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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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45 -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는 신앙 (6) - 고난 속에서 배우는 눈먼 순종

창세기 22: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5-27

말씀내용
고난 속에서 배우는 눈먼 순종 (창 22:1~12)



1.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 힘들다!
고난이 혼란스럽고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난 그 자체도 힘들지만,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고통은 더욱 가중됩니다. 또 고난의 상황에서 앞이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것이 답인지를 모를 때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이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상황에 적용해 보지요.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채 몇 날 며칠을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고난이나 시련의 상황에서 우리가 어쩔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우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을 통해서 뭔가를 의도하셨고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의 의도와 의미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면 조금은 더 낫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런 가정에 분명하게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나하면 여전히 아들을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유효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고난의 이유를 안다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정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알면 상황이 달라지고 좀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고난의 의미를 미리 다 알게 하시지 않는데는 이런 이유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어쨋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신자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우리는 고난 속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더 힘들다고 느끼는 것도 분명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될 때 우리의 선택지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또 하나의 주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그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할 수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 처해진 상황은 매우 독특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서로 충돌되는 상황이기에 독특한 것입니다. 또 이 상황은 매우 극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A. 약속을 붙잡고 명령을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지는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이삭 안에서 확고하게 세워진다는 약속을 저는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제가 받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삭에게서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태도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매우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결정이고 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믿음을 부인하는 태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약속을 붙잡는다는 차원에서 믿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본질인 약속을 붙잡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두 번째 본질인 순종에 역행하는 일이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은 이해가 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이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을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가질 수 있는 막연한 기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실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 됩니까? 아니면 아들 이삭 대신 양을 한 열 두 마리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가면 될까요? 이런 것은 여기서 아예 논의할 가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그 인생의 세월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진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B. 약속과 명령을 조화시켜 둘 다 잡는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지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보기에는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자기 머릿속에서 조화시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약속과 명령 둘 중에 하나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상호 충돌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조화를 시킬 수가 없기에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약속과 명령 둘 다를 잡으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언제나 우리 머리로 이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과 명령을 머릿속에서 조화시켜 보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순종의 전제는 아닙니다. 이해가 되어야 순종하겠다는 것은 죄인 안에 있는 고질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 선택지는 설명할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반응하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하나님이 하시는게 다 그렇지,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3. 눈먼 믿음이 가져오는 눈먼 순종(출 14:13~18)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우선권을 두고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았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을 둘 다 잡으려고 생각했다면 결국 그는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분명히 알고 있는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음으로써,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첫 번째 본질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고, 믿음의 두 번째 본질은 순종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칼빈은 이 본문에서, ‘눈먼 믿음’과 ‘눈먼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칼빈이 ‘눈먼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불합리한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을 칭송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런 용어로 강조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위대하다’(great 혹은 the greatest)는 단어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이 단어가 적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 자신의 판단과 사고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주시는지를 내가 이해해야만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만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과대망상인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쓰지 않았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힐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슷한 수준의 위대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법으로 일하시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순종할 뿐이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실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셔야만 할 어떤 의무도 없으십니다. 이런 태도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칼빈은 ‘눈먼 믿음’과 ‘눈먼 순종’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떨까 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사색하는 것 조차도 사실은 거만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나서 애굽의 바로 왕은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해왔습니다. 뒤에는 무장한 바로의 군대가 무력한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 듯이 추격해왔고, 앞에는 홍해가 도도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한 상황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면초가입니다. 그들의 머릿속 계산으로는 살 길이 도무지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정당하다고까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결과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대개 불평하고 원망할 때, 당사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믿음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모세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알았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모세는 순종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출 14:15~18).” 모세는 이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인지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비록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분명한 구원의 길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자기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이렇게 믿음으로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어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경건한 어른 모세는 말합니다. 이제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르짖는 백성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눈먼 순종은 눈먼 믿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가 이해할 수 없고, 길이 없다고 자기 머릿속으로 생각되는 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맡기고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의 심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 심연에 삼킴을 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눈먼 믿음이 가져오는 눈먼 순종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심과 섭리에 대한 믿음
여기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위로가 되는 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입니다. 칼빈에게 섭리 교리는 큰 위로였고 그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왜 칼빈에게만 그러했겠습니까? 역사 속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섭리 교리 속에서 풍성하고도 놀라운 위로를 얻었습니다. 물론 믿는 우리에게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섭리 교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결국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신뢰는 섭리의 교리와 연결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와 사건들의 모든 것을 하나도 예외 없이 섭리하시고 당신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도하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믿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나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아브라함의 믿음도 이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섭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상황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것을 분명 선하게 진행하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자원해서 장님이 됩시다. 즉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고 판단하려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처럼 그렇게 총명한 사람들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것을 그분께로부터 강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도 칼빈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우리 자신을 인도해주시기를 구하고 또 그 길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순종하여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돕기 위해 마련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전능하신 능력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아무리 힘든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 눈먼 순종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길과 의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 자신을 쳐서 그분께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어떤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취하소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가?”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피해가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우리가 연단을 받을 때 그 연단의 깊은 고통과 쓰라림을 제거해 주거나 경감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연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주실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분명히 욥의 이야기인데, 그 욥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욥과 같이 대하시고, 욥의 믿음을 인정해 주심과 같이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믿음은 모두가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6. 신자는 고난을 통해서 눈먼 순종을 배운다.
이렇게 신자는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연단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연단의) 때에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미소 가운데 인내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물은 순종의 제사가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본문에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의 풀무 속에서도 자신들을 향해서 웃으시는 하나님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미소를 말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비록 많은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눈먼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미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눈먼 믿음과 눈먼 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미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무리 깊은 심연의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넉넉히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마주하게 될 고난은 적지 않습니다. 단순한 반대와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낄 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의 약속과 충돌된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 이중적 태도를 가지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배웁니다.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붙잡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눈먼 순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이런 싸움, 이런 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먼 믿음과 눈먼 순종으로 이 길을 끝까지 주의 도우심과 은혜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이 길의 끝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 있으며, 심지어 내가 걸어온 길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황금길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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