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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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7 - 기도하는 신앙 (4) - 왜 기도를 주셨을까 ?

요한복음 14:12-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2-17

말씀내용
기도하는 신앙(4) 왜 기도를 주셨을까 (요 14:12~15)


1. 처음에 제자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그들은 얼마나 성부 하나님과 깊은 기도의 사귐을 누렸을까요? 복음서가 주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그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는 기록입니다(눅 22:44,46). 이것이 3년여의 세월을 주님과 함께 보낸 제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은 조금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는 많은 것을 아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다면, 이때 제자들의 기도는 예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2. 이제부터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과 지금처럼 함께 계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에는 근심이 가득하고 주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이 맥락에 오늘 본문이 놓여 있습니다. 본문은 기도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서 주님은 왜 기도의 주제를 꺼내셨을까요? 주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이유를 말씀하시려고 기도의 주제를 꺼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시면 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기도’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전 보다 놀랍게 하나님과 교통하게 될 것이고, 주님이 하셨던 일을 계속하고 그 보다 큰 일도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A. ‘내가 하는 일’과 ‘그보다 큰 일’(12)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맥에서, 보혜사 성령이 오심과도 깊이 연관됩니다. 주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도와 주님이 하신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보다 큰 일’도 한다는 말이 우리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일’이란 말은 주님이 행하셨던 이적과 기사처럼 큰 일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이적이나 능력 행함과 연결되고, 주님께서 이 주제를 다루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이적을 행하는 수단이 되고, 이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도 시대에 국한된 약속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더 핑크가 대표적입니다. 만일 본문을 이적과 능력의 차원에서 보게 되면, ‘믿음이 없어서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라는 해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실 때 의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러 오셨습니까? 주님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본질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주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신 일을 아시지요? 제자들이 기뻐 돌아와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항복하였다고 말씀드리자(17)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눈에 보이는 엄청난 이적 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변화 즉 거듭남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적과 기사보다 큰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고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지 않으시고 거기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그리고 교회는 전세계적인 추수를 이룰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의도입니다. 12절은 제자들과 이후의 교회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될텐데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 전세계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선교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B. 누구에게 주어진 약속인가?
이것이 누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까? 여기서 문맥이 중요합니다. 지금 주님은 가룟 유다가 나간 뒤, 참된 주님의 사람들만을 놓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거듭난 자들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들이고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만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만, 주님의 제자들만 주님의 하시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 ‘주님의 일’이라는 주제는 기도의 주제로 이어집니다. 기도도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기도는 오직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고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특출난 자’에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만 주님의 일을 하고 더 큰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그렇게 합니다.

