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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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6 - 기도하는 신앙 (3) -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합니까 ?

마태복음 6:5-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2-10

말씀내용
기도하는 신앙(3)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가? (마 6:5~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한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지만(마 6:9),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7절도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도가 아닌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본문이 다루는 바, 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 코이노니아 그룹에서 나눠진 “기도에 관한 질문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기도하는 신앙] 시리즈에서 차근차근 그 질문들을 다룰 것입니다.

1. 왜 기도하지 않는가?
본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이 설교제목을 뒤집어서,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가?”를 먼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또 공급해주실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요? 믿음이 너무나 좋아서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기도를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고 사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또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10~15초 정도의 식사기도나 아주 위기의 순간에 하는 기도 외에는 거의 한 적이 없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더글라스 오도넬(Douglas Sean O’Donnell)의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는커녕, 마치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것을 그냥 땅 속에 묻혀 있는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함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곧, 믿음이 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된다는 것이다(롬 10:14-17).”
이 말들은 공통적으로 기도가 신앙의 표출임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은 기도로써 표출됩니다.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곧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참 신앙은 기도로 표출됩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로 표출됩니다. 기도는 참 신앙의 바로미터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없거나 너무 약해서입니다.

2. 기도라고 다 기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고 모든 기도가 다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과거에 무당과 불교의 중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매일 새벽 예배당에 나와 백일 기도를 작정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를 할 줄 몰라 사람들의 기도를 들었는데, 그 내용이 전에 몸담았던 종교들의 신도들이 드리던 기도와 하등의 차이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계속 구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만 달랐답니다. 많은 교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이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는 “기도라고 다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이 하는 방식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의중을 따라 우리 자신의 기도와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해를 점검해봐야만 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신 기도가 아닌 것
본문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기도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이 하는 기도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A. 외식하는 자들이 하는 기도
5절을 보지요.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하는 자들을 언급하실 때, 주님은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께서 여겨주셨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동기와 목적은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기도의 사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처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 즉 회당과 큰 거리의 모퉁이가 되곤 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중심을 간파하신 주님께서 정곡을 찌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일 만큼 말입니다.
거짓된 기도, 하나님께서 참된 기도로 여겨 주시지 않는 기도는 자세나 장소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기의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동기로 한 기도는 이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을 테니 그들이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상은 없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본래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기도 말고 참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은 닫히는 문이 있는 방이고,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도 나를 주시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비밀히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문을 닫고 들어가보니 마귀와 함께 들어와 앉아있더라 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기도하러 골방으로 들어가면서도 누군가 자기 뒷모습을 주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기만적 죄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는 것이고 거기에 사람을 의식할 자리는 없습니다.

B.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기도로 여겨주지 않으시는 기도는 이방인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이방인의 기도의 특징은,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많은 말을 의미 없게 반복하여 쌓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길게 기도하는 것이나 어떤 기도를 반복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밤을 지새워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같은 간구로 세번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46). 본문에서 주님이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이방인들이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기도를 비난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효력을 가지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했던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그리고 ‘저녁 소제 드릴까지’ 계속 바알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부르짖었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왕상 18:25~29). 또는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을 때, 많은 무리가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소리질렀던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런 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기도에는 내용도, 사상도 없습니다. 그저 부르짖고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무의미한 반복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하면 웅장할 수도 있고 대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용 없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이런 것은 그 어떤 내용도 담지 않고 있는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열심, 이 긴 기도에 감동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기도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어거스틴은 “기도할 때, 많은 말은 제거하고(하지 말고) 기도는 많이 하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5:1~2 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마르틴 루터도 잘못된 기도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아주 실제적인 권면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brief, frequent and intense)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초대 교부들도 이런 기도를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가령,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어떤 일을 하다가 하늘을 향해 숨을 한 번 내쉬거나 또는 한 두 마디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간단하게 하면, 더 자주 할 수 있습니다. 자주 하되, 강렬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사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기도를 처음에 배우고 시작할 때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오래 해야한다고만 배우면, 기도 생활에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시작 조차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나는 몇 시간 기도했다”는 식의 책이나 간증들을 접할 때, 저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은 기도의 대가들이 거의 강조하지 않았던 것들이며, 기도의 본질과는 무관하고,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 듯 보이고, 끝으로 많은 신자들을 낙심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그리고 오래 기도하는 것이 마치 기도의 왕도인 것처럼 되는 것은 그렇게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속에서 오래 기도할 수 있고 그것은 필요합니다. 다만, 오래 기도하는 것을 유독 강조하는 것들은 우리 기도를 돕기 보다는 낙심하게 하거나 주눅들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반하여, 어렵고 무겁게 기도의 짐을 지우려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실 뿐더러, 오래 기도해야 들으시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물론 이것은 금식기도와 같은 극한 기도의 방식에도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보통 기도는 효력이 없고 금식기도만이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성경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어떤 기도문을 위워 반복하는 형식의 기도가 가지는 위험성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 태도로 주님이 지적하신 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처럼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도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4.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가?
8절은 이방인들처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즉 “간단하게,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기도할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알고 계시니까, 이방인들처럼 소리 소리지르고, 무의미한 말들을 반복해서 하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합니까?”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어려운 처지가 무엇이며, 또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가 알려 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니 구태여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그런 것들을 알리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졸고 계시거나 주무시고 계셔서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깨워드려야 비로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여섯 가지 기도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저는 이것으로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을 찾고 그를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진지하고도 열렬한 소원으로 우리 마음이 항상 불타오르게 해 준다. 또한 어떠한 사정이 생기든 하나님을 거룩한 닻으로 여겨 그에게 의지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욕망이나 바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이 보시도록 그대로 내어놓기를 배우며, 또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놓는 법을 배우게 된다. 셋째로, 기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은택들을 진정한 감사와 찬송으로 받게 해 준다. 우리의 기도가 그 모든 은택들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참조. 시 145:15-16). 넷째로, 우리가 구한 것들을 받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깨닫게 되고 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욱더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다섯째로,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그 축복들을 더욱더 큰 기쁨으로 환영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째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을 통해서 확증하게 해 준다.”
여러분,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기도가 이런 의도로 주어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기도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관점이 필요합니다.

5.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떤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는 동기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경외감으로 나아가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18?19).”
또 어떤 기도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기도입니까?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믿고 무의미한 말들을 긴 시간 동안 반복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비록 짧고 간결하더라도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시작하십시오. 일을 하다가도 순간 순간 하나님께 나아가 강렬하게 은혜를 구하십시오. 뉴스를 보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연습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별도로 기도할 시간을 30분~1시간을 떼어놓는 것은 영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짧더라도 자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때마다 간절함과 강렬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기도하기 전에 이미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뜨겁게 해줍니까? 그 사랑하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뜨거운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들은 아예 잘라내십시오. 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기도를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기도의 열망을 부어주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쁨과 감격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