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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3 - 말씀 위에 선 신앙 (16) - 설교듣기(8)

데살로니가전서 2:13, 사도행전 17: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1-05

말씀내용
설교듣기(8) 설교와 설교자 (살전 2:13; 행 17:11)


[설교듣기]라는 주제로 전하는 여덟번째 말씀이자 마지막 말씀입니다. 의외로 성경은 설교(하나님의 말씀)를 듣는 것에 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좀 더 다룰 수 있겠지만, 이후에도 별도로 언급할 기회가 많을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
“우리가 오늘 아침에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설교를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까요?”

데살로니가 케이스(살전 2:13; 1:6~7;2:19~20)
오늘 본문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도의 말, 즉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사도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해석하고 걸러서 듣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은혜를 받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의 기쁨과 감사가 그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내용은 데살로니가전서 1:6~7에서 조금 더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말씀을 듣자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환난을 능가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결과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공히 인정할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그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삶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자 곧 바울 사도와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됨으로써 주변의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쯤 되니, 사도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해서 찬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이것은 단지 사도 자신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태도에 우쭐해서 자기를 인정하는 자들을 향한 사랑 고백으로 쓴 말이 아닙니다. 사도 자신은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살전 2:4~5). 그는 아첨하지 않았고(살전 2:5)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살전 2:6). 이런 것은 사도가 말씀을 전할 때 가진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거짓 사도나 거짓 교사들이 하던 말이 아첨의 말이었고, 그들이 가진 태도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사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을 사도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케이스(갈 4:14~18)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케이스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4~18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분명히 사도 자신에게는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시험할 만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도의 이 약점을 인하여 사도를 업신여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천사나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태도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지녔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했던 ‘육체에 가시’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사도가 지난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 구절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것입니다(갈 4:15). 하지만 이 약점이 간질(뇌전증)이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심각한 약점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약점은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를 업신여기고 거부하게 만들만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를 천사나 주님을 영접하듯 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처럼, 여기서도 사도는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고백합니다(갈 1:10). 사도는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른 태도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 케이스(행 10:24~26)
한 경우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입니다. 고넬료는 자기에게 보여진 환상을 따라 욥바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하인들을 보내, 오셔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서 깨달은 뒤,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러 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10:24~26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때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 말씀을 듣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베드로가 들어오자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에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을 해야 했습니다.
고넬료는 사도를 자신과 동일한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대한 것처럼, 천사나 주 예수님처럼 대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왜 일개 갈릴리 어부 출신의 노인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까? 고넬료는 이제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데살로니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의 예와 함께, 고넬료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으며 그 결과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향해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이상하거나 낯선 느낌 혹은 불편한 느낌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태도를 칭송하는 말들을 들어보기는 했는데 주로 전문 부흥사이 한 말이 아닙니까? 소위, “목사에게 잘 해라, 그러면 복받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이 세 경우가 우리를 인도하는 결론이 그저 ‘목사에게 잘 해라’입니까? 여기서 이 세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 느껴지는 경우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간절함과 분별함으로 듣기: 베뢰아 케이스(행 17:11)
앞의 경우들이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살펴볼 경우는 말씀을 간절함으로 듣되, 분별하면서 듣는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17:11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의 케이스입니다. 지금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을 받는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간절함에 분별하는 태도가 더해졌습니다. 지금 누가는 간절함과 분별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함과 동시에 비판 정신으로 말씀을 들었다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한 것은, 사도의 말씀을 간절히 듣는 태도의 한 특징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태도로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를 통해서 말씀을 들은 즉시 성경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도의 말에 흠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태도는 사도가 말하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다 ‘아멘’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 태도는 “목사가 하는 말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게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사도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확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수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는 칭송할 만한 고상한 태도였습니다.

설교자의 자리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의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갈라디아 사람들 그리고 고넬료의 경우 뿐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의 경우는 설교자와 설교를 어떻게 동일시하고 구별했습니까? 또 설교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가치가 인정된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사도들은 항상 거짓 사도와 거짓 교사들의 활동을 경계하게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분별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에서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분별은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그는 그리스도 자신을 전하고 높이는가, 아니면 자신을 전하고 높이는가?” 회중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이런 분별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이 말은 무조건 목사에게 잘하라는 식의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전한다는 전제에서 주는 권면입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전할 수 없을 만큼 오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자 자신의 관점과 회중의 관점
설교자에 대한 관점은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를 보는 관점과 회중이 설교자를 보고 대하는 관점으로 구분하여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자 자신을 보는 관점은, 언제나 고넬료에게 했던 사도 베드로의 태도와 같을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나 주님에게 하듯 그 앞에 절하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을 천사나 주님처럼 영접했다고 해서, 자신이 천사나 주님이 된 듯이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들의 태도를 칭송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자신에게 잘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당한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같은 문맥에서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라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7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회중이 설교자를 보는 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중은 사도이기 때문에 따르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8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나 혹은 천사가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용납 조차 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무조건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무지를 칭송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목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설교를 비판적인 태도로 듣는 것 또한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양 극단의 태도가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것을 저는 우려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참된 은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중의 확증이 요구되는 직분
설교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말씀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교회에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엡 4:11).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주께서 친히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묵상하고 깨달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신학 강의와도 다릅니다. 설교는 단순한 성경 공부와도 구별됩니다. 설교는 그리스도 한 분께 초점을 맞춥니다. 설교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의 귀와 마음과 영혼과 양심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회중을 통한 검증과 확증도 받아야 합니다. 회중은 설교자가 이 일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평이하게,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잘 전하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것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그 자리에 무자격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일반적 원리와 실천적 지침들
이제 [설교듣기]라는 주제를 마치면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일반적 원리와 실천적 지침을 말하겠습니다.
균형: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말라.
먼저 균형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나친 것은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뿐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지나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일입니다. 이것이 지나친 태도가 아니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함도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분별하라(마 7:1, 15~16, 20)
두번째는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또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조종당하는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주님께서도 친히 거짓 지도자들을 분별할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런데 좀 더 나가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16,20).” 비판이 아니라 분별을 명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분별하는 일은 모든 지도자들을 향해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바, 마태복음 7:21~23은 사실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은 모두 교회의 선지자와 은사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입니다.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설교자와 설교를 구분하되 분리시키지 말라.
세번째 원리는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하되 분리시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 무지하다면, 결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잣대가 되어야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 기준인 성경을 상식이 대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보낸 선지자들을 많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지자의 말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듣기 싫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이라고 여겼기에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이름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처형했습니다. 마음을 찌른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라.
마지막으로 설교듣기와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의 아름다운 본을 여러분의 삶의 모범으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사람의 말로 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이성과 상식의 귀로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대로(히 4:2) 믿음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갑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사역의 비밀과 신비가 존재합니다.
주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대로, 영의 귀로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리고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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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_Audio/Beth_SW2017/FaithandMaturity/FaithandMaturity23_171105.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