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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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2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3) - 욥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

욥기 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5-06

말씀내용
욥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욥 1:1~12)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을 압니다(시 119:71). 이건 진리이고 정답입니다. 문제는 그 답을 얻어낼 실력이 있는가 입니다. 시험에 비유하면, 인생은 사지선다식 객관식 문제가 아니라 주관식 문제에 가깝습니다. 어쩌다 답만 맞추면 되는게 아니라 답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과정을 무시하고 앵무새처럼 답만 외우는 잘못을 범할 위험도 있지만, 동시에 과정을 중시하다가 답 자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위험도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이라는 미니시리즈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룰 때, 정답과 과정, 과정과 정답 이 두 가지 모두를 상세히 다룰 생각입니다. 성령님께서 제게 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1. 고난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
제가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있는 매우 호화로운 고급 호텔급 양로원들 중 한 곳에서의 일입니다. 이 양로원에 살 수 있는 조건은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한 노인 부부가 방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다가 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하고 고통을 호소하면서 눕더라는 겁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닌가 저자는 묻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멀쩡하고 괜찮아 보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은 남모르는 고난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교회만 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문제나 고통의 상황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거나 약점이 잡히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는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깔려 있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그는 언제나 미소를 띠는 사람이어야 할까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언제나 미소를 띠는 사람을 보면 부담스럽지 않으십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런 사람을 보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십시오. 고난은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까?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초지일관 욥을 몰아세웠던 주장 아닙니까?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생각이 이런 것이라면, 그 누구도 교회에서 자신의 고난과 아픔의 문제를 꺼내놓지 않게 될 것이고, 고난은 더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나쁜 신학은 신자의 고난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

2. 신자가 겪는 다양한 고난들
고난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은 더 복잡합니다. 먼저 고난을 몇 가지로 구별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A. 보편적 고난: 에덴 동산 밖의 인생
먼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아담에게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고 얼굴에는 땀이 흐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3:17~19). 그리고 하와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셔서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남편을 원하지만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3:16). 삶이 고통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부부관계 조차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 자체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질병, 몸의 노쇠함 등이 더해집니다. 이것은 신자, 불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보편적 고난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B. 내 잘못이 초래한 고난(벧전 2:20a)
두 번째는 내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20a).” 이 고난은 내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이기에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을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손가락질과 지탄은 상당 부분 목사들과 교인들의 잘못으로 초래된 것입니다. 이 고난은 칭찬받을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예를 위하여 장차 영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C.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벧전 2:19; 요 15:18~21)
세 번째로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9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것은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주님에게 속한 제자들도 미워합니다(요 15:18~21). 이것은 어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하여 미움을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불경건한 불신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가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상합니다. 소돔에서 살던 롯이 그랬습니다(벧후 2:8). 여기에는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며, 이런 고난을 잘 견디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D.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벧전 2:20b; 딤후 1:8)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0 하반절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을 행하였는데 도리어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더 외로울 것이고, 더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은 고난이 올 때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벧전 3:14a).” 주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하지만, 이 고난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믿음을 타협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피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의도를 가지고 타협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믿음은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거짓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여기서 ‘이를 위하여’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고난이 결코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
이 몇 가지 고난 외에, 성경이 말씀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 있습니다. 욥의 고난입니다.
욥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벗어날 수 없었던 고난에 대한 관점은 바로 율법적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욥의 상처에 고통을 더해주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기의 뒷부분에서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욥이나 그 친구들과 달리, 욥기 1~2장을 통해서 욥에게 고난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과 그의 신앙을 칭찬하셨기 때문에 발생한 고난이었습니다. 사탄의 시기심과 비뚤어진 인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십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닙니다. 사탄은 대답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이유나 까닭 없이, 이기적 목적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없다는 것이 사탄의 말의 요지입니다. 사탄의 신학은 번영신학 그 자체입니다. 다 세상에서 잘 되고 축복 받으려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제안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이 제안을 천박한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기를 거신겁니다. “내가 맞나, 네가 맞나 보자!”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예를 걸고 내기를 거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백성, 내 자녀들의 믿음을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받은 직접적 이유였습니다.
1라운드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 철저하게 망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욥은 하루 아침에 망했습니다. 아마도 지혜로운 사업가였던 욥이 분산투자해 놓았던 모든 재산이 한꺼번에 다 날아갔고, 사랑하는 열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할 때 태풍이 와서 다 죽었습니다. 사탄이 욥의 믿음의 거짓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져온 고통은 잔인하고도 혹독했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고백합니다. 욥기 1:21~22입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라운드는 사탄의 입장에서 볼 때 기막힌 하나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욥은 자기 믿음의 참됨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탄을 건드려 2라운드를 해보겠냐고 도전하십니다. 사탄이 말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4~5).” 소유만 건드려서는 소용없고, 결국 그 사람 자신을 치면 믿음을 배반할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받으십니다.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
이제 진짜 깊고도 오랜 욥의 고난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이기적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과 그 신앙을 칭찬하고 자랑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신앙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욥이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걸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입증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사탄에게 내기를 거셨고, 욥은 그 고난 속에서 범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이야기입니다.
욥의 고난은 어떤 면에서 욥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욥이나 세 친구들이 이 고난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고난입니다. 사탄이 말한 것처럼, 욥의 믿음이 그저 울타리를 쳐서 복 받게 하셨기 때문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버리지 않는 참된 믿음인 것을 믿어주셨고, 허락하신 고난 속에서 욥이 그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을 지키셨고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런 차원의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이해하고 생각한 방식은 율법적 관점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죄와 벌의 인과관계에서 고난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상을 말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찾는 인과율에 종속된 율법적 관점을 넘어서는 고난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뢰를 온전히 드러내는 일과 연결된 고난입니다. 목적이 선명한 고난입니다. 성도에게 목적과 무관한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고난을 결코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됩니다.

