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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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8 - 기도하는 신앙 (15)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로마서 11:33-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4-08

말씀내용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롬 11:33~36)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한 성도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지나치면서 잠깐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책,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의 앞 부분을 읽어보시라고 했지만, 이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설명이 필요한 주제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 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도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지나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1. 송영(頌榮, doxology)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본문 중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의 교리를 로마서 1:16부터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지혜와 지식이 드러난 구원의 교리를 적어내려가던 그는 드디어 그 놀라운 계시의 비밀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입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복음의 계시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계획과 방법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깨달아야, 알아야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리를 배우는 것도 궁극적으로 이 목적을 위함입니다. 우리도 교리를 배울수록 이렇게 가슴에서 찬송이 터져나와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아는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송영이라고 합니다. ‘송영’은 영어로는 doxology입니다. 헬라어에서 영광을 의미하는 단어 독사(doxa)와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인데, 영광에 관한 말씀 혹은 영광론이라고 할 수 있고, 영광에 대한 노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부르는 첫 찬송을 그냥 찬송이라고 하지 않고 송영이라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송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 부요함이 깊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기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라는 부분은,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부요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무궁하심과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읽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의 지혜와 전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어떤 존재가 계획하고 이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의 무한 광대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지식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비하시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4,35절에서 각각 부정적 답변을 유도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아무도 주의 마음을 다 알 자는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어떤 충고도 드릴 수 없고 의논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주께 먼저 무언가를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으셔야 할 의무를 지게 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거지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보탬도, 유익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무언가를 가졌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경의를 표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없는 존재요, 하나님께 유익이 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 사도는 찬송의 형태로 답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 최상의 목적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무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만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영광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으리로다 아멘.”
이 마지막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중심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천지창조의 최상의(Highest), 궁극적(Ultimate) 목적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어떤 목적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를 명확한 진술로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당 물어야 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도, 우리의 존재 목적도 다 여기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을 좀 빌려오겠습니다. 목적에는 최상의(chief 또는 highest) 목적이 있고 궁극적(ultimate) 목적이 있습니다. 최상의 목적은 보다 낮은 하위의(inferior) 목적에 대해 그보다 높은 목적이란 뜻이고, 궁극적 목적은 보다 종속적인(subordinate) 목적에 대한 목적이란 뜻입니다.
가령, 약을 사려고 약국에 가는 것이 종속적인 목적이라면, 건강을 얻으려는 것은 약을 사러 가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최상의 목적’은 다른 모든 목적들과 비교할 때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 다른 목적보다도 더 나은 목적을 의미합니다. 가령 여행을 하는 한 가지 목적은 사업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할 때, 둘 다 여행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 가지가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할 때 그것이 최상의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최상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답을 해보겠습니다.
