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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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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9 - 말씀 위에 선 신앙 (12) - 설교듣기(4)

히브리서 2: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0-01

말씀내용
신앙과 성숙(19) 말씀 위에 선 신앙(12) 설교듣기(4) (히 2:1~4)


우리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물론 은혜의 수단들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도나 성례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는 점과,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여러 방식 중 설교를 듣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생각할 때, 설교를 듣는 것이 신앙 성장의 열쇠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배 중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혹은 공부하는데서 은혜를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 경험에서 이것을 배우셨습고 동의하십니까? 물론 이것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고 바르게 선포되는 참된 교회를 전제로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교듣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주는 첫번째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은 명령이고, 2~4절에서는 이 명령이 얼마나 심각하고, 생사를 가늠하는 치명적인 명령인지를 설명합니다.

히브리서의 첫번째 경고와 명령(1)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의 내용 전체를 담는 접속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장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만유의 상속자이고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시며(2),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으로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3). 그는 또한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3). 그는 천사보다 우월하시고(4) 천사들이 경배하는(6)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8). 이 아들은 세상의 창조자, 섭리자, 통치자, 구속자가 되시니 천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1장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이고 예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이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절의 ‘그러므로’는 이런 설명을 전제로 말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그러므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시므로’라는 말입니다. 1절은 히브리서의 첫번째 경고이자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경고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본문도 이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주는 첫 번째 경고와 명령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기에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명령이 있습니다. 적극적 차원으로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것이고, 부정적 차원으로는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말라'
먼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하라는 말을 보지요. 이 말은 배가 정박할 때 닻을 내리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움직여 먼 바다로 떠내려가는 상태 혹은 항해 중에 경로를 이탈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항해용어입니다. 반지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서 빠져 나갔을 때도 이 말을 씁니다. 이 단어의 핵심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발생하는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하다가 결과가 명확하게 드러났을 때 그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C.S.루이스의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린 100명의 사람 중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는 이유 있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다수는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 떠내려간 사람들이다.” 교회를 다녔고 말씀도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이상 기독교를 믿을 수 없다고 이유 있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기독교와 교회를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흘러 떠내려온 것입니다.
어린 시절 함께 교회 생활을 했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교회를 떠난 친구들도 적지 않습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멀리 와버린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일’은 진리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태만해서 벌어지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때로는 연약해서 일시적으로 말씀에 태만함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것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과 그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 무감각한 마음으로 지내며, ‘아멘’하는 마음이 아닌 거부하는 완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 배교라는 비참한 결과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교가 당장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그 궁극적 결과라는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처음부터 사람이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그 말씀을 거부하거나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다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흘러 떠내려가는 비참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는 이것입니다.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유대교로 돌아가 버렸고 교회는 이 일로 흔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까?