4. 번영신학은 사탄의 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하여 주시는 중요한 논점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탄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집과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시기 때문에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까닭 없이 믿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채우려는 이유들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겁니다. “믿음이 밥먹여줘?” 물론 하나님께서 밥먹여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밥먹여주시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을 더럽히는 거짓 복음은 사탄의 관점으로 믿음을 이해합니다. 믿어야 할 까닭, 이기적 이유들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이유들을 제공합니다. 믿어서 문제 해결받고, 빚갚아서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좋아지고, 자식들 학교, 취업 문제 잘 해결되고 등등 입니다. 이걸 해주시기 때문에 믿는다고 사탄은 말합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을리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은 욥을 믿어주셨습니다. 욥의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생기는게 있어서, 애들 잘 되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뭐라고 이유를 댈수도 없지만, 그냥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때로는 까닭을 가지고 믿는 거짓 믿음이 더 뜨겁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건 거짓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 참된 신앙은 어린 신앙의 단계에서는 종종 믿음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때때로 연약해질 때도 있습니다. 욥도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욥기 13:15 상반절을 보지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여기 난외주에 보면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니리”라고 씌여있습니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 갑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는 로마교회가 추구하는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없는 신학이었고, 고난은 더 나은 자리로 상승하는 필요악에 불과한 것이며, 각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점점 더 하나님께로 상승해가는 움직임이 신앙의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난, 십자가, 약함, 어리석음은 다 나쁜 것이고 영광, 강함, 승리만을 선호하고 추구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난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게 되거나, 혹은 이걸 통해서 뭔가를 배웠다는 식으로 고난의 의미를 축소시키게 됩니다. 이 나쁜 신학은 욥의 세 친구가 한것처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영광의 신학은 중세의 번영 신학이었습니다.
번영신학은 무엇입니까? 병에서 치유를 받음으로써, 가난에서 부함으로 옮겨감으로써, 아래서 위로 상승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 신학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질병과 고난까지도 다 감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자가 받을 질병이나 고난은 없다고도 가르칩니다. 이런 나쁜 신학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신학은 결국 사탄이 하나님께 말한 바, “까닭 없이 믿겠는가?”하는 사탄의 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5. 신자에게 헛된 고난은 없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빚어진 고난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든, 신자가 당하는 고난에는 헛된 것이 없습니다. 연약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고난과 약함, 실패와 고통의 의미를 바꾸었습니다. 신자들에게 고난과 약함, 실패와 고통은 더 이상 문제거리로만 인식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편이며, 또한 우리 믿음의 연단을 위한 거룩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풀무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단지 고난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잘 알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때 여기서 믿음이 일합니다.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는 가운데서 아니,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일합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의 유익과 당신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중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맞다면, 만일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과 동일하다면, 여러분은 삶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겁낼 것이 없고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능히 그 고난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