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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5 - 말씀 위에 선 신앙 (8) - 시편묵상하기

시편 42: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8-27

말씀내용
시편 묵상하기(시 42:1~11)


바른 신앙은 말씀 위에 세워진다는 주제를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시편묵상이라는 소주제로 주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다양한 문학장르들을 각각 다 다루지 않겠지만, 특별히 묵상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시편만은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제가 왜 이런 생각에 이르렀는지를 공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낙심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 수치와 당혹감이라는 감정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낙심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 수치와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감정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의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이런 감정의 상황을 다루는 방식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편을 묵상하는 목적이 이런 감정의 상황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시편 기자들이 그런 모든 감정의 상황들로부터 벗어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 그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감정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과 외부적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르다.
첫째, 감정의 상황들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그런 감정을 몰고 온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종종 시편 기자들은 자신들을 감정적 상황으로 몰아 붙인 외부적 상황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 상황의 변화가 있기 전에, 그들은 이미 낙심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 수치와 당혹감과 같은 감정의 상황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외부적 물리적 환경이 우리의 감정의 상황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궁극적 목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둘째로 분명히 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우리의 상태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길지만,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또 하나 제가 놓치고 있었던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대상을 찬양할 때는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도 그 찬양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는 점입니다. “어때, 그녀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 그거 정말 훌륭하지 않아? 그거 정말 대단하지 않아?”하면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하는 시편 기자들의 행동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 제가 가졌던 문제는, 이렇듯 다른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기쁘게 하고 있는?실로 하지 않을 수 없는?일을 어리석게도 하나님이라는 최상의 가치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거부했던 데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찬양하기 좋아하는 까닭은, 찬양이 단순히 우리의 즐거움을 표현해 줄 뿐 아니라 완성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거듭거듭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은 단순히 찬사를 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그들의 즐거움은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완벽하게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서 터질 듯 솟아오르는 감흥을 시로나 음악으로나 그림으로나 완벽하게 표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실로 그 대상의 진가가 완전히 인정되는 것이요, 우리의 즐거움도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좀더 가치 있는 것일수록 이러한 즐거움은 더욱더 강렬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창조된 영혼이 최고의 가치 있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완전하게(제 말은 유한한 존재로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감상’할 수 있다면, 즉 그 대상을 사랑하고 즐거워함과 동시에 매순간 이 즐거움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실로 그 영혼은 최고의 복락 상태일 것입니다. 이는 제가 ‘천국’을 천사들과 (이후에) 인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상태로 말하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식입니다.”

C.S.루이스의 말을 이해하십니까? 공감하십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과 환희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게 될 때,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기쁨과 만족이 절정에 이르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변함 없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모든 즐거움과 만족의 완성에 이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이 소외되는 광경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에 동참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궁극적 목적은 우리 자신이 어떤 물리적, 외부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시편묵상이 우리가 겪고 사는 많은 감정의 상황들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옮겨가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래로 주어진 시편
시편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성경에서 가장 긴 성경, 비슷비슷한 말씀들의 반복, 그 외에 또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래, 찬송이라는 생각이 얼른 연상되지는 않으십니까? 사실, 우리가 가진 시편 150편은 이스라엘의 왕정 초기부터 포로기 이후까지 약 600년에 걸쳐 쓰여졌고 포로기 이후인 주전 4세기경에 최종적으로 편집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편집된 시편은 유대교의 찬송집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성경에 찬송가가 합본된 책들이 있어서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찾아서 부르는 것처럼,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이 찬송가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편들은 노래로 불려지기 위해서 작사되었다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 안에서 이런 유래를 볼 수 있는데 다윗 시대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역대상 6장 31절 이하에는 다윗이 성전 예배를 위하여 악기를 가지고 ‘찬송하는 직분’으로 레위인들 중에서 임명하는 기사가 나옵니다(대상 15:16~22; 16:7~38; 25:1~31). 이 직분으로 임명된 지도자들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이었습니다. 이들이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사실 시편의 초기 형태였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시편이 찬송가의 기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은 예수님에게도 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부르신 찬양도 할렐(Hallel)이라고 불리는 시편 113~118편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편들은 노래의 용도로 주어진 것입니다.

