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신앙과 성숙 24 - 기도하는 신앙 (1) - 하나님과의 사귐

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24 - 기도하는 신앙 (1) - 하나님과의 사귐

출애굽기 33:11, 신명기 34: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1-26

말씀내용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질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욥의 고백도 인상적입니다.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욥 29:4).” 여기 하반절을 개역성경은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 ‘우정'이라는 말은 본래 친구 사이의 비밀 대화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만큼 친밀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는 표현은 놀라울만큼 인상적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인물, 애굽 제국의 왕자로 있다가 광야로 내쫓겼고 거의 포기한 듯한 인생을 살다가 인생 노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인생의 전성기를 누렸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목전에서 죽은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이 모세를 조명하는 이 구절에 주목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입니다. 애굽에서 살았던 처음 40년도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보낸 중반 40년은 어땠을까요? 그때에도 그랬다는 증거를 갖기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 계기는 호렙산의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일입니다. 물론 평생 하나님을 알아왔고 하나님께 기도했겠지만, 그는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뭔가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사귐과 친밀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오스왈드 샌더스(Oswald Sanders)는 그의 책 Enjoying Intimacy with God 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정도에 따라서 네 가지 차원 혹은 써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밖에 있는 써클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의 가시적 임재를 볼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는 없었던 수준입니다. 출 19:11~12을 보십시오.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 산으로 접근할 수는 있었지만 그 산에 올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에게만 가까이 올라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출 24:2).”
하나님께서 조금 더 가까이 오도록 허용하신 세번째 차원의 써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들은 모세를 제외하고도 아론과 그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등 제사장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명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4:9~11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어떤 가시적 현상으로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모든 백성에게 허용되지 않은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체험을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산정상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안으로 두번째 써클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가까이 경험하는 차원입니다. 출 24:13~14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모세는 아론과 장로들을 산 아래에 기다리게 하고 산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여호수아가 수행했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대목입니다. 모세 외에는 아무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 길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행비서로서 따라 올라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중에 모세의 계승자로 여호수아를 지목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야말로 모세 다음으로 하나님께 가장 친밀하고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33:11 하반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진 밖에 쳐놓았던 회막(tent of meeting)에서 기도를 마치고 진으로 돌아와도 여호수아는 여전히 그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렸고, 사모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심에 있는 써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장 가까이서 누리는 차원입니다. 출 24:15~18을 보십시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친밀하게 만나기 위해서 산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단 한 사람 모세 뿐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속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40주야를 하나님 앞에서 지냅니다. 모세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렸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렸습니다.
이 네 써클 중에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거기에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인생을 보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시겠습니까?

