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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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5 - 기도하는 신앙 (12) - 행복한 삶을 위한 기도

욥기 29: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3-18

말씀내용
잡음이 많아 죄송합니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기도(욥 29:1~4)

1. Sehnsucht(잰주흐트) 그리고 ?고도를 가다리며?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안에 심어놓으신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갈망, 행복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을 더 불행하게 하고 더 외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마 독일말에 sehnsucht 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움, 갈망, 동경인데, 사실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한국말에 ‘한(恨)’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깊은 의미처럼 말입니다. 이 독일말은 ‘이 세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너머를 지향하는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갈망은 그 어떤 결혼생활도, 그 어떤 여행도, 그 어떤 배우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갈망이라고 C.S.루이스는 말합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의 설명을 잠깐 들어보십시오. 단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결여되어 있다)고 인지된 느낌입니다.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상실된 것을 찾고 그리워하는 갈망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잃어버렸다고 느끼게 되고 그 잃어버린 것은 동경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sehnsucht 는 지금 먼 것이 되었지만 이전에는 자기와 친밀했던 것이라고 인지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정은 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 대상과의 합일을 이루기를 갈망하지만, 이 합일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이 대상은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이며,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달아나 버리는, 아니 이미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공감이 되시나요? 지금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에 그 연극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 입니다.
이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극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이 작품은 희곡의 거의 모든 관습적인 기대를 깨버립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남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한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는데,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도 모른채 고도를 기다립니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둘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건 거의 대화가 아닌 벽에다 대고 외치는 것과 같은 말들입니다. 잠을 자다 깬 에스트라공이 고도가 왔었는지 물으면서, 차라리 멀리 떠나자고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내일 고도를 만나러 여기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은 나무를 쳐다보며 목이나 맬까 하지만 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일 끈을 챙겨와 고도가 안 오면 매자고 다짐합니다. 두 사람은 입으로는 떠나자고 하면서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고도는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고 그들이 믿고 있는 속임수 망상인가요?
헤겔의 설명이나 새뮤얼 베케트가 하고 싶어했던 말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둘 다 희망 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말하는 듯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정직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것은 낙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조금만 정직해지려고 한다면, 헤겔처럼 자기 내면에 sehnsucht 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새뮤얼 베케트처럼 ‘누구인지도, 과연 나타날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고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2.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만족한다.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그 철학자와 작가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만족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갈망과 그리움이 과연 고급 저택이나 자동차 혹은 명품 옷이나 가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돈이나 명예 혹은 권세를 얻으면 채워집니까? 인간의 갈망은 고작 그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그 정도의 것 밖에 되지 않습니까?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을 들어보셨지요?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만족한 멍청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C.S.루이스는 너무나 쉽게 만족하고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만족에 이르는 우리의 성향을 ?영광의 무게? 에서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한심한 피조물인지,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나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 하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어서 뒷골목이나 배회하고 싶어 하는 무지한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입니다.”

