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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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6 - 기도하는 신앙 (13) - 율법적 기도 vs. 복음적 기도

누가복음 18:9-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3-25

말씀내용
율법적 기도 vs. 복음적 기도(눅 18:9~14)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도록 주신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라는 수단이 가지는 위험성은 교회 역사에 늘 있어왔습니다. 기도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때, 기도할 때 우리가 소통해야 하는 하나님보다 기도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리고 하나님 보다 우리 자신이 초점이 될 때, 기도는 축복된 수단이 아니라 영혼을 망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그 영혼이 더 많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적 기도 혹은 종교적 기도라고 부르겠습니다. 반면,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는 합당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그것은 복음적 기도라고 부르겠습니다.

1. 율법적 기도와 복음적 기도의 차이
율법적 기도와 복음적 기도의 차이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견고히 서지 않으면, 기도는 율법의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위가 될 뿐입니다. 율법은 명령이고 복음은 약속입니다. 율법은 “네가 이렇게 하면(조건을 만족시키면) 내가 저렇게 해주마”라는 형식이라면, 복음은, “내가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으니 너는 이제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렸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나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달려있지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얻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 구분을 기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적 기도의 대표적인 경우는, 왜곡된 서원기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서원기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원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의 일부 혹은 전부, 혹은 어떤 것을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원기도 자체는 문제가 없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서원은 종종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원기도를 마치 하나님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처럼 오용하는 경우입니다.
가령, 대학에 응시를 하고 자신이 없지만 꼭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붙여만 주시면 제가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혹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내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방식의 서원은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니고, 조건적인 거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기초한 거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서원기도는 율법적 기도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합당하게 드리는 서원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다만 경솔하게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도 없을 것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적 기도는 모든 종교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본질입니다. 자기 노력과 행위와 정성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복음적 기도입니다. 복음적 기도는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할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반면, 율법적 기도는 하면 할수록 자기 의가 살아나게 되고 믿음이 견고해지거나 좋아지게 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눈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되고맙니다.

2.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9)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주님의 비유입니다. 먼저 이 비유를 주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보지요. 9절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라고 할 때, ‘믿는다’는 동사는 ‘굳게 확신한다’는 강한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즉, 자기가 의롭다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그 거짓된 확신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주님 당시에, 이 비유 속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고,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고, 그의 섬김과 봉사가 없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을만큼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이런 거짓 확신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목사들이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쉬운 부류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제일 좋은 줄 알고, 목회를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도록 특별히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부르신 직분입니다. 그러나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도자로서 경건을 추구하고 주님의 교회의 거룩과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며, 맡겨주신 주님의 양무리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와 장로의 직분입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서 내가 제일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그것은 지나친 확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이 특별한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고 경건생활에 힘쓸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은 특별히 이런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비유는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위 중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기도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기도를 조심히 하고 바르게 하라”는 교훈입니다.

3.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11~13)
이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1세기 유대 문화와 종교 사회에서 이 두 사람은 양극단의 두 그룹을 대변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자기 의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말씀하기는 하였으나, 이들만이 이 비유의 청중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청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결론은 청중의 예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율법적 기도와 복음적 기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고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기도의 차이를 좀 더 살펴보지요.

A. 언어와 문법 사용의 차이
먼저 볼 것은, 그들의 기도의 언어와 문법이 가지는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나’라는 일인칭 주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11~12절을 보지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에서 ‘나’라는 주어가 몇 번 나옵니까? 2번 나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나는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는’이 5번 나오지요.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 바리새인이 유난히 ‘나는’이라는 말을 많이 한 것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법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의 언어와 문법은 어떻게 다릅니까?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 역시 ‘나’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나’라는 주어가 없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여,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즉, ‘나’는 주어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인 간접 목적어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세리의 기도에서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언어와 문법으로 볼 수 있는 차이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에 대해서 능동태를 사용하는 반면, 세리는 수동태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누구와 같지 않으며 또 무엇, 무엇을 했다고 능동태로 말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수동태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바리새인의 의식과 사고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한 행위들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불쌍히 여기시기만을 바라고 간청합니다.

