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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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0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 (1). 풀무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다니엘 3:1~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4-22

말씀내용
1.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본문에 기록된 멋진 신앙의 이야기는 교회의 어린 아이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알려진 주인공들은 망국의 슬픈 역사를 뒤로 하고 어린 시절,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의 수도로 끌려와 바벨론의 세계화 정책의 열매로 길러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을 드러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이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인정을 받아, 다니엘은 바벨론 전체를 다스리는 지도자로, 세 친구는 바벨론의 지방을 다스리는 지도자들로 세워집니다(12).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본문에서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높이 27미터, 너비 2.7미터의 거대한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낙성식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 제국 내의 모든 귀족과 지방 방백들을 다 불러 모아 일제히 금신상 앞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낙성식의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방 방백인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바, 다니엘의 소재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진노한 왕은 설득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세 젊은이는 왕에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16~18절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결국 세 젊은이는 왕의 명대로, 7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쓰레기 소각장의 온도가 섭씨 800도이고 화장터의 화장로는 800~1000도라고 하는데, 당시 바벨론의 풀무는 보통 1000도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 용도는 철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벨론의 신을 모독한 자들을 태워죽이는 용도 였다고도 알려집니다. 어쨌든 세 젊은이가 불 속에 들어간 뒤에, 그 안을 지켜보던 느부갓네살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잡히게 됩니다. 25절입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은 풀무 속에서 셋이 아닌 네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네 사람은 결박되지 않은 채 걸어다니고 있었고 또한 상하지도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아 보였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은 풀무 입구로 가서 불 속의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느부갓네살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가 세운 거대한 금신상과 비교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지 않도록 바벨론 제국에 조서를 내렸으며, 이 세 사람을 더욱 높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2. 이야기의 핵심은 ‘풀무에서 나왔다’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것은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불 속에서라도 건져 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전보다 높이시고 하나님의 이름도 존귀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교회 역사 속에서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어 죽은 순교자들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 세 젊은이를 구해주신 것처럼, 멋지게 그들을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이것은 그들이 가진 믿음의 문제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에게 하는 말(17~18)에서 시작해보지요. 왜냐하면 이 말이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확신했지만(17)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고 확신했습니다. 17절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말대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물론 바벨론 제국의 신처럼 군림했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이런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확신하지 못했다(18a).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18절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들을 풀무와 환난에서 건져내시는 것인지, 아니면 풀무를 통해서 데려가시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불분명했지만, 그들에게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뜻은 분명했고 그것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완전한 자유를 가지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는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풀무불을 결박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행하실 자유와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시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세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원한대로, 우리가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죠프 토머스(Geoff Thomas)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와는 다른 가능성에 직면한다. 즉 ‘비록 그가 우리를 구원하지 아니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다. 상실의 시기에도 그리스도를 섬기고 고독할 때도 그리스도를 섬기고 죽는 순간에도 그리스도를 섬길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 꼭 결혼할 필요도 없다. 꼭 부모가 될 필요도 없다. 꼭 살아야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멋있지만 무서운 말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조금 정리해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고난을 받을 때, 모든 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극적으로 구해 주시겠다고 보장해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듯이, 풀무불에서 아무 상함도 없이 건짐을 받았고 높임을 받았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3. 풀무 속으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
이야기의 핵심으로 접근하려면,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보았던 바, 풀무불 속에서 세 친구와 함께 있었던 네 번째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했던 분 말입니다. 이 존재는 천사라기 보다, 성육신 하기 전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존 골딩게이는 이야기의 핵심을 이렇게 잘 표현했습니다. “세 친구는 불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불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의 운명이 되는 복과 성공의 삶은 대가 없이 위험이 전혀 없는 승리의 방식으로 다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다다랐다. 그들의 구원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네 번째 사람의 임재를 통해서 왔다. 그분은 스스로 불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핵심입니다.
또 데일 랄프 데이비스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풀무불에서 꺼내 주시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을 찾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항상 보호해 주시지는 않지만, 넷째 사람은 고독과 배신과 상실의 순간에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물과 불과 강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사 43:2~3). 넷째 사람은 항상 자기 백성을 찾으실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좀 정리해볼까요? 우리는 제1계명을 잘 압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지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진리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핵심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풀무 속으로 들어오셨다.
둘째, 믿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것은 목숨보다 귀하다.

