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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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9 - 기도하는 신앙 (16) -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도

이사야 55: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4-15

말씀내용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도(사 55:6)


우리는 오늘 16번째로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으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우리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는 안과 밖으로 수없이 많습니다. 기도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거나,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 길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교회당이나 어떤 장소로 가야만 하는게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은혜와 영광이 큰 만큼, 기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도 많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죄성이나 사탄의 영적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저절로 되지 않고,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며, 여기에는 영적 분별도 요구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것은 선지자가 선고한 심판의 곤고한 날이 찾아올 때, 기억하라고 그 백성에게 주신, 자비로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1~3절은 이 명령의 은혜로운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이 본문으로 시작해서 우리는 기도의 장애물들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1. 장애물1: 우상(사 55:2)
기도의 첫번째 장애물은 우상입니다. 우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오라고 부르십니다. 목이 마르면 됩니다. 목마름을 느끼지 않거나 다른 대체물로 목을 축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물로 나아오라’는 초청을 달갑게 여길 리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에 에덴 밖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목이 마른 인생을 면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합니다.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연회의 풍성함과 만족감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으심으로 대가를 다 지불하셨기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다만, 그들은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얻기 위해 은을 달아 주거나 수고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우상의 기만적 속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잠언 20:17은 이렇게 말합니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이런 것이 ‘양식이 아닌 것’이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요 6:32~35).
하나님의 자비한 명령은 모든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지만, 많은 사람은 기만하는 우상에게 속아, 양식이 아닌, 배부르게도 못할 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3).” 여기서 강조는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들으면 삽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적 배부름과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신 8:3).
그러나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이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끼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것을 주십시오. 이것을 이번에는 꼭 이루어야만 제가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기만성입니다. 그것은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어서 불행하지 않고, 그것을 얻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만날 때,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우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로 하나님을 만날 때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우상을 구했던 기도는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첫번째 장애물,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2. 장애물2: 자기 길, 자기 생각(사 55:7)
본문 7절은 기도의 두번째 장애물을 보여주는데, 첫번째 장애물인 우상과 유사합니다. 그것은 ‘자기 길과 자기 생각’입니다. 7절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그의 길’과 ‘그의 생각’을 버리고 나아와야 합니다. 자기가 추구하던 방향과 목적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오는 것이, 참된 회개의 특징입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뜻, 자기 생각이 가득한 채, 그것을 이루겠다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나의 가치 판단, 주관,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자기 판단이 옳으며, 자기가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상고한 로마서 11장의 송영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논 상대이거나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하고 무한 불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그의 말씀은 항상 참됩니다. “하나님, 제 생각과 고집, 주장과 가치를 주의 말씀으로 다 고쳐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여러분이 옳고,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는 한, 여러분은 결코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두번째 기도의 장애물은 ‘자기 길과 자기 생각’입니다.