3. 욥의 절망과 그리움의 실체
이제 오늘 성경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욥기의 대부분은 깊은 고난 속에 있는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기록입니다. 고난 당하는 친구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과 욥의 대화는 점점 욥의 고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논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욥의 절망과 갈망도 깊어집니다. 놀랍게도 욥은 포기할 듯 할 듯 하다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그를 삼켜 버릴 것 같은데 욥은 한 줄기 소망을 보곤 합니다. 이 실낱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어느 정도 헤겔이나 새뮤얼 베케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절망이나 불확실성으로 마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헤겔이나 베케트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욥에게 오셔서 말씀하셨고, 욥이 절망 속에서 기다리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다려도 응답없는 고도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세 친구와의 긴 논쟁을 끝내는 욥의 최종변론(29~31장)의 서론입니다.
욥은 먼저 2절에서 자기의 그리움, 갈망을 표현합니다.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4절에서도 “원하노라”는 말을 통해서 자기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가 간절히 다시 오기를 원하는 시절을 어떤 시절입니까? 과거,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시던 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시던 때”라는 뜻입니다. 욥이 여기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나를 늘 바라보시면서 웃고계셨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 환히 웃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지. 그 얼굴을 뵐 때마다 나는 안심했고,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주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두려움없이 걸을 수 있었어. 이 고통과 고독, 그리고 절망의 심연 속에서 나는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구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지요.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여기서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라는 말씀은 본래, 개역성경이 번역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라는 말입니다. ‘우정’은 ‘회의, 모의, 친밀함, 비밀’과 같은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회의라 해도 보통 회의가 아니라, 아주 가까워서 서로간에 비밀이 없는 사람들의 회의이고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집(장막)에서 회의를 가지셨다는 말은, 욥과의 관계가 그토록 친밀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욥은 자기 생애에 있었던 그 원기왕성하던 날들을 회상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3절을 보면,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고 말합니다. 그 원기왕성하던 날에 욥은 언제나 밝은 빛 가운데로 행하고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그때에도 암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등불과 빛이 내 머리에 비치고 있었기에 나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암흑을 활보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욥은 암흑과 고통의 심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욥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 암흑 자체가 아닙니다. 이 암흑 속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는 것을 볼 수 없고 힘입어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빛이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결국 고난 속에서 욥이 표현하는 향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한 향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환한 얼굴 빛으로 자기를 지켜보시고 자기 머리를 향해 밝히 비춰주시는 날들을 그는 그리워합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이 자기 삶과 가정, 농장과 일터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이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욥이 고난 속에서 정말 힘들어 했던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어린 그 복된 시절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지금 나를 대적하고 계신다는 느낌은 욥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욥기를 읽으시면서, 혹 욥을 생각하시면서, 욥의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자식들을 다 잃고 심지어 아내로부터도 경멸함을 받았으니 그 고통이 정말 극심했구나라고 느끼신다면 피상적으로 욥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친구셨던 하나님이 대적으로 돌변하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고, 이것이 그를 절망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욥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욥이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모든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날려버렸고, 자식들마저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하다가 집이 무너져서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고난이 지속되면서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자,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대적하신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에 암흑 속에서도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그 친밀한 우정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욥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넘어설 수 있었던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보지요. 절망을 선택하는 대안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안들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제안하고 싶어하는 대안들일 수도 있습니다.
얼른 자기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 했다고 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정확히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일단 잘못 했다고 하고 돌아가면 되는게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는 완전한 의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두번째 대안, 정 생각나는 죄가 없으면, 하나님께 간절히 엎드려 이게 너무 힘드니까 일단 좀 살려달라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니 이 상황을 좀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욥이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상황을 풀어주고 싶겠습니까?
먼저 이 두 가지 대안의 핵심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지긋 지긋한 고난의 상황을 벗어나 보자는데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이게 목적입니까? 이 상황을 벗어나는게 우리가 바라는 전부입니까? 이 고난만 없으면 인간은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이런 점에서 이 두 가지 대안은 종교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답은 아닙니다.
이런 대안도 가능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래도 살아있는게 어디야?”하면서 툴툴 털고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대안을 포함해서, 그리고 특별히 이것은 C.S.루이스가 말했듯이, 너무 쉽게 만족하는 우리의 경향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인생이 얼마나 고생을 하지 않고 편안히 사느냐에 의해서 평가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생각할 수 있는 대안들이란, 고작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고도를 기다리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나무에 목맬 줄은 없으니까 그냥 기다려보자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래도 소소한 즐거움들을 취하면서 나름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여기에는 성경이 제시하는 대안은 없습니다. 왜 성경이 이런 대안들을 승인하지 않는지를 말씀드리지요. 이렇게 해결이 된다고 해봅시다. 고난이 그쳤습니다. 살 만해졌습니다. 그 다음에 욥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는 전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욥의 마음에 남아있는 찜찜함이 과연 고난이 사라지면 그와 함께 눈 녹듯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해결은 그저 갑 앞에서 을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취하는 굴욕적 굴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결은 언제나 불씨를 남겨둡니다. 비통한 뿌리, 쓴 뿌리가 남습니다. 겉으로야 하나님과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슴 깊은데서 나오는 사랑과 감사와 만족은 없습니다. 인간은 이것이 없을 때,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 너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 이 고난의 상황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마땅히 누리고 살아야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이 깊어서 힘든게 아니라, 사실은 네 인생에 하나님과 누려야 할 생명, 하나님과 누려야 할 사귐이 없는게 고통이라고 말합니다(렘 2:13,19). 왜냐하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는 실존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남으로서 야기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요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4. 절망이 깊어야 기도가 자란다.
여기까지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이것 조차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정말 답이 없는 것이지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무슨 의미가 있냐? 나는 차라리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고 말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까지 동의를 하면서 따라오고 계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동의가 열쇠는 아닙니다.
우리는 좀 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도 필요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릴 용기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절망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이 말은 잘 지내시는 여러분을 더 힘들게 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성경처럼 현실적인 책은 없습니다. 성경처럼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인간의 실존을 정직하게 이야기해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하나님께 나아갈텐데, 여전히 착각 속에 머물러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배고픔은 인간에게 구걸을 가장 잘 가르쳐준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적 배고픔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 배고픔이라는 상황에 절망하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 외에는 결코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대체물들로 만족하는 대신, 그는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로 12번째로 [기도하는 신앙] 시리즈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론을 주려는 것이 제 목적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학이 있고 가르침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정이 머무는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머문다는 것을 압니다. 기도하지 않는 마음에 불편함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기도해야지 결심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기도를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5. 더 큰 행복을 바라라.
여러분은 기도를 해야할 만큼 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절망적 상황 말입니다. 왜 절망이 깊지 않을까요? 갈망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갈망은 하나님을 향할 때에만 강해질 수 있습니다. 더 큰 것을 구하는 갈망이어야 합니다.
Sehnsucht! 쉽게 얻어지고 채워지는 갈망, 돈으로 구매하기만 하면 채워지는 수준의 갈망이 아니라, 돈이나 명예, 권력과 성공과 인기와 성취로도 획득할 수 없는 갈망, 행복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인생의 행복을 바라십시오. 욥이 갈망하고 원했던,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머물던 그 원기왕성하던 때를 바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 여러분의 마음을 쏟아내는 은혜가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만하면 살만하지”라고 쉽게 만족하지 마십시오. 자족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족은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계시니 만족합니다”하는 마음의 상태이고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데, 하나님과의 우정이 확인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환한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주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내 머리를 비추고 계시지 않은데도, “괜찮아!”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큰 행복을 구하십시오.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밥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사 우리 구주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 새롭고 산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여러분의 깊은 속에 쌓이고 눌려져 있는 마음을 정직하게 쏟아내십시오. 진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려고 의도하셨던 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우리 그렇게 하나님을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