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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9 - 기도하는 신앙 (6) - 쉬지 않는 기도

데살로니가전서 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2-04

말씀내용
쉬지 않는 기도(살전 5:17)

우리는 신앙의 성숙이라는 큰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 소주제로서 기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초 4주간 잠시 말라기의 말씀을 상고하였고 오늘부터 다시 기도의 주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가장 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의 자녀들인 어린 아이들이 기도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기도는 오랜 신앙의 이력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학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도 아닙니다. 누구라도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 어린 아이처럼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나 목사라고 할지라도, 기도를 쉽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에서, 그리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삶에서 기도는 모든 사람의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도는 모든 은혜가 베풀어지고 모든 죄를 대적하며, 모든 선한 것을 얻고, 각 단계마다 우리의 온전한 순종이 관련되어 있는 단 하나의 의무다. 기도를 제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부패한 본성이 기도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기도하려 할 때마다 얼마나 주의가 산만해지고 피곤에 지치는지,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해 본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안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상태가 얼마나 복될지는 그것에 크게 좌우된다." 존 오웬의 이 말을 고려할 때, 만일 누군가가 기도가 제일 쉽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신앙의 도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잘 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해야 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1. 기도: 수단이 아닌 목적, 결과가 아닌 과정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내용을 본문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어서 주목하고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의 과정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그 자체를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 대부분이 기도에 바르게 접근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피터 포사이스의 말입니다. "기도의 과정 전체가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기도를 발전시키며 기도할 힘을 더욱 불어넣기 마련인 것이다(p.28)."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기도를 위해서 기도한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입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나서 내가 무엇을 얻어냈는가에 대한 결과로 그 대화를 평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의미있고,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목적입니다. 더 깊어지기 위해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대화를 더 많이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피터 포사이스가 한 말의 의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를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기도를 너무나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해봤자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게 없어. 기도가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태도를 반영합니다. 기도의 결과로만 기도를 판단한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근본원리를 적용해보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문은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이 답은 신앙의 근본원리를 밝혀줍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늘 이 원리로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과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도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가 말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기도 자체가 목적, 그것도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기도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기도가 결과를 이루려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결코 여러분은 기도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고, 언제나 기도는 의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정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기도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거나 즐거움이 아닌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기도가 단순한 의무 이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는 이 명령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과 소통할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다울 수 있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2. 언제 기도하는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주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시지만, 실제로 우리가 언제 정말 기도하게 됩니까? 제가 기도의 주제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한 질문들을 달라고 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언제' 기도하는가에 관한 질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새벽기도는 꼭 필요한가? 주일이나 예배시간에만 기도하면 안 되는가? 하나님은 언제 기도해야 좋아하시는가?"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들은 이미 어느 정도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꼭 필요합니까?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기도를 의무나 준수해야 할 사항으로 이해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기도는 꼭 필요하지만 새벽기도가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을 좀 바꾸어 표현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보, 우리가 피곤하고 힘든데 이 시간에 꼭 데이트를 해야하겠소?" 자, 여러분이 아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일이나 예배시간에만 기도하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보아도 더 보고싶고 만나도 더 만나고 싶어하는, 결혼을 앞둔 연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전화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때만 대화를 나누도록 할까요?" 대답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기도해야 좋아하시는가?" 성경적인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면 더 좋아하시고 더 잘 들으십니까? 아니면 밤입니까? 시편에는 새벽, 이른 아침에 기도한다는 표현들 만큼이나 밤, 그것도 한 밤 중에 기도한다는 표현들도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상황이나 체질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무속 신앙의 형태가 기독교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새벽기도회가 된 것은 이상하거나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말씀의 경계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잘 맞는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편의에 따라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거의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새벽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추천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 미명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막 1:35). 그러나 물론 주님은 종종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셨고, 특정한 때가 아니더라도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기도해요. 설겆이하면서도, 청소하면서도, 심지어 연속극을 보면서도 기도해요." 사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늘 TV보면서, 혹은 어떤 일에 몰두하면서 나누는 수준이라면, 그것이 어찌 정상적이고 깊고 성숙한 대화라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면, 무엇을 하면서 대화를 하기 보다 별도로 시간을 떼어놓고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를 위해 시간을 떼어놓고 정해놓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게으름으로 인하여 결코 제대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시간을 정해놓고, 여러분이 정말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을 가볍게 깨뜨리지 않듯이, 그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기도를 잘 할 줄 모르던 시절에, 새벽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가 잘 되든지 되지 않든지 무조건 그 시간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있었답니다. 그렇게 상당한 날들을 보낸 뒤에 그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방법이 왕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점에서 저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모두에게 율법 규정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기도를 훈련하려는 사람들이나 기도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추천할 만 합니다. 사람의 몸이 어떤 것에 익숙해지는데 보통 40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과 시간을 정하고 40일을 새벽에 나와 기도를 하다보면 몸이 익숙해지고, 다시 기도를 회복하고 기도의 삶을 자신 안에 습관처럼 길들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걸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보고 고쳐준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3:1)." 사도들은 '제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그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전과 오후와 일몰시간에 기도를 했던 유대인의 관습대로 기도를 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제 구 시는 오후 3시의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시간을 정해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3. 필요에서 존재로
