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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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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2 - 기도하는 신앙 (9) - 필요냐, 욕심이냐 ?

마태복음 6:11, 야고보서 4: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2-25

말씀내용
<필요냐, 욕심이냐> 마 6:11; 약 4:3


[신앙과 성숙]이라는 대주제 아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신앙] 이라는 소주제로 9번째 말씀을 상고합니다. 잠시 중요한 요점을 복습해보지요. 기도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여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며, 이 기도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빚어가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를 어렵게 만드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고난을 없애달라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연약함입니다. 이 연약함을 인하여,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1. 필요와 욕심 사이(약 4:3)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합당한 기도입니까? 우리의 필요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언제 필요가 욕심이 됩니까? 야고보서 4:3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서는 너희 중의 싸움이 다 정욕에서 나온다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3:15에서는 독한 시기와 다툼, 거짓말과 같은 것들은 정욕의 것, 귀신의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정욕은 마귀에게 속한 악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니 정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합당치도 않으며 심지어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이 되실 수 없습니다. 이점에서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 강단을 오염시키는 번영신학은 사람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짓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지요. 로라 윌킨슨(Laura Wilkinson)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여자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을 3개월 앞두고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하여 7주간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올림픽 출전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그녀는 하루에 수십 번씩 한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힘을 얻었고 마침내 올림픽에 참가하여 아무도 예상 못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로라에게 힘을 주었던 말씀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였는데, 그녀는 우승 소감 인터뷰에서 "제게 능력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흐뭇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당시 그녀가 어떻게, 무엇을 기도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그녀는 신학적으로 틀렸고 기도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며 그 성경구절은 그런데 사용하라고 주신 게 아니야"라고 까탈스럽게 말하는 것은 그리 훌륭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기도가 아니라, 그녀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동영상을 소개한 한 기독교 웹사이트에는 이런 해설이 있었습니다. "희망적인 성구 하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운동선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거죠. 다소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그 분 안에서 나는 슈퍼맨, 슈퍼우먼도 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능력자가 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래요."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녀처럼 간절히 기도해서 금메달을 따야겠다. 기도만이 길이다." 적어도 이런 해설이나 결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기도와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 운동선수들이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만일 한 선수가 금메달을 따게 해달라고 혹은 경기에서 꼭 이기도록 기도한다고 유치한 가정을 해 봅시다. 문제는 상대편을 포함하여 참가하는 선수들 중 10여명의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이 모두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해봅시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느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금메달은 하나 밖에 없고 이기는 편은 한편이어야 하니까요. 골라보십시오. 더 열심히 기도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더 열심히 헌금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서원기도까지 한 사람? 아니면 그저 가장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가장 기량이 좋은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운동선수의 이 기도는 필요를 구한 것입니까, 정욕을 따라 구한 것입니까? 필요와 정욕, 필요와 욕심을 나누는 선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선명합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답은 뒤로 좀 미루었다가 마지막에 다루겠습니다.

