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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0 - 말씀 위에 선 신앙 (13) - 설교듣기(5)

사무엘상 3: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0-08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13 설교듣기(5)


들음과 믿음의 관계
우리는 설교를 듣는 것과 신앙의 관계를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들음과 믿음은 별개로 가지 않습니다. 아무 것이나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음의 말씀을 주의해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로마서 10:17의 말씀은 바른 복음이 선포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심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베드로전서 1:23이나 야고보서 1:18도 같은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데에만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영혼이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일도 절대적으로 말씀을 듣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도르트신조 5장 14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설교로 이 은혜의 사역을 우리 안에 시작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읽음으로, 그것을 묵상함으로, 말씀의 권고들과 위협들과 약속들로 그리고 성례의 사용으로 그 은혜의 사역을 유지하시고, 이어가시고, 완성하시기를 또한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를 세워 당신의 양떼를 먹이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듣는다는 말의 뜻
우리가 이미 히브리서 4:2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고 해도 믿음을 섞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무엘상 3장에는 어린 사무엘이 성막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한 밤에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고는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른다고 생각하고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거듭 묻습니다. 세번이나 그렇게 하자,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다시 부르는 음성을 듣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고 알려줍니다. 마침내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귀로 듣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웃어른이나 직장 상사에게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냥 귀로 듣겠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겠다는 것이듯이, 사무엘의 말도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실제로, 여기서 ‘듣는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의 언어든지, 일반적으로 ‘듣는다’는 말은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것이 신앙의 영역에 들어오면 더 중요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설교를 듣습니다. 만일 이 들음이 믿음, 그리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들은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들음에 순종의 행위를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들음이라는 행위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듣는다는 말은 듣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관계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18~19을 보지요.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 말씀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말씀입니다. 여기서 ‘순종하지 않다’는 헬라어 단어는 ‘믿지 않다’는 의미도 가집니다. 개역개정역은 이 단어를 항상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번역했으나 영어성경은 더러 이 단어를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모두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 혹은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설교를 듣는다고 할 때,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모르던 사실을 깨닫고 배우는 결과만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 신앙이 율법주의나 율법폐기론의 양 극단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 주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을 유지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가르침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한국교회에 만연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행위로 심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칭의나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신 소원을 따라 행하는 순종이 수반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우리 안에 주신 새 마음으로 일어난 소원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고,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이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 대신, 자신의 의를 구원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다른 극단에는 율법폐기론이 있습니다. 일단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도 없고, 자유를 얻은 이상 어떤 의무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율법 안에서 발견하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갈 5:13). 신자는 사랑의 법에 매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입니다(막 12:30~31). 성경은 율법폐기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아니라, ‘믿음이 낳는 순종’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우리가 구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라는 표현과 ‘믿음이 낳는 순종’이라는 표현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순종’을 수반한다고 할 때, 이것은 ‘믿음과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 순종을 믿음에 수반되는 별개의 항목으로 보게 합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믿음이 낳는 순종’이라는 것이 더 나은 표현입니다. 가령, 로마서 1:5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할 때, ‘믿어 순종하게 한다’는 말은 직역하면, ‘믿음의 순종’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중 ESV나 NASB는 ‘the obedience of faith’라고 번역했고, NIV는 이것을 조금 풀어서 ‘to 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로마서 16:26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 두 구절은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서로 상충된다고 여기지만, 로마서의 서두와 결론에 있는 이 두 구절만 보더라도, 로마서가 말하는 ‘오직 믿음’이 순종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순종’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믿음이 가져오는 혹은 낳는 순종’을 가르칩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을 낳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3:18~19에서 믿음과 순종을 호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음과 순종 사이에 개재되는 두 가지 문제
여기서 우리가 던지게 되는 질문은,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순종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물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좁혀서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들음과 순종 사이에 개재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권위 인정의 결핍
첫번째 문제는 권위 인정의 결핍입니다. 예레미야 22:21을 보겠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이 말씀은 유다 말기 여호야김 왕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야김은 경건한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은 11년을 통치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몹시 핍박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난도질하여 화로에 태운 불경한 왕이었습니다(렘 36). 방금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이 불경한 사람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경건한 아버지를 두었으니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아예 귀로 들은 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의 어려서부터의 습관이었습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권위를 싫어합니다. 절대적 권위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권위에 연결된 기존의 모든 가치 질서가 붕괴되는 시대입니다. 부모의 권위, 선생님의 권위, 지도자의 권위가 다 무너졌습니다. 권위의 냄새라도 풍기면 ‘꼰대’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의 권위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권위가 붕괴된 시대에 신앙이 붕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여호야김은 수 없이 말씀을 들었지만, 여러서부터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이쯤되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고 사십니까? 그것을 인정하고 말씀을 들으십니까? 그리고 그 권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니까? 그 권위를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가르치십니까?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 권위이며 우리 모두는 그 권위 아래 서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7:22~26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비단 여호야김이라는 한 인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였다고 지적합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물론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습관을 형성해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
들음과 순종 사이에 개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령, 십계명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기 전에 무엇을 먼저 말씀하셨습니까? 출애굽기 20:2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명령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당신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주지시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격하지 않으면 그 모든 계명에 순종할 힘을 얻을 수 없고, 또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순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원리인데,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열 계명은 모두 열 개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대할 때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하고, 그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거기서 순종의 능력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구제하고(1~4), 기도할 때(5~8) 은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가르치십니다(9~15). 이어서 금식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라고 하십니다(16~18). 그 다음에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19~24). 세상의 물질로 염려하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25~32). 결론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의식주 문제를 다 해결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33~34). 우리는 지금 다 함께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 질문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 보시도록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물질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주님께서 두 번이나 확정적으로 말씀하신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먼저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내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나는 굳이 그것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32절도 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필요를 아십니다. 이 말은 단지 아는 것을 넘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공급하시고 채워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인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세상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기도할 때에도 자신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쓴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존재가 됩니다(롬 14:7~8).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것이고 이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의 모든 명령을 제대로 준행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바르게 처방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들고 신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구입한 약을 복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복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모든 계명-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모든 순종의 전제이고, 그 신뢰의 결핍이 결국 모든 불순종의 원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으라.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권면하겠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 권면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놓으십시오.
첫째, 설교를 들을 때, 이 말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내게 친히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인격적일 뿐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야김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우습게 여겼던 그 습관적 잘못에 빠지지 마십시오. 평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청종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래야 평안하지 않을 때에도 그 말씀으로 위로와 힘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당장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절실하게 받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절박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설교를 들으실 때,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 묵상하십시오. 종종 설교자는 설교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방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를 비롯한 모든 설교자가 유념해야 할 사항입니다. 설교자는 비껴서야 합니다. 회중이 선포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있도록 그 사이를 막아서지 않고 비껴서야 합니다. 설교자의 의도, 설교자의 생각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설교자 자신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의도를 묵상하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까? 왜 선하신 하나님은 내게 이것을 요구하실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설교를 듣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알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묵상하고 신뢰할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들음으로 여러분의 믿음은 성장하고 깊어지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싶은 열망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순종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여러분의 평생에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