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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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8 - 기도하는 신앙 (5) -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

누가복음 22:39-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2-24

말씀내용
기도하는 신앙(5)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눅 22:39~46)


우리는 지난 주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상고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욕심을 따라 무제한적으로 기도하여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셨듯이 그렇게 기도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기도를 주셨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기도는 내가 이루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우리가 늘 당면한 필요를 놓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언제나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믿음의 부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던 주님의 기도에서 주목하려는 주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셨는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주님께서 세 차례 기도하셨다는 것과 이 시간이 그리 짧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번번히 잠에 빠져든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오래,’ 또 ‘어떻게’ 기도하셨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셨는가 입니다.

1. 자기 부인: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 내용은 단순하고 짧습니다. 42절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짧게 기록된 주님의 기도는, 대제사장 기도라 불리는 요한복음 17장의 긴 기도 본문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로 깊은 씨름을 하신 뒤, 우리의 참 대제사장으로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기도의 본질을 잘 드러냅니다. 이런 말은 칼빈이 지적하듯, 무슨 삼단논법 같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이 되면 이해하고 기도가 가능해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거룩하신 영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2. 기도의 출발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어떤 분 앞에 서 있는지, 어떤 분께 말씀드리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무한하고 영원히 불변하시며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긍휼과 인자와 자비는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 앞에서 어떤 죄악도 용납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만왕의 왕 앞에 나아가 아뢰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비천하고 약하고 아무 것도 아니며 죄악으로 가득한 존재인지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보여주었던 반응을 보십시오. 그는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때,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말할 때 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믿음에 속한 모든 것들을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적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밖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도 경외함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칼빈이 자신의 삶의 모토로 삼았다고 하는 “Coram Deo,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라는 것은 그에게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읽어본 몇 권의 칼빈 전기에서 느낀 것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도라고 주제에서 자기 부인의 주제를 다루는 출발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태도, 우리의 열심, 우리의 언어가 기도의 출발점이거나 중심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습니다. 참 강하고 질깁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그 누구라도, 그가 진정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 거룩하고 광대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그는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무엘도, 다윗도, 다니엘도 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요한도,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감정, 이 경외감 그리고 그 경외감이 가져오는 자기 부인,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하나님 앞에 선 사람,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이 하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아,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느끼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뜻을 하나님의 눈으로 살피셔서 혹시 그 안에 악한 것이 있지 않은지 살펴 달라고 구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그 하나님께 무엇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설 때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어떤 분 앞에 나아가고 있으며 어떤 분 앞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3. 기도는 과정이다.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기도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도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 아래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진정한 기도는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과 동의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쓴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그분을 아는 지식, 그분을 향한 신뢰가 없이는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은 당신의 원하시는 것을 성부께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이 잔이 주님에게서 옮겨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시는 주님은 한 가지 분명한 단서를 붙이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란 말입니다. 당신의 원하심을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조건이 있는 간구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맞다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말씀하십니다. “내 원 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먼저 이 구절과 관련한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하실 모진 고난과 죽음이 두려워서 이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불과 물 속에서, 온갖 모진 고문 속에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은 것을 봅니다. 주님의 죽음은 순교자들이 믿음을 위해 죽었던 영광스러운 순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의 모든 죄악을 당신께서 홀로 짊어지시고 율법이 정한대로 형벌과 저주를 당하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성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보게 되심으로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쓰고 있는 것입니다(사 53:10~11).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실제로 버림 당하신, 유기된 자의 절규였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유기된 분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끊어짐을 당하는 저주와 심판의 죽음을 두려워하셨고, 이것을 피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서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두려운 것입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어보지 않아서, 그 이후에 내가 어디서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과 그 의미를 온전히 아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셨습니다. 루터의 말대로, 그는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분이었습니다. 아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셨던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하게 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가 무한하다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아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신뢰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실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 신뢰입니다. 그분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그분이 내 가는 길을 아시며, 그분만이 최상이 무엇이고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은, 필연적으로 기도를 낳고, 이 기도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은 사실 믿음의 결과이자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성도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매일 자아가 살아있고 죽지 않아서 우리는 그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기 쉽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가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점에서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열매는 기도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사람을 만듭니다.

4. 야곱의 기도(창 32:24~32)
여기서 우리가 야곱의 기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수고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야곱을 기다리는 것은 야곱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가는 형 에서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없고 두려웠습니다. 모든 가족과 가축과 소유를 다 앞서 얍복 나루로 건너 보냈습니다. 홀로 남은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두렵고 편치 않았습니다. 야곱에게는 피하고만 싶었던 잔, 에서가 있었습니다. 그 밤에,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씨름을 걸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천사라는 사실을 압니다. 야곱은 밤에 찾아온 씨름꾼 천사와 밤새 씨름했습니다. 호세아서는 이것을 야곱이 울며 간구한 기도였다고 말씀합니다(호 12:3~4).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날이 새어 가려고 하는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축복하고 떠나갑니다.
자, 기도와 관련하여 이 내용이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도록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자기 요구를 내세워라”입니까? “절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과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믿게 되면, 고집센 이상한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자기 꾀와 잔머리를 굴리면서 살아왔던 인생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람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그런 기질, 그런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는 드디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붙잡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설명입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호 12:4).” 야곱은 울며 간구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 강한 사람, 야곱이 자기를 부인한 자리, 자기가 패자라고 인정한 그 자리에서 믿음의 승리가 일어난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게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는 것입니다. 그때, 진짜 기도가 시작됩니다.

5.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해서 우리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가 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모든 기도의 핵심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입니다. P.T.포사이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크고 효과적인 기도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목적과 사역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단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되면 대단히 강력하다. 그러한 기도는 처음에는 삐꺽이지만, 나중에는 미끄러지듯 진행된다. 그 단계에 접어들면 우리 속에 스스로 사고하는 듯한 생각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 속에 스스로 기도하는 기도들이 있게 된다. 이렇게 속에서 저절로 전개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생각이고 또한 가장 훌륭한 기도다.”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는 힘을 얻고,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때 기도하는 사람은 거룩한 희열을 경험합니다. 최고의 행복과 위로, 하늘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가 오르게 되는 기도의 절정입니다. 이런 기도는 자신을 속이거나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그 자리입니다. 내가 기도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며, 내 혀가 말하지만 내 혀를 움직이시는 성령님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뵙게 될 때, 그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기도할 힘과 기쁨과 행복을 얻습니다. 그러니 왜 사도 바울이 그토록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기를 구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게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면서 우리의 기도가 변합니다. “내 원대로!”라고 말하는데서 점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6. 스펄전의 강단기도
찰스 스펄전은 강단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인내할 힘을 주옵소서. 저희 중에 어떤 이는 건강이 회복되기를 구합니다. 하지만 저희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옵시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를 치료하여주소서. 어떤 이는 고난에서 벗어나길 구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이 기도를 듣는 성도들은 불안함을 느꼈을까요? “왜 목사님께서 건강이 회복되도록, 치료해주시도록,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하시지 않는가?”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은 이 기도로 인하여 기뻐했을 것이고 평안을 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에게 최상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역시 자신의 뜻을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복된 길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이런 은혜와 믿음을 구하십시다. 우리 인생이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이끌어주심을 알아 모든 연약함과 고난과 버거운 인생 길에서 인내와 감사함과 평안함을 누리도록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