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신앙과 성숙 37 - 기도하는 신앙 (14) - 부흥을 위한 기도

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37 - 기도하는 신앙 (14) - 부흥을 위한 기도

출애굽기 33: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4-01

말씀내용
부흥을 구하는 기도 (출 33:1~11)


부활주일 메시지를 특별히 준비할까 하다가, 기도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와 관련해서 다루는 ‘부흥’이라는 주제는 부활절에 적절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였듯이,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비참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죄사함의 능력과 은혜도, 종말에 주님의 재림을 믿을 모든 근거를 잃고 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우리는 범사에 소망을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절망을 맞닥드리면서도 우리는 소망으로 충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에 좌우되지 않을 힘을 가질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잠시 맡은 배역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할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면서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범사에 소망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맞는 부활절에만이 아니라,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며, 매일 매순간 부활에 소망을 둔 성도답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다는 것(1~3)
본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내가 천사를 보내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게는 해주마. 그러나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 너희의 죄악됨과 패역함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도중에 다 진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본문의 배경은 앞장에 기록된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받고, 성막 설계의 말씀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생각보다 더디자,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출 32:1). 아론은 백성의 요구대로, 그들이 가져온 금 장식들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게 되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백성은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열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의 첫번째 대배교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시면서,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큰 나라를 새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출 32:10).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백성을 중보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자 레위인들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출 32:26). 모세는 그 레위인들에게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고 명합니다(출 32:27). 이것은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날에, 백성 중 3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의 칼에 죽임을 당한 이들은 형제와 친구, 이웃들이었습니다.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마는, 죽임을 당한 이들은 십중 팔구 이 죄악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으나 여전히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이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무서운 일이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천사를 보내 가나안에 들여가게 하시겠지만 당신 자신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준엄한 말씀을 들은 백성은 슬퍼하고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으니 잘 됐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저를 생각하사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보여주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본문 7~11절은 모세의 기도의 습관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후부터 모세가 취하던 습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장막을 치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 장막을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 하여 ‘회막’이라 불렀습니다. 이 회막은 세워질 성막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가 회막을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7).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진영의 중앙에 세울 것을 명하시고 거기에 임재하실 때까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님을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회막을 진 밖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들에 대한 어떤 오해나 착각도 불식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제 12절 이하에 모세의 기도를 소개하기 위한 배경 설명입니다.
7절 하반절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는 말씀을 봅니다. 이들은 성공을 원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모세 외에도, 하나님을 앙모하는 경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러 회막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그 회막에 구름 기둥이 내리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모세와 만나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던 백성들은 다 일어나 장막문에 서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친밀히 만나는 모습을 11절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묘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놀랍게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합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앙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 뿐 아니라, 여호수아 그리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 없는 성공이 저주요, 심판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성공이 저주요, 심판임을 압니다. 하나님의 부재 보다 무서운 상황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압니다.

2. 우상숭배와 번영신학(출 32:1~6)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먼저 이 위기를 초래한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요구했고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능력의 팔로 건져내셨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셨으며 시내산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인도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제 모세가 자기들의 눈 앞에서 사라졌으니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송아지를 두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공, 즉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지는 않습니까? 여기에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이들의 태도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을 더럽히는 번영신학의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부와 건강이라는 이 세상의 증거들로 증명되고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신이 필요합니다. 그 신은 자기들이 기도와 선물로 조종할 수 있는 신입니다. 이런 번영신학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사건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탐심을 충족하려는 우상숭배입니다.

3. 성공이냐, 하나님의 임재냐?
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는가, 아니면 성공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늠하고 참된 기독교와 종교적 우상숭배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내 임재 없이 성공을 이룰 것이다. 천사를 보내 성공하게 해주마.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우리는 종종 이런 테스트에 직면합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없는 성공이냐, 하나님과 함께 가는 실패냐 하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지난 30년 이상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보다 성공을 추구하는 흐름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님의 임재, 거룩한 교회, 참된 거듭남과 회심이라는 가치를 희생시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로 대변된 바, 하나님의 임재가 없더라도 성공하기를 원하는 백성에게 “너희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106:15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대로 주시는 것을 축복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 것을 얻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슬프지만, 본문의 상황이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 중에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 한국교회에도 성공보다 하나님을, 성취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앙망하는 참된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상황에서, 우리는 그냥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됩니까? 하나님 없이 계속 가면 되는 겁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가 취한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 통탄할 만한 상황에서 구국기도운동을 일으키거나 대규모 비상시국 기도조직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잘 알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동원하여 조직을 만들고, 대규모 집회를 기획하는 방식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거룩한 부담을 가지도록 은혜를 주신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어서 되는게 아닙니다. 성령의 지원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로이드존스의 말입니다.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인간적인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들을 하려고 한다면 광고를 해야 됩니다. 또 대단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장소에서 집회를 기획한다면 그곳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의 지원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 눈을 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부담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모세가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일이고, 그런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며, 모세가 회막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영적인 부담을 가지고 회막을 떠나지 않았던 여호수아의 마음에 성령께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이런 부담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아십니까? 가령, 교회를 생각하는데 내가 뭔가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거룩한 부담이 생기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다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 같고, 기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에 대한 부담일 수도 있고, 때로는 교회 전체의 영적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담이 올 때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 조직을 만들고, 기도회를 시작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부담이 있을 때, 여러분은 먼저 홀로 엎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을 좀 더 불러모아 같이 기도할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어떤 일을 위해서 기도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혼자서 먼저 기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는 같이 기도할 사람을 모집하는 일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은 모세를 주목했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으며, 여호수아는 모세가 떠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엎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방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5. 부흥을 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33장 12~18절은 모세가 하나님께 대략 세 가지를 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12~13절에서 모세는 단지 천사를 보내지 마시고 이 백성을 다시 주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가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14).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만이 아니라, 이 백성과도 함께 가 주시기를 구합니다(15~16). 16절입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모세는 ‘우리와 함께 행하심’이 천하 만민 중에서 자신들을 구별하신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백성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사람은 성공이라는 외적이고 세상적인 현상으로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고 표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이제 출발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모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기도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의 산에 올라 40주야를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의 돌판을 받고 율법과 성막에 관한 모든 말씀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풍성하고 충만한 계시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갈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구하는 법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지금 모세가 구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흥을 위한 간구입니다.
부흥을 정의하자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급격히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잠자는 교회, 무능력한 교회를 깨우고 회복시킨 것은 언제나 부흥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찾아오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부흥입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이 필요하고, 신학교에 부흥이 필요하고, 한국교회 전체에 부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갱신과 개혁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부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교회가 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부흥이 오면 좋고 안 와도 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부흥을 기다리되 절망적일 정도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적으로 이 부흥을 구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모세가 진 밖 회막으로 나아가 기도했던 것처럼, 그가 하나님 없는 성공을 거절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공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소서! 오늘 벧샬롬교회가, 그리고 절망적인 한국교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구하는 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참담한 상황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은혜를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부어주사,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보기를 구하는, 부흥을 구하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