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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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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7 - 말씀 위에 선 신앙 (10) - 설교듣기(2)

누가복음 8:4-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9-17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10 설교듣기2 (눅 8:4~18)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종류 땅의 비유는, 듣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다. 이 들음은 여러분의 신앙을 좌우하고, 이것은 또한 여러분의 영원과도 관련된 문제이기에 중요합니다. 네 종류의 땅이 대표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세 종류의 땅이 가진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들어서 생각할 틈도 없이 마귀가 가져가거나, 시련에 의해서, 또는 세상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의해서 말씀을 빼앗기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있었고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8:8)”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들을 수 있는 영혼의 귀는 없거나 닫혀 있었기에 소리는 듣되 말씀은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것은 일종의 영적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들에게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복음의 말씀을 들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고,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심령에 깊이 박히지 않는다면, 당장에는 기쁨으로 반응한다 할지라도 시련이 올 때까지만일 것이고, 말씀을 듣는 중 세상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다면, 결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고 그 영혼은 악화되고 말 것이므로, 여러분은 말씀을 듣기 위해 싸우셔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곤함이 가져오는 잠이나 습관적 잠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 비유가 모든 사람의 경우를 다 담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각자의 상황에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소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듣기와 관련하여 이 본문에서 우리가 좀 더 살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든지, 강퍅해지든지(시 6:9~10)
제자들이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실 때, ‘비밀’이라는 말은 헬라어 ‘뮈스테리온’인데 여기서 영어 mystery(신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 헬라어 단어의 의미가 영어에서 ‘신비’를 의미하는 미스테리(mystery) 보다 시크릿(secret)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비는 알려주어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라면, 비밀은 알려주면 바로 명확하게 ‘아하’하고 알 수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입니다. 비유는 일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부분 청자들이 알아듣는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의미를 가르쳐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그런 의도로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비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여기지만, 주님께서 ‘너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그 가치를 알아듣고 깨달음으로써, 자기 생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10절 하반절은 이사야 6:9~10의 인용입니다. 이사야 6장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유명한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자리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런 말씀입니다. “이사야야, 지금 내가 너를 선지자로 불러 보내지만, 네 말씀 사역은 실패할거야. 사람들이 네가 전하는 말에 반응을 하지 않을거야. 들어도 듣는게 아니고, 보아도 보는게 아니거든.”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백성들은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서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알아듣고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와 눈을 막으셨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백성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맥락과 같아 보입니다.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백성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원인입니까, 목적입니까? 다시 말해서, 주님은 백성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10절만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셔서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13을 보지요.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구절의 병행 구절 마가복음 4:12은, 누가복음 8:10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이 그들로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라고 들립니다. 여기서는 원인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러니 종합해보면, 주님의 이 말씀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 바,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원인이자 또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R.C.스프로울이 잘 설명합니다. “만약 너희가 내 말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귀를 제거해버릴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나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것에 대해서 너희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나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마음을 돌과 같이 만들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귀와 눈을 막으시는 것은 버림 받은 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일종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같은 내용을 달리 쓰는 것일까요? 실상 이사야 6장 9~10절이 이런 의미들을 다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한다면, 마태복음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책임을 더 무겁게 다룹니다. 그러나 R.C.스프로울의 설명대로,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고 깨달으려고 하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과 귀를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없다면, 그저 앉아있는 것이라면, 듣는 것이 별게 아니라는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영적으로 무뎌지고, 악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고 더 받든지 아니면 강퍅해진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한 현상이 피할 수 없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든지 아니면 점점 더 강퍅해 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주일, 그리고 지난 한달 동안, 그리고 지난 1년 뿐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순간에 그리고 모든 순간의 축적을 통해서 바로 그 둘 중의 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 영혼의 상태는 바로 그 결과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만일 우리가 참되고 바른 말씀을 늘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상태가 좋지 않고 자라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심각하게 자신을 살피고 돌이키고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셔야 합니다. 사실 두번째 경우,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일종의 형벌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8문이 이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죄의 형벌은 내적으로 마음의 굳어짐, 타락한 지각, 강한 유혹, 마음의 고집, 양심의 공포와 부끄러움, 정욕 같은 것이나 외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저주하신 일, 우리들의 몸, 이름, 지위, 관계, 직업 등에 생긴 다른 모든 악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굳어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불신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불신의 마음 상태가 바로 현세에서 죄인이 받는 죄의 형벌인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 상태는 저주받은 상태요, 소망 없는 상태이며,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보장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강퍅한 마음은 죄인이 이 세상에서 받는 형벌입니다.

