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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1 - 말씀 위에 선 신앙 (14) - 설교듣기(6)

예레미야 42: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0-15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14) 설교듣기(6) 자기기만을 조심하라(렘 42:1~6)


설교를 잘 듣는 것은 우리 신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알아도 잘 안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 마음의 기만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일찌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렘 17:9). 우리 스스로가 자기 마음의 기만성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일 자기 마음의 기만성을 안다면 시편 기자처럼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리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압니다. 자기 마음의 부패성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스스로 옳다고 여길 것이고, 자신이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도 자기가 옳고 그름과 참됨과 거짓됨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영적 패망과 비참함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마음의 기만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렘 42~43)의 배경
우리가 예레미야 42:1~6을 읽었습니다마는, 제가 설교에서 다룰 범위는 42~43장 두 장 전체입니다. 먼저 이 본문의 배경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은 요시야 왕 통치 13년인 주전 626년이고, 예루살렘이 주전 586년에 멸망했으니까 선지자는 약 40년 동안 예언을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핵심 메시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이니 너희는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순수히 포로로 끌려가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순수히 받으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너희를 돌아오게 하고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유다의 왕들과 귀족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은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도 선지자가 아니냐고 말할 때, 그 종교적 확신은 자기 기만 위에서 견고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러 번 투옥되기도 하고 조롱과 협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거짓 목사들이 많았듯이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우리가 교회에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데 문제가 있겠어? 그래도 주의 종이 하시는 말씀인데 우리가 뭐라고 거기에다 대고 왈가왈부할 수 있겠어?” 이런 자기기만은 무지 속에서 퍼져가는 독버섯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자기기만이라는 독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록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므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여러분은 선지자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월은 흘러서 결국 그 시간은 왔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저항하는 예루살렘을 18개월 동안 포위했고, 하나님의 도성은 결국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성전은 불태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이 싫어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빈민들을 제외한 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군대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두 달이 못 되어 유다 왕족이며 시드기야의 장관이었던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게 됩니다. 이후 이스마엘은 유다 군대장관 요하난에 의해 암몬으로 쫓겨가고, 요하난이 남은 유다 백성의 실질적 지도자가 됩니다. 이때 요하난과 함께 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죽인 것은 아니지만,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가 암살을 당했으므로, 바벨론이 자기들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지난 40년 동안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예언대로 모든 일이 일어났으니,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본문 이해(렘 42~43)
"우리가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소서"(42:1~6)
요하난 일행이 선지자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합니다. 그들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왔습니다(42:1).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던 태도가 연상됩니다(행 10:24). 그들은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자신들을 가리켜 ‘남은 적은 무리’라고 겸손히 말합니다(42:2).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훌륭하게 말합니다(42:3). 그들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이것은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한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42:4).” 참된 하나님의 종이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겠다고 하고, 백성은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하니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요하난 일행은 한 번 더 자기들의 태도를 확증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42:5~6).” 이 말씀은 거의 최종적 인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고 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선지자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말씀(42:7~22)
십일이 지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선지자는 요하난과 지도자들 뿐 아니라 백성의 낮은 자부터 높은 자까지 다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두가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10~22절의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애굽으로 도망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무르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않으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애굽으로 도망가면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 바벨론 군대의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기근, 전염병에 죽을 것이며 피할 자가 없을 것이다.”

지도자들의 반응(43:1~7)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명하게 당신의 뜻을 말씀으로 밝히셨습니다. 이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마치자, 아사랴와 요하난과 기타 모든 오만한 자들이 말합니다. 아사랴는 42:1의 여사냐와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43:2에서는 아사랴의 이름이 요하난 보다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일에서 누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 외에도 ‘모든 오만한 자’가 함께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아사랴나 요하난을 포함하여 예레미야에게 말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오만한 자’들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말입니다.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 43:2b~3).”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용감하게도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자기들이 듣고 싶어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문제아 바룩이 예레미야를 부추긴 결과라는 것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신실한 동료로서 비서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자신을 부정하기는 부담스러웠든지, 그 옆에 있던 바룩을 걸고 넘어집니다. 선지자의 말대로 하면, 결국 자기들은 바벨론에게 죽거나 붙잡혀 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은 결국 모든 백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백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데 여기 예레미야와 바룩도 함께 끌려갑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애굽으로 끌려가서 생을 마감합니다. 슬픈 결말입니다.