'들은 것에 유념하라'
여기에 적극적인 명령,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라는 말로써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들은 말씀에 유념하는 것은 미숙한 신자들만 주의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예외 없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욱 유념하라’는 말은 매우 강한 명령입니다. ‘들은 바를 더욱더 굳게 간직하여’라고 공동번역은 그 강도를 더 세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이 무엇을 들었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간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흘러 떠내려가는 비참함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말씀은 단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장 들을 때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뒤에 왜 감동을 받았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들은 후가 중요합니다. 들은 말씀을 붙잡아야 하고 그 말씀이 인생의 고난이나 즐거움 또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 때문에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을 더욱 유념하며 살아갑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이 이 일에서 실패함으로써 흘러 떠내려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에 유념하지 않고 방심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여러분과 한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다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과 한 때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 함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말입니다.
흘러 떠내려가기 위해서 우리가 기울일 노력은 없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들은 말씀에 유념하는 수고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움직임이 없는 호수가 아니라, 물살이 꽤나 거센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거슬러 가는 모든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밥과 고기가 필요하듯, 영적 여정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절박함이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굳어 있고 완고하면 어찌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절박한 심정과 빈 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채움을 받는 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주목하여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 머물러 있겠지만, 이미 흘러 떠내려가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은 그 말씀에 착념하고, 그 말씀에 더욱더 유념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탐욕, 교만,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온갖 유혹들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아도, 이 세상의 멋진 매력에 매료되는 것으로 우리는 아주 천천히 흘러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고 말합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귀를 막은 자들에 대한 심판(2)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명령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구약 시대의 예를 들어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2절입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유대인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의 전승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를 통해서 주셨다고 했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방식으로 율법을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그러면 2절에서 ‘율법이 견고하게 되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견고하게 되었다’는 말은 ‘증거로서 믿을만 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법적 용어입니다. 여기서는 율법이 믿을만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효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은 모두 ‘효력이 있어서’ 혹은 ‘효력을 내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말씀이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으로서 효력이 있어서 이 말씀에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보응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백성은 율법을 받았으나 그 율법에 대하여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보응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설교 듣기’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범죄함’은 율법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 선을 넘어 나가는 것 등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은 율법을 주의하여 듣기를 거부하는 것, 율법에 귀를 막는다는 의미인데, 특별히 말씀을 듣는 태도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범죄함’보다는 소극적 의미지만, 동일하게 보응을 피할 수 없는 죄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 때, 부모의 말을 “나는 못 들었어요”하는 식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주의해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범죄함이나 순종하지 아니함이 모두 의지적이고 심각하며 치명적인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백성의 태도를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태도로 대함으로써 결국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복음에 귀를 막은 자들에 대한 심판(3a)
이와 같이 천사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 대한 잘못된 태도도 보응을 받는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 아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에 대한 범죄에 대한 보응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최종적 계시이고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3절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이 큰 구원’은 복음과 복음의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신 말씀을 대하여 범죄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땅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거절한 자들, 그 복음의 말씀을 대하여 범죄하고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은 더 엄중한 심판, 즉 하늘의 영원한 안식을 잃어버리는 비참한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등한히 여기다’라는 단어를 만납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지만, 주님께서 이 의미를 사용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여 저마다 핑계를 댑니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습니다(마 22:5).”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본문에 ‘등한히 여기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왕의 초청을 등한히 여긴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왕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바로 이 비유가 본문에 깔려 있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는 경고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을 잃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바로 세상을 창조자, 섭리자, 구속자, 그리고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큰 구원, 이 복음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이자 명령인 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갈 것이며 큰 구원의 복음을 등한히 여기는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삼중 증거(3b~4)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을 통해 주신 이같이 큰 구원의 말씀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3중 증거를 통해 보여줍니다. 첫째는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서 친히 전해주신 복음입니다. 둘째로 주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듣고 주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친히 이 말씀의 확실성을 확증하십니다. 또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주신 것으로써’ 증언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복음의 말씀의 참됨을 입증하신 일 혹은 성령의 은사들이나 앞에 언급한 ‘표적, 기사, 능력’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초청: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으로 만족하는 삶
여러분, 말씀이 들리십니까? 이 질문처럼 중요한 질문이 있을까요? 말씀이 들린 바가 없다면, 어떻게 들은 말씀을 더욱더 유념하고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천사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주신 계시의 말씀인 복음을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하신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고 명령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간다고 경고합니다.
F.F.브루스의 말입니다. “복음의 진리와 교훈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이며 생명과 죽음의 문제다. 따라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중히 여기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들로부터 흘러 떠내려가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위험은 아무리 심각하게 여긴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하여 듣고 그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영적 활력을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일이나 의무로 여기지 마십시오. 아침마다 밤마다 사랑하는 구주의 감미로운 음성을 듣고 우리 영혼이 만족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말씀이 내 기쁨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오, 자비하신 주께서 삶에 지쳐 곤고한 우리 인생을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부르시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에게 데이트 하는 시간이 어찌 일이고 의무이겠습니까? 주께서 이 영광과 기쁨으로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평생 즐겁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