 10:29; 창 45:5; 행 2:23,36).
그 신앙의 내용, 신학적 명제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란 그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보존과 다스림이며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 단 1분이라도 중단된다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창조 세계는 다 무너지고 말 것이며, 그것은 온 우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일까지 제어합니다. 참새 같은 미물이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10:29). 하물며 우리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모든 자유로운 행동들까지도 간섭합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행동을 자기가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조차도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죄악된 행동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긴 형들의 행위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죄악된 행동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악을 행한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창 45: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 지도자들이나 빌라도는 그들의 악행과 죄악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습니다(행 2:23, 36). 이것이 섭리 신앙입니다.

B. 목적 없는 고난은 없다.
섭리 신앙은 우리의 고난도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두 번째 신학적 명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목적 없는 고난은 없다는 명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없는 고난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을 텐데, 이 고난이 고난의 가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지녔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지니신 선한 목적이 아닐지라도, 인간이 자기 자신이 부여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인간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은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가족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가족들의 죽음을 겪었고, 삶 보다 죽음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완성하고 싶어했던 논문을 구상했고, 후일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통해서 수용소에서의 심리 치료 경험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고 의미에의 의지는 어떤 고난의 조건 속에서도 그에게 생을 향한 의지를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도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보존과 다스림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피조물의 모든 행동을 조정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강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본문이 잘 설명해줍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특별히 요셉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3. 기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16; 욘 2:3).
16절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익숙하게 발견하는 한 표현을 봅니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제가 익숙하다고 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서술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기근이 일어나게 했으며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버렸습니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마귀도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물고기 배속에 들어간 요나는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라고 말했습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욥을 고통스럽게 하고 욥의 뼈와 살을 쳤다고 할지라도 그 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난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 중에서 기억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내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시는 일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일관성 있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 의뢰하는 것이 끊어질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루실까요? 왜 기근을 보내시고 양식을 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는데 이렇게 하시는 것이 꼭 필요했을까요? 꼭 필요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죄성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죄성은 결코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뢰하는 것이 끊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거두어 가실 때 비로소 “아, 내가 그것을 너무나 의지하고 살았구나!”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리로 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리로 간다는 말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물론 기근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백성은 당시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선명하게 발견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손인 야곱의 집안이 살고 있는 땅에 기근을 주셨습니다. 의지하던 것이 끊어졌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는 일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5. 하나님의 타이밍은 오차와 실수가 없다(17a).
본문에서 우리는 시간, 때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를 또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안을 애굽으로 옮기시기 위해서 기근을 주시기 오래 전에, 한 사람을 앞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17). 그것은 기근이 시작되기 20년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물론,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겼던 형들 중 아무도 요셉이 그곳에 살아있을 뿐 아니라,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없이 당신의 타이밍을 따라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6.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신다(벧전 5:6).
여기서 우리는 또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반드시 우리들 자신에게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더디다고 느낍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느낍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시간을 끄시는가,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난과 시간이 연결된 질문입니다. 요셉은 왜 꼭 종으로 팔려가야 했을까요? 요셉은 왜 발이 차꼬에 차이고 몸이 쇠사슬에 매이는 죄수의 신세로 몇 년을 보내야 했을까요? 요셉을 애굽으로 유학을 보내 거기서 학위를 하고 정착을 한 후에 바로에게 발탁되면 안 됩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에 따라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만들어가시기 위해서는 이런 시간과 이런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연히 당신의 자녀들을 고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와 선한 목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 정상의 자리로 높이시기 전에 그를 먼저 낮추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마다 징계하십니다(히 12:6).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히 12:10). 요셉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한없이 높이시기 위해서 먼저 그를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도 부족해서, 그는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무슨 장래의 전망이 있었을까요? 꿈의 사람 요셉이 이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무슨 꿈을 꿀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감옥에 들어갔을 때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창 39:2, 3, 21, 23). 또 요셉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것이 그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요셉이 신앙의 절정에 서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청년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십니다. 요셉은 물론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제가 이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7.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19)!
본문 19절에 그 정확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우리도 고난 중에서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대답은 “말씀이 응할 때까지”가 될 것입니다. 요셉이 17살의 나이에 형들로부터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와 노예 생활로 젊은 날을 다 보내야 했고, 후에는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2년 이상 살아야 했으니,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합해 13년의 세월입니다. 요셉이 감옥으로 간 것은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감옥에 있을 바로 그 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바로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요셉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같은 밤에 이 두 사람이(꿈 해석의 정확성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꿈을 꾸게 하셨고 요셉으로 그것을 해석하게 하심으로써 다시 복권된 술 맡은 관원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요셉은 그 사람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자기의 고난이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 가녀린 희망이 요셉의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소서(창 40:14).” 요셉이 원했던 것은 그저 누명을 벗고 감옥에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야속하게도 복권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습니다(창 40:23). 그렇게 또 2년이 흘렀습니다. 이 2년은 요셉으로 하여금 모든 희망을 다 내려놓아야만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고통의 시간이 더해져야 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요셉이 누명을 벗고 감옥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 아무리 꿈의 사람이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외국인 노예와 죄수로 13년 여를 보낸 요셉으로서는 말입니다. 2년이 지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는데 그것은 애굽의 점술가나 현인들 중 아무도 풀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당연히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2년 전의 요셉을 떠올리게 되었고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때 요셉의 나이가 30이라고 밝힙니다(창 41:46). 여기서 나이가 중요합니까? 칼빈은 요셉이 총리라는 관직에 올라 휘하에 많은 신하를 다스릴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요셉이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갖은 고초를 인내로 견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조금의 오차도 실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13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요셉을 총리직을 감당할만한 겸손한 하나님의 종으로 빚으셨고 또 한편으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기 충분한 나이가 되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셉 프로젝트는 시간적으로나 사건적으로 치밀하고 정교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을 19절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단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13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요셉의 믿음을 당신의 말씀으로 단련하고 연단하셨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8.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자신을 보라(창 45:7~8).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요셉 프로젝트는 사실 더 큰 그림, 메시아 프로젝트의 아주 작은 일부였을 뿐입니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른 뒤에 비로소 요셉은 그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으로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버리시자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에 형들에게 한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앞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이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고 그것은 ‘당신들의 후손’ 가운데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것임을 그는 어렴풋이 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이 고작 자기 자신에게 한정된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요셉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이 지난 뒤에 그것을 깨닫습니다. 왜 그것을 성경이 가르쳐줍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요셉에게 그렇게 했듯이 우리를 단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우리는 고난의 사슬에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 즉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 고난에서 풀려나는 것의 수준에 머물러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 없고 그래서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우리를 보라고 하십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말이 이루어지기까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이 시각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는 것을 넉넉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필연적으로 시련을 수반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죄성을 다루시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불평이나 원망 혹은 한탄으로 여러분의 고난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길을 맡기십시오.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그가 이루실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응할 때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