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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8 - 말씀 위에 선 신앙 (11) - 설교듣기 (3)

히브리서 4: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9-24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11 설교듣기3(히 4:1~2)


바른 설교를 잘 듣는 것이 신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기에 바른 설교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기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참된 교회의 첫번째 특징으로 말씀의 바른 선포를 꼽았습니다. 만일 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이제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를 잘 듣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오늘도 계속 다루겠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눅 8:15)=믿음(히 4:2)
우리가 지난 두 주일에 걸쳐 상고한 본문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네 종류의 땅’의 비유였습니다. 주님은 그 결론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주의해서 말씀을 들어야 신앙이 바르게 성장합니다. 여기서 잘 듣는다는 것은, 주님의 설명대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입니다(눅 8:15). 우리는 특별히 ‘착하고 좋은 마음’에 집중하여 이 본문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오늘 본문 2절에서 ‘믿음’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문맥-서신의 초점은 공동체
나중에 별도로 다루려고 생각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오해하지 않도록 잠시 문맥을 살피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히브리서는 다른 대부분의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서신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당시, 유대인 신자들이 배교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동일한 유혹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종교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성전과 제사, 그리고 율법은 뭔가 체계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까지 더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종교에서 어떤 의식이나 신비적 요소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구약 율법의 의식법을 성취하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더 편하게 느꼈습니다. 요는 구약의 유대교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사람, 모든 제도와 비교불가한 우월하심을 구약성경을 풍성하게 인용하여 대조시킴으로써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더 큰 문맥은 3:1~4:13인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구약의 최고 인물,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특별히 다루어지는 주요 주제는 ‘안식’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종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하게 하여 약속의 땅이고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모세의 사역과 비교됩니다. 예수님은 죄와 율법과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건져내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백성을 안식으로 인도하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주는 안식은 이 땅에서의 안식이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하늘의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 차이는 비교불가하며 땅과 하늘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가나안 땅의 안식으로 인도해들이기를 원했으나 슬프게도 출애굽 1세대로서 그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요점과 관련됩니다. 출애굽한 장정이 60만이었는데 왜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히브리서 가지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그 당시에도 유효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2절에서 말한 바,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문맥을 여러분에게 소개한 이유는 이것이 아닙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유대교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리고 여전히 적잖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모세가 인도하여 들이려고 했던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슬프고 비참한 일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땅의 안식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세의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영원한 비참함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그러니 스스로 알아서 잘 하라’거나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강조를 줍니다.
첫째는 시험 가운데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개인적 차원의 권면입니다. 인내는 히브리서에서 믿음과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참된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인내한다’는 말의 원의미는 ‘경주를 끝마친다’는 개념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공동 책임, 상호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3:12~13에 잘 드러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기독교는 ‘나 혼자 잘 믿고 천국간다’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삼위로 계시고, 사람을 공동체로 창조하셨으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신 것도 이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말씀을 개인주의적으로 들으시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는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문맥을 설명드렸습니다. 히브리서 3:12~13과 함께, 공동 책임, 상호 책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연히 벧샬롬이라는 조직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약신학자 사이먼 키스트메이커(Simon Kistemaker)의 말입니다. “우리는 교리나 행실에 있어 진리에서 흘러 떠내려갈지 모르는 교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낙오자들을 부단히 찾아야 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안식에 들어가는 조건: 믿음 = 순종 = 인내
본문에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는 조건’ 혹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편에서의 책임도 분명하게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에, 이 차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3:18~19에서 대답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순종하지 아니한’ 까닭에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둘째로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순종과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들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순종은 언제나 믿음이 발생시키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언제나 순종의 행위를 낳습니다. 이점에서 히브리서는 순종을 믿음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앞에서 제가 히브리서는 인내를 믿음과 동의어로 사용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으로 불리는 11장에서만 믿음의 정의와 성격과 기능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전체가 믿음의 성격을 다루는 성경입니다. 요약하면 참 믿음의 특성은 순종이며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3:19에서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은 다시 말하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또는 ‘끝까지 인내하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은 바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본문은 믿음을 좀 더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교훈합니다. 먼저 3:7~11을 주목해보면 이 본문은 시편 95:7~11의 인용이고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반면교사로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 하나님을 수없이 시험했습니다. 이 완고한 마음의 특성은 미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거짓 가르침들에 귀가 솔깃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본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을 완고하게 했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반면교사로 삼아 가르치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완고한 마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이 짧은 본문에서 3번 반복하여 말하고(3:7~8, 15; 4:7) 한 번 같은 표현으로 권면한다는 점은(3:13), 히브리서 기자의 강조점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완고함이 무엇입니까? 이 단어는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과 깊이 연결된 개념입니다(3:12). 불순종하는 강퍅함이고, 착하고 좋은 마음의 정반대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감각하거나 느끼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돌같은 마음이고, 반응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완고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마음이 완고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나아가 공동체 안에 그런 완고한 마음 즉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있는지 늘 살피고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말합니다(3:12~13).
본문에서 완고함이나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은 완고함 아니면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고한 믿음이나 믿는 완고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설교를 들으십니까?

신앙의 세 가지 요소: 말씀, 들음, 믿음
4:2을 보면, 신앙에는 세 가지 요소가 언제나 작동합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두번째, 들음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로마서 10:14에 이 세 요소가 모두 나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믿음, 들음, 전파함이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들을 수 없고 그러면 믿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말씀과 들음이 신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들음이 없다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도 우리와 동일하게 복음 전파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점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4:2에서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라고 말할 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교회의 히브리서 독자들 사이에는 복음 전함을 받고 들었다는 점에서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 전함을 받았다’는 말이 완료형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을 만큼 그들이 들은 복음이 완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들은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복음 사이에 어떤 차이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약의 성도들이 핑계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특히 4:2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의 말씀으로 인하여 안식에 들어가는 유익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믿음 대신 완고함을 결부시켰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결부시키지 않았다’는 표현은 듣는 말씀에 믿음을 ‘섞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성경에 계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을 계시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려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믿음도 주십니다. 우리를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다 주십니다. 복음과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사람을 주셨으며,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듣도록 믿음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십시오. 지난 주에 우리가 상고한 이사야 6:9~10 말씀과 같이, 여러분 자신이 또한 “주여, 내가 믿사오니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하는 심정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합니다. 제일 먼저 3:7에서 시편 95:7을 인용하면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할 때 ‘오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3:15과 4:7에서 다시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두 번 더 사용합니다. 그리고 3:13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면서 ‘오늘’이라는 말을 한 번 더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쓰는 ‘오늘’은 약속이 아직 허락되어 있고 유효한 때를 가리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저는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영원한 안식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고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오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때였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히브리서 기자가 4:1에서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오늘 안식의 약속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광야의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 중 단 두 사람만이 안식의 땅에 들어간 것을 생각할 때, 이 두려움은 이해가 됩니다. 취업 시험을 보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것도 때로운 일종의 두려움 같은 감정을 줄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어찌 이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독자들을 움츠러들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순종하라고 주신 말씀이며, 영원한 안식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광야 세대는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록해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과 그 음성을 듣거든, 여러분은 여하한 이유에서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착하고 좋은 마음 즉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그렇게 하십시오. 다른 것은 양보해도 이것은 양보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기에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고 말고 하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한 순간이 그들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간과했기에 실패했다고 말씀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이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설교자를 세워 이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정녕 나를 사랑하심이 아닙니까? 복음의 말씀, 그 말씀을 듣도록 설교자를 세우심, 그리고 믿음을 주심,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사 나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자비가 아닙니까? 매주일이 믿음으로 주의 말씀을 받는 오늘이 되는 복된 은혜가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