천지창조의 최상의(그 어느 목적과도 비교할 때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궁극적(다른 모든 목적을 종속적 목적으로 만들 만큼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높은 목적은 없고, 이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은 없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최상의 목적도, 궁극적 목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최상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우리는 이제 한 단어, 영광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을 의미하는 단어는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영광은 무거움을 뜻하고 가벼움은 쓸모없음, 가치없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다니엘 5장에 벨사살 왕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벨사살이 주연을 베풀 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알 수 없는 글씨를 썼는데, 다니엘이 풀어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아람어였는데, 데겔이라는 단어는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저울에 달아보니 가벼웠다’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가치없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람이 가진 내적이며 고유한 성질, 성격에도 적용이 되는데 이때의 의미는 ‘탁월함, 존귀함, 또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인격과 관련하여 크기나 아름다움, 혹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탁월함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내적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적 영광은 밖으로 발산되고 드러나고 전달되는 성향을 가지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른 존재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 지식이나 느낌도 역시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광은 본성상 밖으로 드러나고 알려지고 전달되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하나님께서 본유적으로 가지고 계시는)과 충만함이 외적으로 발현되고 표현되는 외적 영광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외적 영광을 구별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A. 하나님의 내적 영광: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 무한한 덕과 거룩, 무한한 기쁨과 행복
하나님의 내적 영광이란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그 자체로 아무 부족함이나 결함이나 한계나 그 어떤 부정적인 요소도 가지지 않는 무한하고 완벽하며 충만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최상급의 단어 형태들을 나열합니다. 가령,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 2:7),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19)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사실,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무한광대하신 하나님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그 자체로 아무런 부족함이나 결함이나 한계나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무한하고 완벽하며 충만한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 무한한 덕과 거룩, 그리고 무한한 기쁨과 행복으로 구성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 8:30~31는 창조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기뻐하셨다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곁에서 창조주로서 항상 성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관계,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관계입니다. 다소 어려운 표현입니다마는, 이 관계 속에서 성령 하나님, 사랑의 영으로서 영원히 나오십니다. 어느 시점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아시는 지식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아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아시는 무한하고 완벽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에 대한 지식으로도 즐거우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아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무한히 영원토록 즐거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토록 어떤 부족함도, 한계도 없으셨고 완전한 행복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아무 것도 더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피조물에게 계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의 행복에 들어올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지위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감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이 송영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외적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B. 하나님의 외적 영광: 내적 영광을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이 이성적으로 창조된 존재에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외적 영광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i. 알려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인간에게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무한히 가치있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행복이 최고의 행복임을 아시며 그 행복을 인간에게 주려고 하십니다. 비록 정도는 무한하게 차이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시는 지식과 동일한 성질의 지식입니다. 마치 태양이 발산한 빛이 어떤 한 구석을 비출 때, 그 빛이 부분적일지라도 태양 자체의 빛과 영광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알려지심으로써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완전하십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인격이나 사물은 없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선하심 때문이고, 은혜의 부요하심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이런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합 2:14).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알리시기를 원하시면 그렇게 역사의 마지막에 그 일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신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ii. 사랑받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필경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피조물의 사랑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억지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알수록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진가를 인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쉽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백은 단순히 노래에서 오는 어떤 느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가면을 벗은 사람의 모습을 우리가 알게 될수록 그를 사랑하기는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하고 충만하신 측량할 수 없고 영원하며 무한하신 아름다움의 풍성함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하나님은 최고의 덕, 최고의 거룩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사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이와 함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관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iii. 기쁨의 대상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는 바르고 합당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자비로운 은혜의 부요하심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죄인이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요 17:22) 주 예수 그리스도, 복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사셨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행복을 확산하시려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로우신 은혜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알려지시고, 사랑을 받으시고, 기뻐함을 받으셔서, 피조물인 인간을 행복하게 하심과 동시에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 기도?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하는 행복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행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연합은 부부 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면 그 연합은 깊어지고 누림도 풍성해집니다. 행복이 완전해질 때 연합도 완전해집니다.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연합을 이루시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심이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뜻이었으며, 아버지의 소원이 자신의 소원이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1~24).”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합이 완전하듯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도 완전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영원히 증가함에 따라 하나님과의 연합도 점점 더 완전해질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피조물인 성도의 행복은 무한히 진전될 것이고 하나님께 무한히 가까워지며 연합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 연합의 행복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행복을 얼마나 어떻게 누리고 사십니까? 하나님을 알고, 알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분을 기뻐하는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인생의 최고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의 인생에 생명을 내어놓을 만큼 최고로 소중한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맞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여기서 기도라는 우리의 주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기뻐하기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리입니다. 기도는 의무이기 전에, 기도는 종교적 행위이기 전에, 기도는 기쁨이고 행복이며 그 자체가 영광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에서 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알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가장 행복한 길이고 시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기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십시오.
그 지식을 통하여 그 분을 더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을 가장 즐거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가장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기를 기뻐하시고, 당신을 사랑할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당신을 즐거워하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