문제의 핵심:자기기만(42:20)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처음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그들은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고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라고 했고,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 열쇠는 선지자가 이들에게 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2:20입니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중심을 본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여기 ‘마음을 속였다’는 말은 직역하면 ‘목숨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여러분의 하느님 야훼께 문의하여 달라고 나에게 청하면서, 하느님 야훼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든지 그대로 하겠다고 하였을 때 이미 여러분의 목숨을 내걸었던 것이오.”라고 번역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겠다고 한 그들의 말은, 그들의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장난을 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설교듣기
이것을 좀 더 들어가 보면 자기기만은 결국 자기부인의 결핍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아사랴와 요하난 그리고 그 오만한 자들이, 처음부터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하겠다는 의도를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 자기부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답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고 말한대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좇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부딪힐 때,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자기 뜻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자기부인은 기도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보여주신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은 후에, 기도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자기부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으로 말씀과 기도를 주셨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는 말씀은(딤전 4:5), 우리가 말씀이나 기도만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둘은 함께 가야합니다. 그러나 아사랴와 요하난과 오만한 자들에게서 우리는 기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마치자 마자, 그들은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설교듣기, 혹 하나님의 말씀 듣기는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들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에 믿음을 결부시키는 일, 또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귀로 들음과 순종함 사이에는 기도가 자리합니다. 기도는 자기 부인의 과정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옵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에게 요하난 일행이 보여준 자기기만적 태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회개하고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태도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며 작정하셨으며 섭리하심을 압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최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이와 같이 신뢰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곧 자기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믿는 자의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기도가 될 것이고, 이렇게 기도할 때, 참된 믿음에 거하는 자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 이렇게 기도를 하기는 했으나, 온전한 믿음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요하난 일행이 보여준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불안함 속에서 우리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과연 믿음의 기도인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한 뒤에, 마음에 평강을 누리신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와 불안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사실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을 속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직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하난 일행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하는 대신, 자기들에게 믿음이 없으니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했어야 했고, 또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라’고 한 것은 마음을 속인 일이고, 자기들의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 된 것입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설교듣기의 결과
자기 부인이 없는 설교듣기는 결국 한 가지 표준적 반응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것은 설교자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보인 태도는 대놓고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43:2).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이들은 예레미야가 틀렸다고 말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보다는 더 상대하기 쉬운 바룩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를 거부하거나 설교자가 어떤 영향을 받아서 좀 치우쳤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거부하지 않지만, 단지 이 잘못 말한 선지자와 그의 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하는 문제도 곧 다룰 것입니다. 그들은 손쉬워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거부하고 있으며 자기 마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이 없는 설교듣기에서 나타나는 거의 표준적인 반응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온전히 자유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기부인과 가난한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부인의 태도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하난과 아사랴과 같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한편 가난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성경의 몇 가지 예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취한 태도가 그것입니다(마 15:21~28; 막 7:24~30). 이 여인은 가나안 족속에 속한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미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용감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심으로써 매몰차게 이 여인을 굴욕스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물러가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즉시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부인과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또 하나의 예는 시편 123: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는 종들의 눈,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한다면, 밥상 옆에서 주인의 손만을 바라보는 개들의 눈길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간절함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당신 밖에는 제게 소망이 없습니다 하는 태도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난한 마음을 베드로전서 2:2~3이 보여줍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은 갓난 아기가 얼마나 엄마 젖을 찾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 그런 배고픔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말씀을 청종하라고 사도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 성장합니다. 적어도 그 맛을 본 적이 있다면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십니까? 어떤 태도로 설교를 들어오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으셨습니까? 설교듣기가 왜 기도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깨달으셨습니까?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해오셨습니까? 아니라면 이제부터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복된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누리는 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 부인과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듣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