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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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0 - 기도하는 신앙 (7) - 뻔뻔하고 끈질긴 기도

누가복음 11:5-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2-11

말씀내용
<뻔뻔하고 끈질긴 기도> 눅 11:5~13


누가복음 11:1~13은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4절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마태복음 6:9~13보다는 조금 짧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내용은 5절부터 입니다. 5~8절에서 주님은 기도에 관한 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9~13절에서는 직접적인 기도의 교훈을 주십니다.

1. 무엇을 가르치는 비유인가?(5~8)
먼저, 비유를 보겠습니다. 온 가족이 잠들어 있는 늦은 밤에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친구여, 내일 갚아줄테니 떡 세 덩이만 빌려주게나. 여행하던 내 친구가 갑자기 집에 왔는데 그 친구를 대접할 떡이 없다네." 여기서 '떡 세 덩이'는 1인분 정도의 양으로 충분히 배부를만큼의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식구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있던 친구가 대답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나. 문은 닫혔고 애들이 같이 누워 자고 있어서 도무지 일어나서 줄 수 없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하게 떡을 빌려달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결국은 일어나서 요구한 떡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가 기도에 관해서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여 어떤 교훈을 주시려는 것입니까?

A. 하나님을 괴롭히는 끈덕진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비유 중에 이 비유처럼 많이 오해되는 비유도 드뭅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는 8절에 나오는 '간청함'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강청함'이라고 번역되었었습니다. '강청(强請)'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억지로 짖굳게 청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간절히 청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간청(懇請)'보다 강한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끈덕지게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교훈을 준다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끈덕진 기도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괴롭히거나 별의별 말로 괴롭혀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기도입니까? 정말 하나님은 자녀들이 기도할 때 괴로와하십니까? 성도들은 기도할 때마다, 누가 누가 더 하나님을 많이 괴롭히는가로 경쟁을 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누가 봐도 넌센스입니다.

B.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 코드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문화를 좀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 비유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문화적 사실들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첫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집 앞에 마트나 24시간 편의점 같은 것들이 없었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보통 날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양만큼 떡을 구워서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주인공은 여분의 떡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이웃을 찾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당시의 접대문화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옛 문화와도 유사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방문하는 손님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덕이었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악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넷째,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전화나 이메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행하던 친구가 그 늦은 밤에 도착했다는 것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큰 결례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오늘날 처럼 호텔이나 여관이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여섯째, 당시의 가옥구조는 일반적으로 방 하나의 집이었고 모든 식구들이 하나의 큰 침대에서 누워 같이 잤습니다. 그러니 모두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일어나서 부시럭거리고 문을 열고 하는 것은 모든 식구들을 다 깨우는 난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렇게 이웃이 함 밤중에 온 친구를 대접해야 하는 중요한 일로 떡을 좀 빌려달라는 요구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자기 식구들을 깨우게 되는 상황일지라도, 이웃이 친구를 대접해야 하는 그 일 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부덕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면, 이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해질 것입니다. 이것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갑작스런 친구의 방문을 받았고 그를 대접할 떡이 없었던 친구는 양자 택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밤에 자고 있을게 뻔하지만 그래도 남은 떡을 가지고 있을만한 이웃 아무개에게 가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잠을 깨워서 부탁을 하여 친구를 대접한다." 이 길이 친구를 대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친구는 밤 중에 찾아왔고 마침 대접할 떡도 없었가는 이유로 친구를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많은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친구는 후자 보다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잘 대접하자! 하지만 준비된 떡이 없으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웃 아무개에게 가서 부탁해보자."