2. 필요를 구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마 6:11; 롬 11:36; 신 8:17).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핵심 청원 몇 개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최우선적 청원입니다. 그 뒤에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1).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상당한 음식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런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주식이 대박 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떡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아실 뿐 아니라(신 8:3)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네가 네 능력으로 먹고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공급해주는 은혜로 먹고 사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통 식사기도(식사감사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의미없는 습관이라고 느끼지는 않으십니까? 내 돈 주고 내가 사먹는데 왜 감사기도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리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게 아닙니다. 이런 것은 잡신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롬 11:36a).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목전에 둔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가나안에 들어가 배가 부를 때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죄인 안에 내재하는 죄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점에서 식사기도는 "주님, 저는 제게 능력이 있어서 이런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지혜와 힘과 직장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이런 음식을 대하겠습니다. 주신 음식을 감사히 먹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겁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구하라고 하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형식이 아닌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필요가 전부가 아니다(마 6:31~34)
그런데 이 말씀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31~34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명령 뒤에 결론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겪는 삶의 염려로부터 자녀들을 자유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요 은혜입니다. 심지어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그런 의식주 문제를 구하면서 안달할 필요가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는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이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아시고 채워주시므로 염려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기도의 최우선순위로 삼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분명한 필요입니다. 이것을 구하라는 것도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기도가 염려를 대신합니다. 기도는 믿음의 태도이고 염려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4. 필요가 욕심이 될 때
자, 그러면 필요와 욕심 사이를 구분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언제 필요가 욕심으로 변합니까? 그 구분선을 정확하게 그을 수 있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는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기도가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구하는 것이 전부라면 여러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 모두 여러분 개인의 사적 필요에만 국한된다면 그것이 욕심과 정욕으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의 사적 필요를 구하는 것이 전부라는 말은, 오는 세상에 대한 소망 보다 이 세상의 현실이 크다는 말이고, 이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이 세상이 전부라는 세상의 논리에 굴복하여 사는 것이기에 필요에서 멈추지 않고 욕심과 정욕으로 흘러갈 것은 불보듯 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고, 내 왕국만 보이며, 영원에서 영원에 이어지는 안목은 없고 오직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단지 우리 안의 욕심을 비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채우고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새롭고 거룩한 열망을 일으켜내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정욕, 육체의 소욕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면에는 이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구하는 일이 신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삶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말씀과 기도와 성례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은혜를 구하고 받는 일이 여러분 안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되, 영원의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에 굴복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그저 이 세상을 더 잘 살기 위한 도구와 방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정욕을 따라 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설령 그 사람이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신앙은 심각하게 망가지고 무너집니다. 이것은 그 기만성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탐욕과 정욕이 종교적으로 치장되고 종교적 열심으로 둔갑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신앙이 무너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정욕 곧 탐심을 갖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간절하고 경건한 기도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우상숭배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패악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5에서 말씀한대로,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과 탐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꼴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없으면 삶이 삶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꼭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필요와 욕심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미묘한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책임진 수많은 고아들의 음식과 고아원의 필요를 위해서 많이 기도했던 사람입나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고아원 사업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가 구했던 고아들의 음식과 필요는 욕심이나 탐욕이 아닌, 그야말로 필요를 하나님 아버지께 가지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5. 필요를 따라 구하는 지혜로운 기도(딤전 6:5~10; 잠 30:8~9)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적 권면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5~10절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사도는 먹을 것, 입을 것은 있는대로 자족하라고 권면하고 나서, 부하려 하는 마음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을 가지면 시험에 빠지고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결국 멸망합니다. 부하려는 마음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이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누구든 믿음에서 떠나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삶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명분이든간에 해롭습니다. 가령, "십일조를 제일 많이 드리는 신자가 되겠으니 저를 축복해 주시옵소서"와 같은 기도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굴의 잠언에 나오는 기도는 지혜로운 기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잠언 30:8~9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매우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필요를 구하되 욕심이 되지 않는 선에서 드린다는 점에서 지혜로운 기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제 앞에서 던진 질문에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 운동선수들이 금메달과 승리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만일 그들 모두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의 기도를 다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지혜와 선하심을 가지고, 최고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모두의 기도가 다 옳고 바른 기도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금메달과 승리는 필요입니까, 욕심입니까?

A. 나의 기도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동기를 드러내는가?
필요인가, 욕심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첫번째 기준은, 이 기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가 입니다. "제가 금메달을 따고 저 형제는 은메달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필요라기 보다 욕심이라고 하고 싶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저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훈련하고 연습한 기량을 실수없이 잘 나타내고 모든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결과에 만족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옵소서." 이 기도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대원리가 어떻게 나타니나는지 보이십니까?

B. 기도의 결과가 좋을 때만 감사하는가, 기도의 결과가 어떻든지 자족하고 감사하는가?
우리가 필요를 구한 것인지, 정욕을 따라 구한 것인지를 분별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결과가 좋을 때만 감사하는가, 기도의 결과가 어떻든지 자족하고 감사하는가 입니다. 만일 정욕을 따라 구했다면, 그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부가 결정될 것입니다. 내가 구했던 대로 금메달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메달이면,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본인의 만족도도 다를 것입니다. 금메달을 받았다면 만족과 감사가 샘솟았겠지만, 은이나 동메달이라면 이거라도 감사하지 하는 마음이 들 것이고, 그러나 노메달이라면 불만족이나 쓴 마음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욕심을 따라 구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필요를 구한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한 것이라면, 그는 모든 결과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 것이고, 결과도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틀림없는 간섭하심으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를 구했는가, 욕심을 따라 구했는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시금석입니다.

C. 그리스도가 나의 만족인가?
참으로 우리의 만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의 답은 진정 여러분 자신의 고백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진정 여러분의 기쁨과 위로와 만족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원하는 성공, 원하는 물질, 원하는 취업, 원하는 건강, 원하는 조건들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가 정욕을 따라 구하는 자리로 가는 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를 그만 두는게 대안입니까? 복음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이 되심을 복음 안에서 알고 느끼고 경험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합당한 그리고 성경적인 기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를 이 말씀의 원리를 통해서 점검해보십시오. 정욕으로 잘못 구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필요를 따라 구하십니까? 여러분은 과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알고 필요를 구하십니까? 만일 정욕으로 잘못 구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자유함으로 가지고 여러분의 모든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를 기뻐하시는 하늘 아버지께 당당히 나아가 아뢰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다 아시고 그것을 공급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주제는 다음 주일에 이어서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