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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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3 - 기도하는 신앙 (10) -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시편 57: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3-04

말씀내용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시 57:1~11


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a)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적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대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뒤, (너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었듯이 (너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고,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순서는 중요합니다. 이 순서를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한다는 점에서 중요한게 아니라, 순서가 의미하는 중요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앞의 세 청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고, 뒤에 세 청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 기록된 마태복음 6장을 살펴보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 즉 먹고 마시고 입는 생활의 필요들에 대해서는 설령 구하지 않아도, 구하기 전에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알고 채워주신다고 하십니다(마 6:8,32). 사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마 6:9a).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이고,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독특성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아마 여러분 대부분이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 입니다. 당장 내 눈 앞에 닥친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야 기도를 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또 하나님의 뜻이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위해서 더 먼저, 더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아예 기도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기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기도의 저급한 수준에 머물지 않고 기도의 깊고도 영광스러운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신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움이고 행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2. 어떻게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의 절박한 필요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더 먼저 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이 내 개인적 필요보다 앞서며, 더 우선적이며, 더 간절한 기도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다윗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신앙 경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감하셔서 쓰게 하신 시편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썼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상황을 표제가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쓴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었던 적이 성경에는 적어도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아둘람 굴에 있었던 때입니다. 유다에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여긴 다윗은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에게로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뛰어난 장수 다윗은 그들의 눈에 숨겨질 수 없었고, 정체가 발각된 다윗은 미친 척하면서 도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이른 곳이 아둘람 굴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아버지의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들 400여명을 만납니다. 그들은 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21:1~2). 이 심란한 상황이 다윗이 이 시를 썼다고 추정할 수 있는 첫 번째 상황입니다. 또 한 번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굴에 있었던 때는, 엔게디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엔게디 광야로 왔다가 뒤를 보려고 굴을 찾았는데 마침 그 굴은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굴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해하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 끝을 벰으로써 자신의 선의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는 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굴에 있던 두번째 상황입니다(삼상 24).
이 두 상황 모두 다윗에게는 절박했고 목숨이 경각간에 처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살려주십시오! 이 곤경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이번에만 구해주시면 제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제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생각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3. 현실의 필요에서 시작하는 다윗의 기도(1,3,4,6)
1,3,4,6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합니다. 먼저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앙의 연속' 곧 '재앙들'이었습니다. 그리고 3절 상반절을 보지요.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다윗은 자신을 삼키려는 자의 비방 가운데 있습니다. 다윗은 공공의 적이 되었고 그를 향한 근거없는 비방들이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4절은 이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는 굶주린 사자들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불사르는 자들 가운데 누웠다'는 말은 맹렬한 야수 같은 존재들 속에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짐승이 아닌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이빨이 창과 화살이며 혀가 예리한 칼 같은 인간들, 하나같이 다윗을 찢고 삼키려는 자들입니다. 끝으로 6절도 다윗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그들은 그물을 준비하여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 웅덩이를 파서 자신을 빠뜨리려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이미 그 수렁에 빠져있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다윗 자신이 지금 사울의 손아귀에 잡혀 있으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상이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다윗이 처한 상황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은 그 상황에서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4. 신자에게 있는 또 하나의 현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박하게 구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다윗이 구하는 은혜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건져달라는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윗의 신앙을 엿보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는 주님께로 피합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믿음, 확신이 표현됩니다.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다윗은 이 재앙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앙의 연속 속에 처해 있지만, 언젠가 이것들은 끝날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재앙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그의 믿음과 확신은 놀랍게 표현됩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는 지금 사울 왕보다 높으신 하나님,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28,32)."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다윗의 고백에는 이런 바울 사도의 복음의 진술이 풍성하게 담겨져 있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이 토대가 된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그리고 당당히 가져야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이런 확신이 없이 부르짖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다윗이 드리는 기도는 바로 이런 토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셔서 자신을 이 상황에서 구원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은혜와 성실하심'이라고도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히브리말 '헤세드'입니다. 언약적 사랑,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의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다윗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성품, 진리에 부합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아니라, 예부터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다윗이 아는 하나님은 이처럼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그를 확신으로 이끌었습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런 확신을 가질 때,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윗은 이 지점에서 자기가 처한 절박한 상황,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함몰되어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다윗을 지켜주고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그 지식에 근거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이 그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을 보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삶에서 이런 은혜를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하자면,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도 현실이지만, 다윗에게는 아니 신자에게는 또 하나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입니다. 다윗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신앙은 허구이거나 환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근거없는 희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지와 진리는 믿는 자에게 현실입니다. 신앙이 현실이 될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5.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는 다윗의 기도(5,7~11)
반전은 5절에서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갑자기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자기 생명이 경각간에 처했지만, 그는 어느새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겁니다. 그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5절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동일한 간구입니다. 나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입니다. 만일 사울이라도 이런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아는 그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5절의 간구는 이런 안타까움과 아픔이 배어있는 기도요, 찬송이기도 합니다.
7절에서 다윗은 자기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거듭 말합니다.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더 이상 자기 상황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환경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속박에서 풀려나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고 경험되는 은혜입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버거움 속에서 이런 은혜를 알게 해주시길 구합니다.
8절에서는 방향 전환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의 마음은 자신에게서 밖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서 '내 영광아'라는 표현은 인간 존재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인데 '내 영혼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라는 말은 "너희 악기들이여! 어찌 가만히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가? 너희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지어진 존재인지 알지 못하느냐?"하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말도, 나는 새벽 이전에 일어나서 오히려 새벽을 깨우겠다는 말인데, 새벽까지 기다릴 수 없을만큼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것을 보여줍니다.
9절과 10절로 가면, 다윗의 마음이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11)." 비록 다윗 자신은 사울을 피하여 굴 속에 숨어있는 처지이지만, 그의 마음은 온 세상 모든 만민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은 단지 자신에게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만민으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온 세상 모든 만민에게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가슴 벅차게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가슴 벅참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선하심을 알기 때문에 오는 가슴 벅참입니다. 끝으로 다윗은 다시 5절에서 고백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이 시를 두 단락으로 이해할 때, 첫 단락의 끝인 5절과 두번째 단락의 끝인 11절을 형성하는 후렴이고 결론이 됩니다. "주님, 제 상황은 잊었습니다. 제 상황이 아무리 절박해도 주님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서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길 원합니다." 이 고백은 다윗의 가슴 깊은데서 터져나오는 고백입니다.

6. 적용과 교훈: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라.
이 시편에는 두 개의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굴'로 표현되는 바, 다윗이 처한 절박한 하고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또 하나의 상황은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서 기도를 시작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그를 그 처지에서 비관하고 절망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사 자기를 거기서 건져내실 것을 알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건짐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서 인정되고 찬송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이건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입니다.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신의 필요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의 자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묵상할 때, 우리는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재앙이 지나가게 하시는 주권자시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며, 권세와 영광이 너무나 커서 어떤 존재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그 선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여러분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처한 그 상황에서, 자기 연민의 자리에서 여러분을 벗어나게 해줄 열쇠는 없습니다.
19세기 초, 인도로 갔던 영국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31세의 나이로 이란 지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천재 선교사는 이런 말을 그의 일기에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보낸 시간보다 더 낭비되지 않은 시간은 내 인생에 없었다." 경건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단지 필요를 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은혜와 행복에 이르는 열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을 읽고 배운대로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자비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복된 자리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