시편은 묵상에 최적화된 하나님 말씀이다.
시편들이 노래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하나의 명제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시편들이 묵상에 최적화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종종 반복적으로 그리고 입술로 읊조리게 되는데 그것이 곧 묵상이고, 시편들은 그렇게 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서나 선지서들과 비교해볼 때, 시편은 정말 암송하고 되뇌이고 노래로 부르기에 적합한 말씀인 것이 분명합니다.
시편에 있는 주옥같은 고백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것은 어느 탁월한 시인이 만든 노래 가사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영감하여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느 노래 가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좋아하는 노래는 어떤 것입니까? 물론 곡조도 중요하지만, 그 가사가 기가 막힐 정도로 미묘하고 섬세하여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해주는 가사들이 아닌가요? 그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었을 그런 마음의 표현들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느낌들 뿐이 아닐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예찬일 수 있고, 그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역사의 현실에 대한 탄식일 수도 있고, 그 속에서 빛나는 신앙의 고백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인생의 경험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을 다 겪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감정은 요동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람에 요동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모습을 드러냅니까? 시편들은 수많은 인생의 국면에서 경험하는 감정,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평안에 대한 고백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자리에서 부를 찬송과 노래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쁠 때만이 아닙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승리할 때나 패배하여 낙심할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해야 하고 어떻게 고백해야 하며, 어떤 찬송을 드릴 수 있는지를 시편은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입을 열어 하나님께 합당하게 반응하게 하는 일을 돕는 최고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시편들은 묵상에 최적화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은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거나 신비주의로 흘러가게 되는 요인들 가운데 중요한 문제 하나를 시편이 지적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현실이며, 현실 안에 있으며, 현실에 뿌리박고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시편이 그것을 얼마나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반대의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소위 찬양과 경배는 낯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찬양과 경배가 그런 것은 아니고, 모든 인도자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도자와 팀은 준비 완료를 하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악기가 연주되고 인도자는 마이크를 잡고 즐겁게 찬양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종종 내 감정과 내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찬양을 따라서 부르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찬양인도자는 모두 함께 구호를 따라 외치라고도 합니다. “빅토리! 빅토리! 빅토리!”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기에 쳐지는 곡조나 쳐지는 가사는 없습니다. 쳐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쳐진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라도 쳐진 마음을 억누르고 승리와 기쁨을 누리라고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직한 것도 아니며,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누르거나 속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기도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찬양 시간에는 갈등의 요소나, 혼동 혹은 공허감을 솔직히 인정하는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반복, 반복, 또 반복합니다. 때로는 이것을 견디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고 느끼곤 합니다.
시편은 우리가 그렇게 감정을 속이거나 억누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편들은 바로 시인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감정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물론 그 감정의 상태 그대로를 가진 채 모든 것이 다 끝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을 시편은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시인은 자신의 갈급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시인은 주변에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습니다. 시인은 과거에 자기가 주의 백성과 함께 누렸던 은혜를 회상합니다. 그런 날을 다시 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시인은 마음이 상하고 낙심하며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래서 다시 그는 자기 영혼을 향해 명령합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래리 크랩은 [하나님의 러브레터]에서 시편이 어떤 책인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설명해주시는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은 마취제가 아니야. 시편은 추운 겨울날 마시는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이 아니야. 시편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매섭게 추운 캄캄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자가 외치는 기도란다. 구원을 소망하며 나에게 자신을 던지면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본향으로 인도한다는 걸 신뢰하는 이가 부르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찬양이다. 욥은 나의 계획이 어둠이나 추위나 바람과 아무 상관이 없기를 바라던 소망을 고정시키고 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단다.”
어떻게 더 이상 솔직할 수 있습니까? 적당히 찬송하고 “이젠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실 것을 알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신앙이란 현실이다, 신앙이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영혼의 거울, 시편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거울처럼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서 성령은 온갖 비탄과 슬픔과 두려움과 의심과 희망과 염려와 당혹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모든 감정들을 다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편이 단지 감정의 문제만 다루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시편은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의지를 움직이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의 차원에서 보면, 시편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의지의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는 지혜의 길이 무수하게 제시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이고 삶입니다.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 길이고 궁극적으로 바른 행동인지 그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 따라서 시인 자신이 “제가 ~하리이다”라는 표현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감정을 속이지 않고 나아가더라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길로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는지, 의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끝으로 시편이 가장 풍성하게 다루는 것은 감정의 차원입니다. 우리는 감정은 통제할 수 없으며 표출해야 한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통제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가령, 시편에는 찬양의 기쁨과 신뢰의 평안이 있는가 하면, 탄식의 슬픔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러 오시지 않는 것 같아서 수치와 당혹감을 느낍니다. 시편 44편 9절과 15~16절을 보지요.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시 44:9, 15~16).” 두려움의 감정은 또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시편 56:3만 보지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슬픔의 감정도 표출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6?7).” 의심의 감정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간혹 의심이 드는 연약한 자리에 이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시편은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 73:3?5).”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만 있는게 아닙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이 표현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도 드러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들입니까?
시편은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이 그치지 않을 수 있으며 그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시편을 노래하라
그러니 성경 뿐 아니라 특별히 시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힘겨울 때, 우리는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찬송이기에, 여러분이 읽으실 때에도 소리를 내서 읽으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용도에 더 맞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예배 중에 시편 찬송을 부르는 교회들도 더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래의 전통에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의 용도로 잊혀져있던 시편이 다시 예배 찬송으로 등장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시편찬송집을 출판하고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을 대중화시킨 사람입니다. 후에 개혁교회의 전통에서는 제네바에서와 같이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이 죽 이어져 내려와서 그것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보존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한 장로교회에서는 시편찬송만이 찬송이라고 생각하여 고집하지 않고, 다른 많은 찬송들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는 처음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 시편 찬송이 아니라 현대적 찬송가였기 때문에 아직도 시편 찬송이 아닌 찬송가가 더 익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귀하지만, 잘 분별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시편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찬송들은 그 시대의 신앙의 산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우리가 원래의 의도를 따라서 시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시편 찬송을 주일 예배에서 한 곡씩 병행하여 부르려고 생각합니다.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서 찬양으로 불려지게 될 때, 우리는 시편을 썼고 노래했던 옛적 우리 믿음의 조상들과 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시편을 노래하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은 그냥 읽기만 하라는 용도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가 아니라, 시편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읊조려지고 노래로 불려질 때, 여러분은 그 말씀 안에 깊이 침잠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의 모든 고백과 기도, 찬송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과 기도, 그리고 찬송이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을 느끼십시오. 시편의 모든 말씀을 느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시편을 사랑하고 그 모든 고백을 읽으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 시편의 노래들이 풍성하게 흘러나올 수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시편 42편을 쓴 시인처럼, 낙심하고 불안하여 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의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