B. 기도의 자세와 태도의 차이
두번째로 볼 것은, 두 사람의 기도의 자세와 태도의 차이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따로 서서’라는 표현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 성경학자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할 뿐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바리새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아마 그는 성전 안뜰까지 깊이 들어가서 기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한 유력한 성경학자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태도와 내용을 보건대, 본문이 정확하게 그것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소리를 내서 기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조용히 기도하거나 소리를 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정도로 조용히 소리를 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무례한 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짓되고 무례한 기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의 자만심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적 기도의 특징입니다. 율법적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으니 이제 하나님은 내게 복을 주십시오”하는 오만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의 자만심은 율법 준수라는 행위에 기인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오직 단 한 번의 금식만을 명령합니다. 그것은 속죄일의 금식입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행했습니다. 율법에 명한 것에 넘치도록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만심을 부추길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이 명하는 십일조에 지나도록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먹는 아주 작은 채소와 양념까지도 계산해서 십일조로 떼어 철저하게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마 23:23).
반면, 세리의 태도는 13절에서 보는 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세리의 경우에는 그가 한 기도의 말 보다 그가 취한 기도의 태도가 더 많이 언급됩니다. ‘멀리 서서’라는 말은 세리가 성전의 이방인의 뜰 끝부분 쯤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에는 가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기도의 차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가로 구별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율법규정을 분에 넘치도록 잘 지키는 사람이며, 보통 ‘죄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여기던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 이 세리’와 같지 않은 의인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와 자기가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 속에서 행하신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참된 감사가 아닌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고 살아가는가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C. 예수님의 평가(14)
결국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인식했던 그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구했던 세리였습니다. 그 사람이 성전 안뜰에 있는가, 아니면 성전의 바깥쪽 이방인의 뜰에 서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가, 아닌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율법적 기도와 복음적 기도의 결과가 얼마나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적 기도는 자기 의로 시작해서 자기 의로 마칩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자기 만족이고, 자기기만적 자기 만족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의 기도는 사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경계하신 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 기도에 지나지 않고, 이미 사람들에게 상을 다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주실 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마 6:5). 이 사람은 내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나를 주목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 마음은 하나님께 용서받고 용납된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은 영적 기쁨이 풍성할 것입니다. 그는 필시 큰 기쁨, 넘치는 감격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기도는 가슴을 치며 우는 회개로 시작했지만, 참된 회개의 끝이 언제나 그렇듯이 달콤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끝에는 평안과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D. 비유의 신학적 원리(14)
이 비유에는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의롭다고 믿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높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종교적 노력과 헌신과 수고, 특별히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그들을 낮추실 것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과 인정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십니다. 그들은 그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반면, 세리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입니다. 사실, 세리는 자기를 낮추었다기 보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보고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자기 신앙이 좋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기가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잘 해왔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4.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자, 오늘 말씀을 정리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A. 회개와 자기 낮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언제나 회개라는 사실입니다. 신자의 삶은 회개에서 회개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회개가 살아있을 때, 여러분은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세리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기도했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언제나 자기 낮춤과 회개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순종으로 이룬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댱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의로움을 전가받아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자기 낮춤의 태도가 없는 기독교는 천박한 기독교이고, 값싼 은혜의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회개가 있는가, 자기 낮춤이 있는가는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우리는 회개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자기 행위, 자기 헌신, 자기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B. 기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초점이다.
두번째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도록 주어진 수단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의 대가, 기도의 챔피온이 되길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에 깊어질 수 있는 길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더 깊이 말하고 싶은 갈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기도는 절망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에서 나오는 갈망이 없이 기도는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 갈망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은 갈망이어야 합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아니고, 기도 자체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내가 지금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앞에서 모세는 신을 벗어야만 했고, 그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죄인인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고 느꼈던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묵상하십시오. 그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익한 죄인임을 아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처럼 존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을 쏟아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가십시오. 그 과분한 은혜에 감격하며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기도는 은혜로 시작하여 기도하는 내내 은혜를 맛보며, 은혜로 마치고 난 뒤에도 평안함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