4. 인생의 목적이 바뀌면 고통의 해석도 달라진다.
혹시 이런 해석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십니까? “그냥 풀무에서 구해주신다는 이야기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만일, 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들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시 이야기의 핵심으로 가지요.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각색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불 속에서 함께 하시는 것 보다 불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불에서 나온 사람은 세 사람이었습니다. 아예 목숨을 잃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더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과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세 젊은이들처럼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죽음의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리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이것은 불 속에서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조차 이기는 신앙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런 방식의 설명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를 설명드리지요. 우리가 조금만 정직해질 수 있다면, 그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고난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로 고난은 두려운 것입니다.
이제 하나 묻지요. 멋진 삶, 행복한 삶, 여러분이 원하는 삶은 가능한 고난을 피하고 고생 안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입니까? 물론 노골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생각에 머물러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 『고통에 답하다』에서 예리한 지적을 합니다. “삶의 목적에 따라 고통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는 인류사에서 전통적으로 고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왔고 고난이 삶에 큰 유익을 주는 통로로 여겨져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현대 서구 세계가 비종교화, 세속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고난으로부터 의미나 목적을 제거시켰고, “왜?”라는 질문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었으며, 고난은 아무 의미도 없는 ‘불행’이라는 이름의 딸꾹질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서구인들은 삶의 의미를 쾌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데만 두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미와 목적을 삶에서 밀어내고, 가장 만족스럽고 성취감을 준다고 믿는 바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만일 삶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만 있다면, 고난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할 애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현대 서구인들만의 의식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생각을 상당히 지배하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된 배경입니다. 그는 C.S.루이스를 인용합니다. “옛 현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현실에 맞추느냐가 중요한 문제였으며 지식과 자기훈련, 덕성에서 답을 찾았다. 현대인들에게는 …… 어떻게 현실을 다스려 인간의 욕구에 맞추느냐가 핵심 과제이며, 해결책은 테크닉이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욕구’가 아닙니까? 켈러는 그래서 서구사회의 지상 목표는 고난을 막는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적이 공감되십니까?
고난은 그저 성가신 것이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한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이 생각은 성경과 일치합니까? 성경이 우리 인생과 고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멋진 인생은 어떻게든 고난과 고통을 피하고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오늘 본문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여러분의 기분을 거스리고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신종 유사 복음이 번영신학과 기복신앙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 진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우리가 배운 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이 그것을 다룹니다. “사람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이런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인생에 어떤 고난이나 고통, 혹은 고생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하고 멋지며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5. 인생 공식을 수정하라.
“어떻게 하면 고생 안하고 살까?”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나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은연 중에 갖고 계시다면, 이것은 수정되어야만 합니다. 이 전제, 이런 인생 공식을 가지고 산다면, 거기에 주어질 하나님의 답은 없습니다. 이 전제, 이 공식에서 기독교 신앙은 허울이나 관념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 공식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에게 관념입니까, 실재입니까? 그저 배운 지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진짜 인생 공식이고 목적입니까? 이 질문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특별히 고난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이 중요한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공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최대한 고생은 피하고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행복을 극대화하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전자의 공식과 전제를 갖고 살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바로 그것을 수정하십시오. 그런 인생 공식으로 여러분은 결코 진짜 멋지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 결국은 비참함일 뿐입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닮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 그리고 그 교훈의 핵심은 여러분에게 부담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가슴 떨리는 각오와 기대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이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6. 현재로 뚫고 들어오는 천국
본문에 기록된 이야기의 핵심은 “풀무에서 나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풀무 속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찾아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이 우리 고통의 풀무 속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 438장)

영광의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고통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현대인들이 바라는대로, 고통은 피하고 욕구는 충족시키는 삶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존 골딩게이의 말입니다.“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 따른 것이지 그 이전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경험은 풀무 속에서지 풀무로부터 보존되는 것에 있지 않다.”
데일 랄프 데이비스도 말합니다. “넷째 사람은 고독과 배신과 상실의 순간에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물과 불과 강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 넷째 사람은 항상 자기 백성을 찾으실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편안함의 때보다는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은혜를 놀랍게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정말 두렵고 부담되는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어떻게든 피해야할 대상이거나 두려움이 대상이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설교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며칠 전 새벽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프로포즈를 하시는 겁니다. “나와 결혼해주겠니? 나와 함께 가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내가 그 모든 자리에서 너를 떠나지 않고 너와 언제나 함께 있을거란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갈 수 있고, 주님께서 저를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계신다면, 제게는 영광입니다. 어느 곳으로 가든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