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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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1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2)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이사야 48: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4-29

말씀내용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사 48:1~11)


지난 주일에 시작한 고난에 관한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의 의미를 바르게 배우고 여러분의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을 잘 소화하여 그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백성(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새 일, 너희가 전에 보지 못한 새 일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이 있습니다.

A. 이름 뿐인 백성(1~2)
먼저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이름뿐인 백성이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름이고, 이것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해 일어난 백성의 영예로운 칭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 뿐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도, 특별한 약속을 받았던 유다의 허리에서 나온 소위 ‘성골’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은 그들의 삶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그들은 매주일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1절 하반절에 그들에게는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진실과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2절을 보면, 그들은 스스로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공공연히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위 이름뿐인 신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B. 패역한 백성(3~5)
3~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과 포로됨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예언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3절을 보지요.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부터 미리 말씀하셨고 그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스스로를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요지는, 내가 왜 이렇게 미리 예언을 하는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붙잡혀가실 것을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시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5절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훗날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될 때,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과 신상들로 인하여 혹은 바벨론의 신들이 다 강해서 이런 고난이 생겼다고 말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미리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예언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예언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다른 요인들의 탓으로 돌리거나 재수나 운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존재들입니다.
이토록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4절에서,‘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완고함이 쇠 힘줄 같아서 도무지 꺾이지 않고 그 이마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놋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패역한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수준을 보면, 도저히 구원의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자연인의 영적 상태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롬 3:23) “허물과 죄로 죽어..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엡 2:1,3). 하나님께서 삶의 수준을 보니 구원받을 만하거나 구원을 받고도 남겠다라고 생각해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착각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2. 그 백성의 하나님
이 본문에는 사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서 무지하고 패역한 백성들과 함께, 이들의 마음의 내적 본질을 아시는 하나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A.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6~8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일,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시지 않은 은비한 일을 행하실텐데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패역해서 듣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8절 하반절에서 더 노골적으로 그 백성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아무 구원의 근거도 찾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개전의 정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실하지도 않고 패역한 그 백성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B.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
9~11절이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 때문에 패역하여 그들 안에서 아무런 소망도 발견할 수 없게 된 자기 백성을 심판하셔서 완전히 멸절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내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내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에 있습니다. 11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잘났고, 괜찮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멸절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주어지는 한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연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에 합당한 거룩함과 영광을 자기 백성 안에서 만들어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해석이 어렵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은처럼 연단하셨다면 그들은 남는 것이 찌꺼기이므로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처럼 연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존 오스왈트는 “그들을 연단하는 수단이 은을 연단하는 것 보다는 더 많이 완화된 것이었다.”라고 이해합니다. 살살 하셨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의 풀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이방의 신들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와 명성을 욕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의 풀무를 주시는 이유는 연단하시는 것이며, 이 쓴 경험, 소위 고난을 통하여 그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비극적 경험이나 고난은 그들이 택함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표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하나닝믜 백성이라는 표가 되며, 이 고난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신다는 표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의 풀무는 멸망의 수단이 아니라, 연단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와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3. 고난에 대한 율법적 관점 대(對) 복음적 관점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빠지게 되는 오류가 율법적 관점입니다.
율법적 관점으로 고난을 보는 것은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인과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이게 무슨 죄때문에 온 것인가 생각하거나, 어떤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모든 자연인이 취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이런 방식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을 율법적 관점이라고 하는 이유는, 율법이 바로 그런 인과관계를 온전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 28장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 28:1~4).” 반대로,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이게 율법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인과관계의 구조 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율법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자연적 관점을 뒤집습니다. 복음적 관점으로 고난을 바라보는 것은, 고난의 목적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언제나 영광이라는 장차 누릴 목적에 연결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과 영광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신자의 고난과 신자의 고난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의 고난은 원인이라는 차원에서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고난은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징계와 연단의 성격을 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은 뼛속 깊이 패역한 백성을 형벌로 다루지 않으시고, 당신이 이루실 새 일, 즉 구원에 합당한 백성으로 연단해 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는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령,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징계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7절을 보지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형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은 징계입니다. 아들의 잘못이 징계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형벌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형벌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는 것입니다. 형벌은 원인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징계는 연단과 마찬가지로 목적과 연결됩니다. 10~11절을 보지요.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무엇을 말합니까?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징계와 연단은 목적을 지향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불신자의 고난과 신자의 고난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4.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신” 것이었습니까(사 53:4)?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고난은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지만,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닌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형벌로서의 고난과 죽으심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에 대한 율법의 저주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로마서 3:25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푸는 화목제물로서 드려진 죽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서 ‘화목제물’은 단순히 죄에 대한 속죄, 죄에 대한 배상을 치루는 제물이 아닙니다. 화목제물이 의미하는 것은 죄에 대한 속죄는 물론이거니와 이 죄로 말미암아 일어켜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완전히 푸는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받아야할 율법의 형벌과 저주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다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받아야할 죄의 형벌과 저주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사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모든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심지어 믿는 성도들이 이 땅을 살면서 겪는 고난의 의미까지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더 이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거나 하나님의 진노의 부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형벌과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께서 다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할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써, 모든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부어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조항의 하나라도 범하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축복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바꾸었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되게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의 의미,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은 바로 이 복음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성도들이 고난을 보아야 하는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자기 백성을 만들어가시기 위해서 주시는 연단이 있습니다. 또는 자녀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징계를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징계도 하나님의 합당하고 거룩한 자녀로 길러 가시는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즉, 목적이 선명한 고난입니다. 성도에게 목적과 무관한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고난을 결코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 무용한 고난이 되지 않습니다.

5. 성도의 고난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고난이 어떤 원인으로부터 왔든지 간에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이 땅에서 겪는 어떤 고난도 낭비되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겪는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 자신의 목적이 한 방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합당하게 돌리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