모세, 엎드리고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한 마디로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사귀었던 사람 모세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성경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처음 40년도 부모와 떨어져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야 했고, 이후 40년은 광야에서 무명의 목자로 살아야 했으며, 인생의 마지막 40년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결여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하는, 그리고 마음대로 사임할 수도 없는,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마지막 40년의 고된 인생을 견디게 만들어주었을까요? 그가 기도의 사람, 하나님의 친구였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하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친구가 있으면, 좋은 친구가 있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바로를 대면한 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더욱 고달파 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비방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출 5:22~23).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모세를 비방하며 모세와 다툴 때,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출 17:4). 강력한 아말렉 군대를 만났을 때, 그는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함으로써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합니다(출 17:8~16).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겨 범죄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올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달라고 그는 구했습니다(출 32:31~32).
우리는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킬 때마다 모세가 취했던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군이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 보고를 하자, 백성들은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고 기록합니다(민 14:5). 이후 고라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말을 듣고 엎드렸습니다(민 16:4).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공격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자기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이런 깊은 경건과 하나님께 나아감을 알고 배우게 했을까요? 모세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었는가?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든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가 그런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나도 모세와 같은 은혜를 누리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는 갈망과 소원이 일어난다면 그것 또한 은혜이며, 사모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인간 편에서의 수고와 노력을 무위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사람들의 신비롭고도 바른 고백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결단: 방법은 미숙해도 하나님은 동기를 보신다.
먼저 모세에 대한 히브리서의 증거를 보겠습니다. 히 11:24~26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는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였고, 하나님께서 장래에 상주실 것을 바라보고 애굽의 보화를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의 결단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나이 40세 때 일어난 일입니다. 분명히 방법면에서는 서툴렀습니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싸움에 간섭하여 애굽인을 쳐죽이는 사건이 발단이 되어 그는 광야로 도망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동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서 고난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믿음으로부터 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행위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동기를 살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겉이 괜찮으면 다 용납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살겠다는 동기에서 나오는 결단이 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친구는 같은 마음을 품습니다. 믿음으로 살겠다는 동기가 없이, 종교생활에 열심을 낸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광야의 삶과 고난: “즐거움은 감사를 잊게 하지만 고난은 기도하게 한다.”(George McDonald)
모세는 인생의 중반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왕궁에서 보낸 첫 40년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낮아짐 자체였습니다. 모세가 왜 광야로 가게 되었습니까? 동기는 옳았지만 그가 선택한 방법의 미숙함 때문이었는데, 그 미숙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모세가 왕궁에서 왕자로 길러짐을 받으면서 가진 그의 교만함, 그의 자신감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미숙함은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자기의를 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낮추십니다. 그것이 그가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것은 고난이고 낮아짐이었습니다. 낮아지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낮아짐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점에서 George McDonald의 말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즐거움은 감사를 잊게 하지만, 고난은 기도하게 만든다.” 광야는 우리의 기도처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에 광야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낮추사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에게 그 기간은 무려 40년, 인생의 3분의 1이 광야에서 허송세월하듯 흘러가 버렸습니다. 너무 길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모세의 삶 전체를 보십시오. 그의 120년의 삶은 버릴 데 없이 하나님께서 쓰신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애의 한 순간도 낭비하여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세 자신은 허비한 시간처럼 느껴졌을지라도 말입니다.
광야의 삶과 고난이 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자리로 가기 위해, 영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가 거기서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낮추시는데로 낮아지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계획을 도와주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삶
모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주효한 방법은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모세는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에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모세는 하나님을 뵙는 경험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출 3:6).” 그래서 그는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후 모세는 두번이나 시내산 정상에서 40주야 동안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두번째로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얼굴에 반사되어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출 34:29~35).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모세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구했던 성경에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을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미 산정상에서 하나님과 40일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큰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열심과 갈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성공이나 번영이나 성취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것들을 두번째의 자리에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첫번째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갔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2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텐데, 그 근거는 그의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볼 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본다.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기도하다가 신비적 환상을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믿음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다 성도가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 위에 서는 신앙]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고후 3:18).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고 또한 기도의 토대입니다. 말씀이 기도를 이끕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전은 무엇입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그랬듯이, 친구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여러분이 원하는 바입니까? 참된 성도에게 이보다 더 큰 비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다.
우리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한 놀라운 말씀을 봅시다. 요한복음 15:14~15 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성도는 자기 감정이 이끄는대로, 마음의 생각대로 자신을 내맡기고 살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이 여러분 인생의 성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영향력있는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도 여러분의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가에 따라서 그 성패가 결정된다고 성경은 일관성있게 증거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이 가지는 관계가 다른 모든 인간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그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그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이것을 경험하고 누리면서 살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십시오.

천국의 소망은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함에 있다.
천국의 소망도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한 교제에 달려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4을 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이것이 참으로 천국의 소망이라면, 하나님과 시공간의 제약없이, 그리고 우리의 죄악이라는 한계가 없이 교제하고 사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 교제는 얼마나 친밀한 사귐이 되겠습니까? 천국의 기쁨은 바로 이런 사귐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그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교훈과 적용
우리의 신앙과 성숙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오래 교회생활을 했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십시오. 10년을 믿어도, 20년을 믿어도 하나님이 그냥 멀리 계시는 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모른 채 죽음을 맞는다면,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저는 늘 생각해왔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가 가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셨던 영혼들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도록 그 영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라.
그러므로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잃어버린 기회들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고난을 통한 은혜의 기회들이 왔지만, 결국 여러분 자신의 불순종과 영적 부주의함과 영적 게으름으로 놓쳐버린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기회를 잡으십시오.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아무리 메마른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도>를 쓴 P.T.포사이스(Forsyth)의 말입니다. “신앙이 무기력한 상태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영과 통찰이 없는 까닭에 복음을 마음으로 깨닫고 더욱 배워가지 못하며, 그저 설교에서 받는 감흥에 일희일비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대면하여 말씀해주시는 그 깊은 경건, 하나님의 친구로 여김을 받는 그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