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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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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1 - 기도하는 신앙 (8) - 성령님과 기도

로마서 8:26-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2-18

말씀내용
<성령님과 기도> 롬 8:26~27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설교에서 제가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며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당신의 뜻대로 빚어가시고 축복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1. 기도의 균형을 위한 두 가지 당부
우리의 기도가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 균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당부를 드리려고 합니다.

A. 뻔뻔함과 경외감
지난 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때, 뻔뻔할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언제나 균형이 필요합니다. 뻔뻔하다는 것은 건방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끔 기도를 권리 청구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매우 불편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엄위하십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먼지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엇을 구하는가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무익하고 죄악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주심으로써 성도의 기도가 불경한 기도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뻔뻔함이 경외감과 함께 합니다.

B. 성경과 성령님
우리의 기도가 성경적 균형을 가지기 위해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려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성경에 이끌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이미 충분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면 충분할까요? 지난 주일, 우리가 상고한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13).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미 살펴보았지만, 여기 존 칼빈의 코멘트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가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의 대답은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성과 감성은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어둠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충분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지성과 감성은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은 실로 우리의 기도생활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과 성령님 사이에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님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고 신비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성령님은 기록된 객관적인 말씀인 성경의 의미를 드러내시고 성경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려면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이끌려야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2. 우리의 연약함-무엇을 구할 것인가? (26a)
오늘 본문은 여기서 이어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또는 "우리가 연약하다"고 할 때, 사도는 어떤 뜻으로 말씀하는 것일까요? 26절이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으니 본문의 맥락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5장 이하부터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과 안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 17절 이하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장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18~25절의 요지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하나님의 백성을 현재의 고난과 탄식 가운데서 능히 보존해주는데, '이와 같이'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총체적인 연약함을 도우셔서 현세에서 받는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기도라는 주제에 한정하여 말씀하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할 때, 사도가 의미하는 '연약함'이 무엇일까요? 물론 본문의 정황상, 연약함은 피조물인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가지는 총체적 연약함을 의미하지만, 사도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려는 답은 바로 뒤에,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는 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라는 것을 알겠는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 일상 속에서 정확하게 알고 확신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와 무능이 사도가 말하려는 '연약함'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무지와 무능을 도우십니다. '도우시나니'라는 말은 혼자서는 도무지 들 수 없는 긴 통나무를 한쪽 끝에서 같이 들어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물론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그 뜻을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 속에서 겪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도가 말씀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우리 지성과 감성은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기까지는 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질병과 재난, 박해의 상황 속에서 위험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할지, 이 모든 상황을 잘 견디도록 기도해야 할지, 병이 낫게 기도해야 할지, 병을 견디도록 기도해야 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령, 암에 걸렸다고 해보지요. 암에서 치유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일로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하나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합니다. 반드시 붙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제게 고난이 필요하다면, 저는 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구해야 합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느 것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은혜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연약함과 함께,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깨달음의 결핍이라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최선인지 모를 때, 잘못된 것을 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잘못된 기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신 3:23~26을 보지요.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잘못 구한 기도를 교정해 주십니다.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는 자신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거절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 고린도후서 12:9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잘못 구한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함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자신의 강함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그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구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던 교훈입니다.
무엇을 구하는대로 얻는 것은 기도의 능력이 아닙니다. 시편 106:15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요구한대로 받았어도, 그 영혼이 날로 쇠약해진다면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요구하고 바라는대로 얻는 것은 기도의 응답이거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욕심대로 내버려두시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롬 1:24,26,28).
모세와 바울의 기도가 거절되었다는 것, 그들도 잘못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위로입니다. 잘못 구할까 무서워 차라리 기도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고 악한 변명입니다. 세상의 아버지께 잘못 구할까 두려워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은 자녀들이 어디 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잘못 구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잘 구하나 잘못 구하나 기도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고 겸손해지고 깨닫고 성장합니다.

3. 성령님의 도우심
자,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을 생각해봅시다. 성령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두 가지 방식으로 도우십니다. 첫째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고(26),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입니다(27).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할 때, 그들에게는 두 신적 중보자가 계십니다. 첫째는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이뿐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롬 8:34).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한다는 것은 사실 하늘과 땅이 움직이는 엄청난 일입니다(행 4:31 참조).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함께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간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성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본문에는 성령님께서 간구하신다는 표현이 26절에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와 27절에 "성도를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두 번 나옵니다. 우리 말로는 같은 단어지만, 헬라어는 의미는 대동소이해도 단어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6절의 '간구'는 '위하여 기도한다' 는 뜻이 강하고, 27절의 '간구'는 '중재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27절의 '간구한다'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한 34절과 히브리서 7:25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재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그러나 26절에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을 때,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합니다.

A.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26b)
먼저 26절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이란 말은 '무언의'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무언의 탄식'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방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탄식을 하신다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로 탄식을 하시는게 아니라 '무언의' 탄식을 하십니다. 이 탄식은 문맥의 흐름상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22절) 하나님의 자녀들의 탄식(23절)에 이어집니다. 이 흐름에 주목하여 존 스토트는 "성령님은 우리 탄식에, 세상과 교회의 고통에 동참하시며 그들 모두가 최종적인 자유--궁극적 구원의 성취--를 누리시기를 바라신다. 우리와 그분이 함께 탄식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성령님의 무언의 탄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 속에서 그 기도를 통해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이 탄식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중보의 사역으로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게 직접 드리시는 기도의 소리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성령님은 영원히 내주하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무엇을 구해야할지 모르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십니다.

B.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27b)
이것만이 아닙니다. 27절은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도록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우리의 탄식이 될 때,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열망"이 생기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에 맞추어 살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다 알고 거기에 맞추어 기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연약함에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체적인 필요와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나가 효과적으로 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기도를 얼마나 잘 했는가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간구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간구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것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4. 항상 응답되는 기도(27a)
27절을 봅시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비록 무언의 탄식을 하실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은 그 모든 탄식과 간구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되도록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고 이 간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정확하게 아시고 들으십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더불어 간구하여 주시니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흘리지 않으시고 다 들어 주십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기도는 예외없이 다 응답되는 기도입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까닭입니다.
존 칼빈의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자녀들의 기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항상 그리고 모두 응답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특권입니까?

5. 교훈과 적용: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만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무능함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것은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전반적인 무능과 연약을 근절시키거나 바꾸는 대신 오히려 그런 무능력 속에서, 그 연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영적 무지와 연약함은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효과적으로 간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기에, 성도의 기도는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기도가 되고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자신의 정욕이나 욕심이라고 의식되는 것을 구하는 것만은 피하십시오. 그것은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약 4:3).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을 구하려고 하십시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정직한 기도가 되게 하실테니, 모르고 잘못 구할 수는 있을지라도 알면서도 잘못 구하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알고도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이고 악한 일입니다. 모르고 잘못 구했다면, 성령님께서는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구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으로 점철된 인생의 순례 길에서 성도가 얻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주어집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써 우리가 그 위로를 누린다고 말씀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험난한 천로역정에서 기도로써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은혜를 날마다 누리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끝으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항상 그렇게 하십시오. 이 은혜를 더 알고 누리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드러난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뻔뻔하게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