3. 장애물3: 마음 없는 삶과 기도(사 58:2)
이사야서를 조금 더 읽어보면, 우리는 58장에서 특이한 대목을 만납니다. 2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이 구절만 떼어서 읽으면 참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의 위선을 꼬집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주의적 경건으로 치장된 삶은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기도에는 마음도, 진심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29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15:7~9).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마음 없는 말로, 외양적 경건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기도와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참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기도는 참된 믿음을 드러내는 주된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믿음, 우리 중심에 있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는 말이나 외적 경건에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습관화되고 익숙해지는 것은 이점에서 정말 위험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적 삶일 뿐입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은 없습니다. 모양은 있으나 진심이 없는 것입니다.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 담은 애정이 기도로 표출되지 않으면 성품이 변해서 그리스도처럼 자라 가는 역사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대단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만 문제가 아닙니다. 외식한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더라도, 기도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애정이 실리지 않는다면,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중보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전투적으로 그리고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렇게 수년을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적어도 여기에 가능한 하나의 답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리고 선교를 위해 기도했지만, 정작 주님 자신에 대한 애정이 없는 기도였을지 모릅니다. 위선은 아니었을지라도,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응답을 얻어낸다는 생각보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애정,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을 얼마나 담고 있습니까? 마음이 없는 삶과 기도는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사귐의 기도가 아니라 단지 공급과 주문의 관계로 설정된 기도를 통해서는 기도자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매일, 매순간,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을 닮기를 정말 원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4. 장애물4: 게으름
네번째 기도의 장애물은 게으름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존 오웬이 쓴 성령론을 읽다가 매우 인상적인 주장을 하나 발견했었습니다. 그는 성화의 가장 큰 대적은 특정한 죄가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자로서 존 오웬이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을 분석하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기도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피곤함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기도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때조차도, 여러분은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그 은혜를 저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웬은 참된 신자들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본분에 열심을 내면 영광의 서광은 우리 영혼에 보다 자주 비춰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까? 오웬은 말하기를, “나태한 영혼은 모세가 구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게으름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도를 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기쁨과 달콤함을 맛보고 경험하는 것보다 기도를 방해하는 게으름과 피곤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자가 가지는 공통의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5. 장애물5: 분주함
다섯번째로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기도의 장애물은 분주함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기도와 분주함에 대해서 한 유명한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겁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분주한 날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평소보다 1시간을 더 기도해야겠다.” 그는 기도에 대해서 역설적으로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빠서 기도할 시간,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목사가 많은 교회 일, 설교와 강의 준비, 심방 일정 때문에 정작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고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를 보냅니다. 이게 가능하고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에 사막의 교부들은 “분주함은 도덕적 게으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게으름이란 말이겠지요.
케빈 드영은 『미친듯이 바쁜』이란 그의 책에서 바쁨이 초래하는 세 가지 위험을 경고합니다. 첫째로 바쁨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기쁨을 빼앗아가고 대신 불안, 분노, 조급함, 짜증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둘째로 바쁨은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서 영혼이 소진되게 합니다. 수련회나 컨퍼런스가 도움이 되는 이유는 정말 말씀이 좋아서 일 수도 있지만, 바쁘고 분주한 일상에서 해방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셋째로 바쁨은 우리 영혼의 부패를 감추게 합니다. 그가 목사일지라도, 바쁜 것이 신실하고 열매 맺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쁨은 자신이 가진 영적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영적 붕괴를 초래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분주하고 바쁜 것은 결코 우리의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한편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방편입니다. 전능자께서 지혜를 주시고, 도울 자를 보내주시며,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마음에 평안과 여유를 주심으로 일을 더 잘 감당하도록 도우십니다. 또는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야근이 일상이 될 만큼 복잡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여러분 스스로가 분주한 상황을 만들지는 마십시오. 하고 싶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한 뒤에 기도할 틈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분주한 삶에서는 기도할 틈을 결코 얻지 못합니다. 기도를 위해 따로 시간을 떼어두어야 합니다.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구별하십시오. 이 중요한 일을 언제나 먼저 행하십시오. 이 말씀을 듣고 오늘이 가기 전에, 혹은 코이노니아 모임에서 이 구별된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그것을 지체들에게 공개하십시오. 서로는 판단자가 아니라 지지자가 되어 서로를 점검해주고 격려해 주십시오. 케빈 드영은 그 책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정말 잘못된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필요한 만큼 가깝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바 이상의 미친 듯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분주함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6. 장애물6: 불화(엡 4:25~27; 벧전 3:7)
여섯번째 기도의 장애물은 불화입니다. 형제들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기도가 막힙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5?27; 참고, 마 5:23~24).”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그 관계가 기도에 장애물이 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신자가 갑질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그가 착한 양심에 바른 신앙을 가진 정상적 신자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도가 막혀야 정상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 형제인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이웃이나 형제와 불화하는 문제는 마귀에게 내 안에 들어오라고 틈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기도를 위해서라도, 여러분은 화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 같이 가까운 관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경험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부부들에게 권면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베드로 사도가 부부관계 특별히 남편들이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에서 쉽게 화를 내거나 불화하는 씨를 두지 말아야 합니까? 자신의 기도를 위해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분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누구든지 나에 대한 노여움을 안고 잠자리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이며, 우리의 영적 삶에 큰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7. 장애물7: 환경적 요소
일곱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룰 기도의 장애물은 환경적 요소인 시공간입니다. 이런 물리적 영역에서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합니다.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주거 공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하고, 사무실이나 일터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홀로 산책을 하며 기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퇴근하면서 교회당에 들러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물론 집에서 가깝고 개방된 교회당을 정하시면 됩니다. 또는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승용차를 사용하신다면,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터에 도착해서 주차를 한 뒤에 차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차 안의 공간은 최고의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황에서 가능하고 다양한 창의적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8. 바로 지금 시작하십시오!
기도의 장애물을 세세히 나열하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가지는 엄청난 축복은 다양하고도 많은 장애물들을 통해 입증이 됩니다. 장애물들 때문에 기도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오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는 언제입니까? “(그가) 가까이 계실 때”는 언제입니까?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에 썼듯이,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언제라도 이 말씀을 철회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십니다. 지금 때가 열려 있다고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만일, 지금이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이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라면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인생 최대의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아는 것은, 여러분 인생에 기도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무엇도,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지금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