3. 기도의 조건
주님께서 기도를 말씀하실 때, 조건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A. ‘내 이름으로’의 의미(13,14)
먼저, 13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처럼 무엇이든지 내가 가지고 싶고 원하는 것을 구하고 마지막에 ‘예수 이름’을 갖다 붙이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무슨 마술적 능력이라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은 13절과 14절에 반복되는데,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만 기도할 수 있고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과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고, 어떤 이름을 내가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위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알고 계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것이 12절의 요지입니다. 이 근거 위에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행하시겠다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인격과 공로에 근거하여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신자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신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드리는 기도는 마치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기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착각하는 부분은 기도의 응답을 은혜가 아닌 보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알고 기도한다면 그 응답은 보상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응답이 보상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내가 열심히 며칠 동안 밥 안 먹고 기도했더니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이 들으셨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비기독교적이고 반은혜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 이름으로’ 한 기도입니다. 내가 목사이고, 선교사이고, 장로이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니까 심지어 내가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도 응답를 은혜가 아닌 보상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로 받는 모든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어떤 근거나 자격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은혜로운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B. 사랑하면 순종한다(15; 약 4:3).
그러나 기도의 ‘조건(?)’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더 부연됩니다.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13절과 14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12절에 한정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신자와 교회가 감당하려고 할 때, 기도가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11명의 제자들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랑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종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순종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뜻을 이루어 주고 그의 기쁨을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누가 기도하느냐? 12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 주님이 하신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이루고 싶고, 주님의 마음이 자기 소원이 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기에 ‘무엇이든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4:3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자기 정욕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4. 기도의 응답
A.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다(13,14)
예수님은 13,14절에서 ‘내가 행하리니’라고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실 것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친히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친밀하신 주님께서 직접 행하시겠다고 하시니 제자들에게는 큰 확신과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을 지나 승천하사 영광을 받으시면 주님은 전능하신 창조의 주로서 모든 신자들의 기도를 친히 들어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일을 할 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죄인을 회개하여 구원하는 일을 할 때, 또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과 방해와 핍박과 모든 상황에서 그들이 기도할 때 주님은 응답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실패할 수 없는 시도이고, 100% 응답이 보장된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청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은 『기도의 응답』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의 생애 동안에는 이 세상에 응답되거나 성취되지 않는 기도가 있을 수 있다. 유대인의 회심, 하나님의 대적들의 궁극적인 멸망, 복음이 온 세계에 충만케 되는 것과 같은 기도들은....이 모든 기도들은 사라지지 않고 응답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의는 영원하신 의이며 그러므로 그 효과는 영원한 것이므로(단 9:24)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인 기도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 안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이후 시대에 응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핍박자들을 위한 스데반의 기도는 스데반이 죽고 나서 사울에게 응답되었다. 이와 같이 유다에 대한 다윗의 기도는(시 109:8,9) 천년 후에 응답되었고, 이는 사도행전 1:20에 나타나있다. 이와 같이 왕들이 진리를 알게 되며 이로 인해 성도들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되기를 위해 드린 초대교회의 기도는(이는 네로 시대에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딤전 2:2) 300년 동안 응답되지 않았고, 콘스탄틴 시대에야 성취되었다."

B.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다(13).
두번째로 기도를 통해 일어나는 결과는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에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내가 구한 것을 얻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영광스러운 차원을 가집니다.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믿는 자요,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5. 기도와 믿음, 자기 부인
사실 제자들이 주님이 하시던 일을 한다는 것, 아니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을 겁니다. 기껏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것이 전문인 사람들, 세관에서 세금을 걷던 사람이 어떻게 주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열쇠가 기도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황금이나 마술적 능력이나 능가할 수 없는 지식이 아니라, 기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능력이 아니라 믿음과 기도의 주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도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믿는 자가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가 아닌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너희도 할 수 있어”하는 식으로 자신감만 심어주는 리더가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주셨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영적 가난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부족, 아니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 앞에 인정하지 않는 한, 사람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은혜의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깊이 찾아오셔서 심령을 세차게 흔드시고 변화시키지 않는 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인간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일을 맡기십니다. 주님이 하시던 일,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려분은 그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기도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이런 저런 전도 훈련을 받았고 사역자 훈련을 받았으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먼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기 부인을 전제로 합니다. 기도는 은혜의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유입니까? 여러분은 죄인둘이 구원받기를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 안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거듭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 기도하십니까? 언젠가 재정적 여유가 더 많아지고 인력이 더 생기면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건 재정이나 인력이 아니라, 오직 기도, 나를 믿는 자들이 내 이름으로 구함으로써 내가 이룰 일들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친히 행할 것이다!”

6. 기도로,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위하여 살라!
기도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거나, 능력을 행하는 마술적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를 주신 목적과 의도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감당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신자는 잘 먹고 잘 살려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런데 쓰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인생의 최우선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많은 반대 때문에, 제 정신으로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삶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게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분이 주님 자신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본적인 필요는 구하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아시며 자녀들에게 공급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만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풍성하게 위로하십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기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왜 기도하십니까? 때로는 사업을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할 이유로 제시하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당신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성실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지만, 일반 원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통과 시련도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업하려고, 취업하려고, 성공하려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신자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를 주셨습니다.
이언 머레이(Iain Murray)는 『청교도의 소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보배는 성도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다. 성도들의 눈물이 담긴 병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멸망을 위해서 부어지는 진노의 병이다. 성도들의 기도는 이를 위해 많은 세월 모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에 그토록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그 많은 세월 동안 기도가 모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지금 응답되는 것이다.”
이런 성도,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자신들의 필요와 해결해야 할 난제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무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