빛이 드러날 때(16~17)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살펴보지 않은 두 구절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16~17절입니다. 주님께서 네 종류의 땅의 비유를 마치고 바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는 16~17절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와, 이 말씀이 비유와 결론 사이에 삽입된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등불의 비유라고도 부르지만, 이것은 비유라기 보다 격언이나 잠언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습니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대 아래에 둘 사람은 없습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어둠을 비추기 위함이기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불을 켜면 등잔대 위에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지당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등불은 어둠을 비추기 위해 존재하고 빛의 목적은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몰아내는 것입니다.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는 것은 등불의 존재 목적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등불 이야기는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언젠가 밝히 빛을 비추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에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밀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옵니다. 이 가르침의 빛이 부인할 수 없도록 온 세상에 비출 때가 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빛이기에 영원히 감추이고 숨겨진 채 존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제자들은 빛을 드러내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비밀을 드러내고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은 숨겨지고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의 가르침에 제대로 응답하고 반응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그 비밀이 밝히 드러날 때, 가르침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던 자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던 모든 것이 사실은 가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옵니다. 그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은 경고입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께서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내 귀를 열어 듣고 깨닫게 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할 만큼 한가한 사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네 종류의 땅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어떻게 들을지 주의하고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시려고 등불과 빛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밝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날이 홀연히 임할 때, 준비되어 있으십니까? 그 준비는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영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깨닫지 못하면 그날에도 깨닫지 못합니다.

영광스러운 부르심: 듣는 자
설교를 듣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저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을 영광스러운 소명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에 비추어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소명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부르심입니다. 이 들음에 구원이 달려있고, 열매 맺는 삶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을 좌우할 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부정적인 차원에서, 마귀나 시련이나 세상 염려와 재물과 쾌락에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교정하십시오.
존 파이퍼 목사님이 베들레헴침례교회를 목회할 때 설교를 듣는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회중에게 준 구체적인 권면 10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권면하려고 합니다. 주일 공예배에서 설교를 잘 들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토요일 저녁, 주일 아침 집에서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습니까? 아래 열 가지는 존 파이퍼의 권면입니다.
1. 하나님께 착하고 좋은 마음을 달라고 구하라(15절).
2. 말씀 묵상을 설교의 전채로 삼아 영적 식욕을 돋우라. 설교가 주요리라면 말씀 묵상은 전채다.
3. 세속적 즐김에서 마음을 지키고 순전한 마음을 준비하라. TV 쇼나 기타 이런 것들로 늦은 밤까지 보낸다면, 예배와 설교 들음은 피상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말씀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에 갈망과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4. 당신이 이미 가진 진리를 신뢰하라(렘 17:7~8). 풍성한 들음에 자양분을 주는 뿌리는 믿음의 뿌리다. 들음은 믿음을, 믿음은 다시 더 나은 들음을 준다.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에 하나님을 신뢰하라.
5. 토요일 저녁에 좋은 휴식을 취하라. 피곤은 적이다!
6. 화낼 일, 원망할 일, 비난할 일 모두 예배 전에는 참고 또 참아라.
7. 온유하고 배우는 심정으로 와라.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8. 예배당에 들어오면 조용히 마음과 생각을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시 63:2).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이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시간이다.
9. 예배가 시작할 때, 찬송, 기도, 설교하는 것에 간절히 마음을 드려라.
10. 음식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바라라(시 19:10~11; 잠 2:3~5).

다시 한 번 그리고 강력하게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십시오. 육신의 귀로만 듣지 말고 영적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들은 바 그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 주간 동안 그 말씀을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은 바 그 말씀이 백배로 결실하는 인생이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