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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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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6 - 말씀 위에 선 신앙 (9) - 설교듣기 (1)

누가복음 8:4-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9-10

말씀내용
설교듣기1 (눅 8:4~18)


우리는 신앙이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큰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역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 읽기와 묵상의 소주제들을 이미 다루었고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설교듣기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평생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신앙의 성숙은 설교를 듣는 것과 어떤 연관성을 지닐까요? 이것은 ‘어떤 교회를 다니는가’와도 연관됩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는 그 예배당에 앉아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신학과 참된 경건에 뿌리내린 설교는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을 만들어내겠지만, 나쁜 신학과 거짓 경건에 기반한 설교는 기형적이고 나쁜 신앙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물론 좋은 강단 아래 앉아 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좋은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목사에게 그 직분의 가장 중요한 직무인 설교를 잘 하는 것이 절대로 중요하다면, 교인의 중요한 책무는 설교를 분별하고 잘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이번에 몇 주 동안은 설교 듣기에 관한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먼저 설교가 무엇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를 잠깐 짚고 가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알리십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로, 신약시대에는 사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알리신 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이 소개하듯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습니다(요 1:1~2).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수단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거듭나게 하셨고 거룩하게 빚어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뒤에도, 하나님은 목사와 교사라는 말씀의 직분자들을 세워 말씀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심으로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날 수 없도록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필립 브룩스는 “설교란 진리가 인격을 통하여 부어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정의에는 설교의 두 요소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요소와 인격성의 요소입니다. 설교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인격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인격성의 본질을 어떤 범위에서 규정할 것인가는 복잡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마는, 설교가 한 경건한 인격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과 그 영광을 말씀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설교는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여 그 영광을 드러내고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목표는, Cotton Mather가 말했듯이,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보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핵심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이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놀랍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때 설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교만을 부서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신 자신의 영광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열심이고 인간의 교만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변치 않는 인간의 열심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바르게 다루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고, 인간의 교만은 꺾여지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자발적 순종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고 싶은 열망이 놀랍게 살아남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 그 나라, 그의 뜻이 내 이름, 내 나라, 내 뜻 보다 중요해 집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지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전한 설교가 아니라 오늘날 목사가 전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여기에 대답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의 세 가지 구분된 용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두번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세번째로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무오하거나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과는 구별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분별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베레아 사람들이 사도행전 17:11에서 잘 보여준 태도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로고스이신 성자 하나님과 무오한 말씀인 성경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우리가 설교에 대하여 경박한 태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도전받는 설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는 오늘날 큰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설교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탈권위주의시대에 설교라는 방식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효용성 면에서도 설교보다 대화가 더 선호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탈권위주의시대에도 하나님의 권위는 주장되어야 하기에 설교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설교는 효용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만 보더라도, 열매를 맺은 것은 네 종류의 땅 중에 하나, 1/4의 효용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는 계속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방식이라고 매도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시는 탁월하고 신비한 방법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셜교하기가 아니라 설교듣기에 관한 말씀
이제 우리는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할 구절은 1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또 주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십니다(8). 모두가 들었지만, 모두가 다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육신의 귀가 아니라 영의 귀로 제대로 들으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육신의 귀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영의 귀로 듣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관심은 어떻게 설교를 잘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여 설교를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에게 설교를 듣는 기술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중요성을 가진 문제입니다. 우리 영혼의 죽고 사는 것, 건강과 성장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 사람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43,47입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네 종류 땅의 비유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설교를 듣는 것이 무엇인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십니다. 사실, 이 비유의 요지를 보면 ‘네 종류 땅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설교를 어떻게 듣는가, 어떤 마음, 어떤 태도로 설교를 듣는가는 네 종류 땅으로 대변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동일한 씨를 뿌립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 설교를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씨가 뿌려지지만, 그 씨를 받아들이는 땅은 네 종류입니다. 길 가와 바위 위, 가시떨기 속과 좋은 땅입니다.
먼저 길 가에 씨가 뿌려집니다(5). 길 가에 뿌려진 씨는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유대교에서 새는 종종 사악한 대상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12). 이 경우는 최악의 설교 듣기에 해당됩니다. 육신의 귀로는 들을지라도, 영혼으로는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바위 위에 떨어진 경우입니다(6). ‘바위 위’는 석회암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땅인데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말하는 돌짝 밭이 아닙니다. 돌짝 밭은 돌들이 많이 있는 땅인데, 이것은 흙 밑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땅입니다. 이런 땅은 그냥 보면 분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뿌려진 씨는 금방 싹이 나기는 하지만 습기가 없어서 이내 마르고 맙니다. 13절에서 주님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는 배반하는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반응은 합니다. 그래서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련을 견딜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배반하고 맙니다.
세번째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사실 여기는 좋은 땅일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 가시떨기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가시떨기는 2미터 정도까지 자라는데 너무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주변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운을 막는다’는 말입니다(7). 주님은 이 경우를,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설명하십니다(14). 소유와 행복 그리고 안락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사람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끝으로 좋은 땅입니다. 여기에 뿌려진 씨는 다른 땅에 뿌려진 씨와 동일한 씨임에도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이들은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입니다(15). 여기에는 결실의 조건이 몇 가지로 제시됩니다. 먼저 착하고 좋은 마음은 올바르게 반응하는 도덕적 특성과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결실에 중요한 조건입니다. 둘째, ‘지키어’라는 표현은 들은 바 말씀을 꼭 붙잡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행여나 마귀가 그 말씀을 취해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바위 위에 떨어졌다가 시련이 오면 ‘배반하는 자’라고 한 경우와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배반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떨어져나가는 것인데,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도우심을 바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을 극복하는 태도와 실천입니다. 마귀도, 시련도, 세상 염려와 재물이나 향락도 가져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결정한다.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하신 것은, 듣는 것이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18절 하반절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네 종류의 땅이 대변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라고 한 말씀은 그들 모두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가지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마귀가, 시련과 환난이, 또 염려와 부와 즐거움이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가져갑니다. 오직 네번째 종류의 좋은 땅만이 ‘있는 자는 받겠고’에 해당됩니다.

영광스러운 부르심: 듣는 자
말씀을 맺습니다. 설교를 듣는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을 늘 영광스러운 소명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에 비추어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소명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놀랍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자연인 모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들음에 구원이 달려있고, 열매 맺는 삶도 달려있기에 놀랍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에 여러분의 영혼을 좌우할 만한 너무나 큰 일들이 달려있습니다.
부정적인 차원에서, 마귀나 시련이나 세상 염려와 재물과 쾌락에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교정하십시오.
긍정적 권면도 있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십시오. 육신의 귀로 소리만 듣지 않고 영적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모하십시오. 들은 바 그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듣는 모든 말씀이 백배로 결실하는 복된 삶이 되도록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