자, 좀 더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합니까? 이것은 단순히 새벽이나 밤 혹은 몇시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시간적 의미에서 다루었는데, 이제 사건적 의미에서 생각해보지요. 이것을 카이로스적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게 됩니까? 절박한 필요가 있을 때입니다. 무엇이든 척척 이루어지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기도합니다. 그것도 절박한 상황일 때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도 곤고한 삶의 자리로 내려갈 때에는 기도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기도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곤고하다고 해서 다 기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병이 들어 곤고해졌을 때, 오히려 더 하나님을 대적한 아하스 같은 유다의 왕도 있으니까요.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대하28:22)."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오라고 부르시는 싸인입니다. C.S.루이스의 말대로,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소리지르시는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왔다면, 이제 그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절박한 상황이 편안해지면 기도를 그칩니다. 물론 성경에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지만(약 5:13), 이 말씀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대치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통성기도는 길선주 목사님이 맨 처음 시작한 것인데, 통성기도를 하되 내 기도 소리가 내 귀에 들릴락말락 하게 해야 합니다. 요즘 통성기도는 '오, 주여!' 하고 만세 삼창하듯이 소리를 높이는데 하나님이 귀 먹었나요? 기도란 이불 속에서 내외간에 얘기하듯이 속닥속닥 해야 재미있지 수 백 명이 모여 떠들면 서로 방해만 돼요.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데 소곤소곤해야 기도가 더 맛있고 하나님과 잘 통해요." 일상적인 기도가 어떠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하는데 늘 소리 소리지르면서 하는 부자 관계가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때로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도 아들을 향해 큰 소리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서 그러는 것이지 일상적 대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소리 지르고 부르짖어야 기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미숙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소리를 높이거나 부르짖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과 곤고함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그 기도는 "주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이 곤경에서 건져 주십시오. 이 문제를 좀 해결해주십시오"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우리의 기도도 중단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제 진짜 기도를 해야 할 때인데, 여기서 기도가 그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것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 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필요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로 가는 과정이 없습니다. 여기가 기도에 있어서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부분입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제게 허락해주십시오."하는 기도에는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는 자리까지 가면 거기서 자기 부인이 요구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내가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는 그것인지, 그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나 자신의 변화인지를 구분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내가 그 필요 때문에 절박하게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바라시는 것은 그걸 달라고 매달리는 수준이 아니라, 그 필요 때문에 나를 하나님께 나오게 하셨고 하나님 앞에 나온 나 자신을 보게 하시는구나"하는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구하는 그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나오도록 때로는 우리에게 절박한 상황을 주시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나의 실존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비로소 자기 부인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에는 치열한 씨름, 자기 부인의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다면, 바로 이 자리까지 이르러야 하고 그 씨름을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구하던 것을 얻었다고 해서 기도를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의 자리에 이르게 될 때, 성도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드디어 읽고,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원하는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으로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더 들어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존재를 보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구하고 있는 그 필요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내가 구하는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길러가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필요를 간절히 구하는 자리입니까? 그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십시오. 이 기도의 씨름, 과정을 피하지 마십시오.

4.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절박한 필요 앞에 있을 때, 너희를 도울 분이 계시다. 절박할 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A. 의무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의무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인 동시에 은혜입니다. 피터 포사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아래서 올려다보면 무거운 짐이지만 하나님 곁에 서서 내려다보면 복이다. 기도는 큼직한 날개와 같다. 날개 때문에 체중이 증가하지만 그것이 있기에 날 수 있다." 기도가 의무이자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즐겁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부단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씨름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가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 씨름을 허락하십니다. 이 기도의 씨름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의무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B. 육신적 기도에서 영적 기도로!
또 한 가지,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려면 육신적 기도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육신적 기도는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간구하여 얻어내는 수준의 기도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언제 아이들이 더 자라서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선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깊이 나눌 수 있을까?" 어린 자녀들이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할 때에 그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이쁘고 즐겁지만, 장성한 후에도 그런 관계로만 자식들을 만나기를 기대할 부모는 없습니다. 마치 친구처럼, 마음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게 되는 날을 꿈꿉니다. 또 의당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육신적 기도에서 영적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요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의 경험들이 우리 신앙 생활에서 점점 더 많아질 때, 우리 신앙생활은 자기 의와 교만과 거짓 경건으로부터 벗어나 참되고 아름다우신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