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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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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2 - 말씀 위에 선 신앙 (15) - 설교듣기(7)

예레미야 23:33-4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0-22

말씀내용
22 말씀 위에 선 신앙15 설교듣기(7) 설교가 짐으로 여겨질 때 (렘 23:33~40)


오늘 [설교듣기]라는 주제의 일곱번째 설교입니다. 설교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마는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설교가 듣기 힘들다고 느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명백하게 설교자가 설교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듣는 사람이 아닌 설교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다는 전제에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는 경우입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을 때
언제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까? 언제 말씀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속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 때(왕상 22:1~19)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설교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 경우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말씀의 경우이기도 한데, 또 다른 케이스를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1~19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합은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으로부터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고 합니다. 경건한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행하자고 하니까, 아합은 무려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가 싸워 물리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아합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가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미심쩍어 하는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가 없냐고 아합에게 묻습니다. 8절에 아합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아합은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 미가 선지자가 있는데 미워서 부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합은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 메시지를 주는 메신저를 원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합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미가야 선지자가 와서 전쟁에 나가 왕이 죽고 백성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될텐데, 도리어 그들이 주인이 없으므로 평안히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17). 아니나다를까, 미가야는 이번에도 아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주지 않습니다. 아합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고 결국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의 생각이 언제나 안전하고 옳으며 우리에게도 유익합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삼하 12:1~15; 대하 24:20~22)
두번째로 설교가 목에 걸리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책망하실 때가 아닐까요? 사실 책망은 성경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또 성령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도 책망입니다. 요한복음 16:8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니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역사하실 때, 우리가 책망을 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칭찬만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두 케이스를 보겠는데, 먼저 다윗의 케이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 죽게 한 뒤로 거의 1년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그 부정함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불편한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불편한 마음도 조금씩 무뎌져 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의 죄를 면전에서 책망하십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 12:9).”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하였노라”고 그는 회개합니다(삼하 12:13). 그 회개의 내용은 시편 51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유다 왕 요아스의 이야기입니다. 아달랴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 한 살이던 요아스는 이모부이자 대제사장인 여호야다에게 구출되어 성전에서 6년 간 양육을 받습니다. 그가 7세 되던 해, 여호야다는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고 요아스를 왕위에 올리게 됩니다.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선정을 베풀고 아달랴가 더럽힌 성전을 정화하고 나라의 영적 회복에 힘을 다하던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백성과 왕의 죄를 책망하자, 백성들은 요아스 왕의 명령을 받아 성전 뜰 안에서 제사장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요아스가 취한 가장 쉬운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우리 삶에서 설교를 들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책망을 받을 때,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다윗입니까, 요아스입니까?

설교의 주제가 내 관심사가 아닐 때(요 6:60~61)
또 하나 설교가 들리지 않을 때는 설교의 주제가 내 관심사가 아닐 때입니다. 그러면 졸립니다. 주님께서 설교하실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표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이튿날 아침, 주님이 자기들 중에 계시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백성은 갈릴리 바다 건너로 예수님을 찾으러 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긴 설교가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예표였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떡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먹고 영생하는 떡 자체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탁월한 설교에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그때 주님이 물으십니다(요 6:61).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정곡을 찌르는 지적입니다. 어려운게 아니라 찔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먹고 배부른 떡이었지, 영생도, 주님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것을 간파하시고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요 6:26). 결국 그들은 다 떠나갔고 다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교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관심사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설교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번영의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목사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요는 거듭남입니다. 거듭나야 영적인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영원을 소망하게 됩니다. 거듭날 때 근본적인 관심사의 변화가 동반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읽혀질 뿐 아니라 흥미롭게 되고, 설교를 듣는 데서도 동일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설교가 짐으로 여겨질 때(렘 23:33~40)
언제 설교가 들리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다루려고 하는 경우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설교가 짐으로 여겨지는 경우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나 선지자 혹은 제사장이 와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물으면,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고 답하라고 하십니다.
한글성경만으로는 이 말씀의 뉘앙스를 바르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말에서 ‘엄중한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무겁고 귀찮은 짐’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33절의 원의미를 잘 드러내줍니다. “이 백성이, 또는 예언자나 사제가 너에게 ‘짐스러운 야훼의 말씀’ 이 있었느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곧 내 짐이다. 나는 너희를 벗어 던져버리겠다.” 이 부분을 이해하면 본문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의 칼끝은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긴 모든 백성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향하고 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은 ‘짐스러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에게 ‘짐스러운 말씀을 또 받은게 있냐”고 물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곧 내 짐이다”라고 대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짐으로 여기사 그들을 잊어버리시며 버리셔서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열쇠와 원리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열쇠와 원리를 하나씩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열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다고 느꼈고 느끼게 됩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경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다고 느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령 십일조나 헌금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짐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으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교헌신집회에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인간에게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부모님의 말씀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정직하게 우리 내면에서 느껴지는 부담의 정체를 생각할 수 있다면, 거기서 우리는 사랑의 결핍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의 수치가 높아지면 의무감이나 부담감의 수치는 줄어듭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부담스럽고 짐스러운 느낌은 줄어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지식의 결핍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계속 도와드리고 살펴드려야 할 괴퍅한 분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의 관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 없이 잘 들을 수 있는 열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기본적인 준비를 갖춘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신학 서적을 섭렵하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선지자에게 와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묻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말이 너희에게 짐이냐? 그래, 나에게는 너희가 짐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잊어버리고 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9절에, ‘잊어버린다’, 그리고 ‘내버려’라는 말은 무겁고 귀찮은 짐을 이렇게 치워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언제나 일방적이지 않은 쌍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원얻는 믿음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전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더 이상 그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 무슨 계명을 주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제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렌즈로 그 말씀을 보고 받게 됩니다. 설령, 십일조나 헌금이나 기타 어떤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전제 하에서 듣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심지어 책망도 회개의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을 전제로 말씀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들어야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설교듣기의 열쇠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원리: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을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설교듣기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는 태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의 바로미터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내밀하고 즐거운 관계 속에 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절절이 가슴으로 파고 들어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여 냉랭해지고 무감각해질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냉담한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이 귓전만 때릴 뿐, 심령으로 그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6:11을 보지요.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원리는 일관되게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말씀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며, 특별히 설교를 듣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실제적 권면
이제 몇 가지 설교듣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빠져들어갈 수 있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실제적 권면을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지 마십시오.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피한 것은 아합의 인생에 결정적인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닝의 말씀이 걸린다고해서, 그 말씀을 피하지 마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 머무십시오. 오병이어로 배부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말씀이 걸리자,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떠난 것처럼 행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 심각한 해악을 미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서 일평생 그 자리를 고수하십시오.
셋째, 말씀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지 마십시오. “말씀이 나쁘다, 말씀이 좋다”는 평가를 모두 포함하여 드리는 권면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이 에스겔을 가리켜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의 말씀이 좋다는 판단입니다. 누가 이런 칭송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런 판단을 하는 자들 조차도, “(그) 말을 듣고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겔 33:32).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들은 백성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놀랐고, 주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달랐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마 7:28~29). 하지만, 주님의 설교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그들 자신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넷째, 평가하지 말고 분별하십시오. 평가와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그 복음의 메시지인가? 이것이 정녕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원리를 견지하는 메시지인가? 설교를 들을 때, 부지런히 살피고 분별해야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마십시오. 로마서를 마치면서 바울 사도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신자에게 있어서 말씀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는 그런 자들이 있는지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때에는 시편 141:5을 기억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성령님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는 최고의 치료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얻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도 부정적인 권면이지만, 여기에는 긍정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해달라고,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는 복된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