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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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3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4) -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실 때

욥기 1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5-13

말씀내용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실 때 (욥 13:15)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리실 때, 우리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라고 말하는 욥은 자기에게 이 고난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고 느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올 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하시나?”생각하게 되는데, 이 질문의 뿌리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신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고 내 길을 막으신다면 내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냥 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연단, 시련 혹은 징계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들을 연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연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주는 유혹을 연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은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마귀의 유혹과 시험은 상존하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도 명하셨습니다(마 26:41).
우리가 여기서 고난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마귀가 주는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연단이라는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온전해지고, 깊어지고, 전적인 신뢰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시는 중요한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종속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훈육 목표를 분명하게 알고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은 다 이 목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관점에서 자신이 겪는 고난을 풀어가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이 고난을 초래한 원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신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고난을 인생에서 만나게 될 때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가장 힘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나의 아버지신데, 왜 나를 이런 막다른 절망의 상황에 밀어 넣으시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크게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흔드시고 나를 죽이시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마귀라면 우리는 싸울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낀 사람은 사실 욥만이 아니었습니다.

1. 마지막 지푸라기까지 뽑으시는 하나님(창 32:24~32; 호 12:3)
야곱은 20여 년의 밧단아람 생활을 접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만남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지만, 자기를 죽일 원한을 품었던 형 에서를 마주해야만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분명한 지시를 받고 순종하여 돌아가고 있지만,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지 용서해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강 건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는 야곱은, 소유물과 함께 모든 가족들로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남습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의 씨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더니(창 32:24).”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야곱을 강하게 붙잡아 넘어뜨리려고 했을 때 야곱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야곱은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야곱은 이 싸움을 거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야곱은 날이 밝은 후에 말합니다(창 32:30). 또 야곱은 이 씨름에서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는 말을 듣습니다(창 32:28).
이 유명한 씨름의 본질은 무엇이지요?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야곱은...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호 12:3)”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대적하여 겨루신 씨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씨름은 그저 3분 3회전처럼 간단히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 씨름이 끝났을 때 ‘해가 돋았습니다(창 32:31).’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겨룰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습니까? 이 자체가 아이러니 아닙니까?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한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이 어떻게 씨름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절망적으로 그를 붙잡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힘에 걸 수 있는 모든 기대를 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까지 왔습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와 싸우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야곱이 자기를 의지하여 살아온 모든 힘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걸음 조차 제대로 걷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환경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깨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것을 하신 것입니다.

2. 막연한 기대와 믿음의 차이
종종 우리는 막연한 기대와 믿음을 혼동하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고난 앞에서 이런 일은 자연스럽고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봅니다.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뭔가 좀 새로운 일을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나를 단련하셨으니 이제는 좀 풀리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믿음입니까? 이것이 과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까? 이런 막연한 기대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기대가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이런 기대가 깨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까?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나?”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그것을 잡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막연한 기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이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에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대로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서 아들을 낳고자 했을 때 그가 가졌던 생각이 정확히 이런 막연한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집이 우리의 믿음과 대척점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잡는 모든 지푸라기이며, 막연한 기대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믿음을 대적합니다. 이런 막연한 기대가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막연한 기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남는 것이 쓴 뿌리입니다. 신뢰가 아니라 쓴 뿌리가 남습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씩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에게 속았다는 느낌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려는 시도를 한 후, 무려 13년이나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런 막연한 기대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이런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은 야곱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꺾어 버리시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그가 가진 최후의 막연한 기대까지 뽑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는 달리기는 커녕,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혼자서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지하는, 그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까지 뽑아 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로 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나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대적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연단이라는 고난의 절정입니다.

3. 참된 믿음의 본질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믿음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참된 믿음의 본질은 과연 무엇입니까?

A.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실은,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로와 힘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막연한 기대가 믿음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은 내가 바라고 소망하는 어떤 것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의 약속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 채색된 우리의 막연한 기대는 무너질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 즉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참된 믿음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구체적이거나 시기적으로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바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특별히 연단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위로요, 힘이 됩니다. 약속은 믿음의 최종 근거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일으켜 주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의 가사를 쓴 리나 산델(Lina Sandell)의 고백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 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이 가사는 여러분의 고백입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하십니까?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에 대한 약속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환난과 고통을 능히 견디게 하는 믿음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별개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의 신앙 생활의 이력에 남는 것은 쓴 뿌리 밖에 없습니다.

B. 참된 믿음은 고난 속에서 빛난다.
두 번째로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고난이라는 현실을 대면할 때, 흔들릴지라도 결국에는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고,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 조차 하나도 남지 않는 과정을 경험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헤입니까? 로마서 4장에서 바울 사도는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로마서 4장 18~2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가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아들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지칠 대로 지쳤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뒤였습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는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 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주셨던 때는 24년 전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브라함은 99세이고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았고, 자신에게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가닥 막연한 기대조차 걸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에는 불가능한 현실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의 수가 아직도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막연한 기대의 경우수가 믿음은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분의 약속에 대한 참된 믿음은 전보다 더 악화된 상황 속에서, 전에는 붙잡을 지푸라기라도 몇 개가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 사라진 현실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고 빛나기 시작합니다. 사실 오래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창 15:6). 하지만, 종종 참된 믿음과 막연한 기대가 뒤섞여 있기 쉽고, 참된 믿음이 뚜렷하게 빛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연단의 환경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현실적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때, 참된 믿음은 그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이 19절이 보여주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롬 4:20~21). 물론 여기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도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결국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모든 상황과 현실을 거스릅니다. 기독교가 초현실주의이나 비현실주의 혹은 현실도피를 가르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철저한 현실을 알면서도, 남은 지푸라기들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 신앙입니다. 참된 믿음은 고난 속에서 빛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본질입니다.

C.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어주시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믿음의 본질을 하나 더 언급하겠습니다. 참된 믿음은 단지 우리의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어주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끼는 상황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우리 삶에 일어납니다. 욥이나 야곱 또는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 좀 더 깊이 상고하겠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지 않고 25년을 기다리게 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대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자, 이제 네 믿음으로 견뎌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대적하시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싸우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싸울 힘을 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결국에는 이기게 하십니다. 야곱의 씨름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요, 힘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믿음을 유발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믿어주시는 믿음이 왜 믿음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참된 믿음의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 편에서 노력하고 믿는 믿음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본래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실 때 주신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령께서 당신의 약속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해주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믿음이 네 믿음보다 낫다고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믿음은 은혜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모든 불가능한 현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는 것 같은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승리했고 이 은혜 때문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패배하지 않고 견뎌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모든 고통과 고난 속에서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욥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상황,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런 복된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 터져 나오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