C. 비유의 교훈: 뻔뻔하게 기도하라.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런 설명들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이 비유의 교훈은 "끈질기게 포기하지 말고 괴로울만큼 구하면 얻을 수 있다"입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 자기의 필요를 담대하게 간청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 누가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함밤중에 이웃에게 가서 그의 모든 가족을 깨워 떡을 달라고 간청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귀찮고 당혹스러워했던 이웃도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그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여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이 비유의 핵심을 이해하는데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는 '간청함'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이곳에만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듯이 '끈질기게 반복해서 요청한다'는 의미보다는 '대담하고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가령, 기도에 있어서 끈질김의 요소, 집요함의 요소를 가르치는 비유가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입니다(눅 18:1~8). 그러나 이 비유는 기도에 있어서 끈질김이나 집요함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담대하고 뻔뻔한 태도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간청함'이라고 개역개정역에 번역된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하는가가 사실 중요합니다. 가령, 영역 성경 중에서 ESV는 impudence라고 번역을 잘 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뻔뻔스럽고 무례하고 창피한 줄 모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수치를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미묘한 차이입니다마는, 이 비유는 끈질긴 기도가 아니라, 담대한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한 밤 중에 거절하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큰 소리로 깨우며 부탁하는 것은 민망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개의치 않고 너무나 당당하게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것처럼 떡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담대함, 뻔뻔함, 당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무엇인지 잠깐 생각새보지요.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시도록 하나님을 움직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수단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하시라고 하나님께 뻔뻔스럽고 대담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강조점입니다.
당시의 대접문화 속에서,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겠다고 옆 집에 가서 친구를 대접할 떡을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리 부끄러울 일이 아니고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옆 집 사람을 깨우고 귀찮게 하는 일이, 싫다고 거절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요청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언제라도 'no'라고 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기도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기도할 때,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뻔뻔스러울만큼의 거룩한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9~10).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토대로 기도에 대한 교훈을 좀 더 발전시켜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이런 뻔뻔스러울 만큼의 담대함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하나의 태도가 더해집니다. 여기 세 단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모두 헬라어로 현재시제인데, 이것은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의미입니다. 한 번 하고 마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하라는 것이지요.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오늘 이 본문에서 "쉬지 말고 구하고, 쉬지 말고 찾고, 쉬지 말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앞의 비유에서 뻔뻔한 태도를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끈질김의 요소가 더해집니다. 구하면 주어지고, 두드리면 열려질 것이라는 수동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제공해주신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즉, 기도는 기도 자체가 무슨 만능자판기가 되어서 누르면 나오는 게 아니고,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종종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믿는 소위 기도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일견 좋아보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응답하시고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구하는 것을 언제나 들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제자들이 간청하는 것을 은혜로 관대하게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3. 뻔뻔하고 끈질기게 성령님을 구하라.
자, 뻔뻔하고 끈질기게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A. 무엇을 구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과 대답들
여러분이 코이노니아별로 모아주신 기도에 관한 궁금증들 가운데에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기도를 해야 하나?" "내가 원하는 기도만 해도 되나?" "어떤 기도를 해야 하고 어떤 기도를 안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기도의 본질이 자신을 또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구해야 알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다 여러분이 공감하실 수 있는 문제들일 것입니다. 단답식으로 먼저 답을 드리고 설명하겠습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기도를 해야 하나? 은사의 문제는 별도로 다룰 큰 주제입니다마는, 일단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본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사가 아니라, 성령님 자신을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은사를 구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왜 구하는가?"하는 동기의 문제입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만 해도 되나?" 이 질문을 하신 분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끈질기게 졸라대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하고 어떤 기도를 안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위의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이 자신을 또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구해야 알 수 있는가?" 같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구해야'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라는 고백은 참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처럼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이 성령님과 하나가 되어서 간절히 구할 마음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고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당연히 우리의 기도는 막히고 가슴은 식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하고, 진리로 거룩함을 덧입는 삶을 살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B.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
자, 이제 본문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더 들어봅시다. 11~13절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들과 하나님 아버지를 비교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와 앞의 비유,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명령 모두를 정리하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에게 나아가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생선 대신 뱀을 주고, 계란을 달라고 하는 딸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악한 아버지도 보통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은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늘 아버지는 세상의 아버지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신이 죄인이기도 하고 능력에도 한계가 있지만, 하늘 아버지는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십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최고의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어도 줄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하늘 아버지는 주고자 하시는 최고의 것을 주실 능력이 넘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명시적으로 주님이 언급하신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뻔뻔하게 나아가서 끈질기게 구하는 자녀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성령님입니까? 왜 돈이 아니고 성공이 아니고 건강이 아니고 성취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선한 것들이 있을지라도, 성령님을 주신다고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어떤 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J.C.라일은 이렇게 잘 설명했습니다. "성령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 생명, 빛, 소망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이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성자 하나님의 죄를 씻어주시는 보혈, 그리고 복되신 삼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이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저 세상에서는 영광과 존영을 누릴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약속을 따라 뻔뻔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까? 먼저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미지근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입니다. 미지근한 기도는 내가 구하고도 잊어버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내 당면한 필요는 절박하게 구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냉냉한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 수준이며 영적 상태의 바로미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뻔뻔스러우리만치 담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따라 구할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여기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이 중요한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해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그 뜻을 따라 구할 때 심지어 뻔뻔스러운 담대함으로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외워서 주문처럼 따라해야 합니까? 주님은 그런 용도로 사용하라고 소위 주기도문을 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맞춰서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보지요. 자녀일 수도, 배우자이거나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음은 믿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뻔뻔하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회심을 하였다면,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시작하신 거룩한 일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이루어주시기를 뻔뻔하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떡을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던 손님대접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미덕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나 건강이나 성공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는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와 건강, 성공을 위해서 뻔뻔스럽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나아갈 수는 없지만, 부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삶의 모든 영역, 모든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뻔뻔하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에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친구의 회심을 위해 60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당당하고 뻔뻔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하늘 아버지께 구했습니다. 그 친구는 뮬러가 죽은 뒤에야 회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고 기준에 도달해야만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응답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 긴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천국에 가서야 그중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님을 주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것을 깊고 풍성하게 경험합니다(롬 5:5).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 마음이 식어질 때, 하나님께 뻔뻔하고 집요하게 나아가 성령님께서 내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잘 대접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염치 불구하고 뻔뻔하게 옆 집 친구와 그 가족을 깨우는 당당함으로 포기하지 않고 요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보셨습니까? 그것을 주기를 귀찮아 하는 친구일지라도, 그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 때문에 결국은 요구한 것을 주었습니다. 하물며 무한히 선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어찌 이 친구에 비하겠습니까? 기도는 젖은 수건을 짜서 물을 받아 내듯, 하나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소 뻔뻔스러운 당당함으로 가지고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고 우리의 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